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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서평 | <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 - 가짜 말고 진짜 사회주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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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조회 5,331회 2021-07-14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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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이란 책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불평등 문제를 실증적인 데이터로 분석해 일약 사회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신간 <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가 번역 출판됐다. 이 책은 피케티가 20169월부터 20214월까지 <르몽드>에 기고한 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혹여나 제목에 매력을 느껴 구입을 고민하는 동지들이 있다면 적극 말리고 싶다. 물론 사회주의는 언제나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이지만, 이 책에서 피케티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케케묵은 사회민주주의 정책에다 최근의 사회적 이슈 몇 가지를 덧붙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피케티가 제안하는 대표적인 정책은 교육의 평등, 사회복지국가, 기업체 내에서 권력의 분배, 자산세와 상속세를 통해 전 국민에게 최소자산 지급등이다. 이를 통해 불평등을 극복하고 권력과 부와 지식이 모두 영속적으로 순환하는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정의로운 조세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유럽연합 내에서 각국의 세금 덤핑 등을 예방하기 위해) 유로존 재무장관들의 밀실 회의가 아니라 민주적실질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춘 유럽의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온건한(?) 주장에 피케티는 왜 사회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일까?

 

갈 데까지 치달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피케티는 책의 서두에서 “1971년에 태어난 나는 공산주의의 유혹을 받을 일이 없었던 세대에 속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이미 소비에트 방식의 공산주의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피케티는 구소련 붕괴 후 30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모습을 고수한 자본주의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건 당연한 얘기가 되었고 다시 사회주의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심화하고 지구의 자연자원을 고갈하는 체제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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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도표 4.1 

 

일례로 프랑스에서 지난 2세기 동안 사유재산 집중도의 변화 양상을 살피면, 자산 불평등의 양상이 다시 심화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파리의 상위 1% 부유층은 전체 사유재산의 67%를 보유했다. 이 비중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러시아혁명으로 상징되는 강력한 노동자계급투쟁을 거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같은 시기에는 제한적이나마 하위 50%의 자산 소유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다시 상위 1%의 자산 비중이 늘어나고, 완만하게 성장하던 하위 50%의 자산 비중도 다시 줄어들고 있다.

 

벌어진 빈부격차는 교육 불평등으로 직결된다. 피케티는 내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허황된 서사를 동반하는 건 어떤 사회에서든 필요한 일이다. 현대사회에서는 능력 본위의 서사가 통한다. , 동등한 기회를 지닌 상태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발생하는 근대사회의 불평등은 정당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가능성은 거의 100% 부모의 소득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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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도표 0.8

 

구체적으로, 미국에서 소득 하위 10% 구간 학생들이 고등교육을 받게 될 확률은 20%지만 상위 10% 구간 학생들의 경우 이 비율이 90% 이상이다. 게다가 두 집단이 받는 고등교육을 동일한 질의 교육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도 횡행하는 공정한 경쟁의 논리는 애초부터 기회의 평등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자본주의의 철저한 계급질서 앞에서 헛소리에 불과하다.

 

피케티가 보기에 공정하게 부를 재분배하기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투자, 독일이나 북유럽 식의 기업 내 공동결정 제도, 누진세제 도입 등을 통한 소득과 자산의 순환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피케티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조세정책의 정의다. 피케티의 글은 프랑스 마크롱 정부가 부유세 폐지 등 최상위 부자들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줬던 시기에 쓰인 것들이 대부분이라 특히 이 점이 강조되는 것으로 보인다. 피케티는 강력한 누진세율이 자본주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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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도표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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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도표 10.11

 

그런데 1980년대 이후 각국에서는 누진세율이 하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피케티에게는 부유세 부활은 물론, 고율의 누진세와 상속세를 복원해 사회주의를 향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 정책의 뒷수습을 위해서도 강력한 조세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향후 인플레이션이 상당한 수준(3~4%)에 이르면 통화공급을 중단하고 조세정책으로 대응해야 하는데 통화공급은 결국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분배의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프랑스가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공공부채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 부유층에게 예외적인 과세 방침을 적용했기 때문이라며 바로 지금 그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소득과 자산의 순환을 통해서 참여적이고 지방 분권화된, 연방제 방식이며 민주적이고 또 환경친화적이며 다양한 문화가 혼종되어 있으며 여성 존중의 사상을 담은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정말 사회주의인가?

 

그러나 피케티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진짜 사회주의로 보기도 어렵고, 그의 분석이 제대로 된 과학적 분석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첫째, 피케티의 분석에는 선후가 뒤바뀐 채 근본 원인이 생략된 부분이 많다. 예컨대 강력한 누진세율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됐다면, 피케티는 대체 왜 1970년대 경제위기를 거치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누진세율이 하락했냐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피케티는 이에 대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답변은 생략한 채, 이를 단순히 정책 선택의 문제, 또는 일종의 사회 정의의 문제로 뭉개려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 등장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의 이윤율 하락이다. 수천만 명이 희생된 두 차례의 야만적 세계대전을 거친 자본주의는, 전후 폐허 위에서 상당 기간 높은 수준으로 이윤을 창출하며 제한된 수준에서 노동자 대중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윤율이 떨어지자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계급 지배를 이어나가기 위해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방위적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이윤을 위한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에서, 어느 계급에 유리한 정책 결정이 이뤄지느냐는 적대하는 두 계급의 실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사회 정의도덕성의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피케티 류의 사회주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일찍이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지의 어떤 부분은 부르주아 사회의 존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사회적 폐해를 제거하고자 한다, 피케티 류의 사회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주의로 부르며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이 사회주의는 물질적 생활 상태의 변화를 오직 혁명적 방식으로만 가능한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들의 철폐로서 이해하지 않고, 이 생산 관계들의 토양 위에서 행해지는, 따라서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는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기껏해야 부르주아지의 지배 비용을 감소시키고 그들의 국가 운영을 간소화시킬 뿐인 행정적 개선으로 이해한다.”

 

둘째, 피케티는 강력한 조세 정책을 통한 부의 공정한 재분배를 주장하는데, 이는 종양은 그냥 놔둔 채 해열제 처방으로 종양을 치료하겠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1846년에 마르크스는 모순들을 화해시키려는 열망에 들떠 있는 프루동 씨는 이 모순들의 기초 자체가 전복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은 한 번도 떠올리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이 물음을 피케티에게도 던져볼 만하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독일 노동자 운동이 당 강령으로 노동 수익의 공정한 분배를 운운한 것을 강력히 비판했다. “(공정한)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거기에 중점을 두는 것은 도대체 잘못된 것이다. 부의 불평등이란 한편에서는 사회의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자본가계급이, 다른 한편에서는 (비싸게 팔든 싸게 팔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대립해있는 생산 방식 자체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 수단의 분배는 생산 조건 자체의 분배의 귀결일 뿐이다.”

 

하지만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주장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생산 방식에서의 계급 적대라는 근본 문제를 빼놓고 공정한 분배를 운운하는 것은 역사적 퇴보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피케티가 그렇다. 지금 진짜 필요한 것은 극심한 부의 불평등을 다소 완화하기 위한 일련의 미봉책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생산수단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어 불평등의 근원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고율의 누진세 등 자본가에 대한 과세 정책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투쟁을 통해 자본가들의 생산수단 독점에 아무런 사회적 정당성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할 수 있다.)

 

셋째, 그나마도 피케티에게는 자신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아무런 전략이 없다. 되풀이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민주적 유럽의회 건설뿐이다. “주권을 갖춘 유럽 차원의 의회에서 토의와 표결 절차를 통해 민주화 예산을 편성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유럽의회 창설을 제안하는 이유는 정세에 빠르게 대응하면서도 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조직체계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유럽 차원의 새로운 조세제도를 먼저 논의하고 표결하는 기관을 마련할 수 있다.”

 

물론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계급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밀실에서의 정책 결정을 서슴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은 당연히 더 많은 민주주의, 완전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러나 민주적 정책 결정 구조가 갖춰졌다 해서 그 자체로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정책 결정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민주적 유럽의회가 생기면 자본가들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는 피케티의 주장은 순진한 낭만에 불과하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차티스트들이 보통선거권을 나이프와 포크의 문제”, “좋은 집과 맛있는 음식과 좋은 벌이와 짧은 노동시간의 문제로 제기할 때만 하더라도, 다수의 지배를 뜻하는 민주주의는 곧바로 사회의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뜻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자본주의는 자본가 이데올로기를 노동자들 속에 내면화함으로써 자본가계급독재의 민주적 정당성을 갖춰놓은 지 오래이다. 제도권 교육, 주류 언론, 경영학 교양수업에서 주입받은 서푼짜리 얕은 논리를 불변의 진리인 양 숭상하는 이들이 온라인 공간에 부지기수이다.

 

그러나 어떤 이데올로기도 물질적 기반 없이 지속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 모순 앞에 생존의 벼랑으로 떠밀린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깨뜨리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향한 역사적 진군을 시작할 가능성은 바로 이 계급투쟁의 전개 과정에 달려있다.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거대한 주체적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 조직, 연대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진정한 노동자 대중투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의 문제의식이 빠진 사회주의란, 한낱 공상가들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사회주의가 시급하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이전의 공상적 사회주의조류가 등장한 배경을 두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미성숙 상태, 미성숙한 계급 상황에 미성숙한 이론들이 조응한 것이라 평가한 바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미성숙했다거나, 계급 적대가 미성숙했다고 볼 여지는 전무하다. 그렇다면 현재 피케티 류의 온건한 사민주의 정책 모음이 사회주의란 딱지를 붙인 채 돌아다니는 유일한 이유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주체적 미성숙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자 운동은 20세기 초반 강력한 계급투쟁으로 자본가들로부터 적지 않은 성과물을 쟁취해냈지만, 전후 호황 종료 이후 펼쳐진 자본가계급의 공격 앞에서 몇 차례 패배하고 후퇴한 이래 아직 자신의 역량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황이다. 거칠 게 없어진 자본가계급은 자산 투기, 금융 투기로 부의 성새를 더욱 높이 쌓아올린 채 반복해서 노동자계급의 희생만을 강요하고 있다. 멈출 줄 모르는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을 실질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투쟁의 대중적 전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산업전환과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 플랫폼 노동 등 각종 비정규 노동을 철폐하기 위한 투쟁, 일체의 해고를 금지시키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성차별 등 모든 종류의 사회적 억압을 철폐하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진짜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공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 속에 사회주의를 향한 길이 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해방이라는 본래 의미에서의 사회주의는 정말이지 시급하다. 파산한 자본주의가 인류사회 전체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떠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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