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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GM 사태에서 드러난 노조운동의 약점과 과제① - 패배의 씨앗은 언제, 어떻게 잉태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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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분회 조회 6,056회 2018-05-1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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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M투쟁 패배의 원인을 살펴보고 한국 노동자계급 운동이 어디에서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기사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1부는 2017년 이전 시기를 되짚으며 패배의 씨앗이 언제, 어떻게 잉태됐는지를 다룬다.



“을사조약이다.” “수치스럽다.” “치욕적이다.” 지난 4월 23일 도출된 한국GM 노사 잠정합의안에 현장 노동자들 상당수가 보인 반응이다.


법정관리와 부도 협박을 서슴지 않았던 GM 자본은 데드라인으로 선포한 4월 23일, 오후 2시에 갑자기 부평공장 생산라인을 멈춰 세운 후 “잠정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5시부터 생산 가동 중단하겠다”며 사물함을 비우라는 막장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역시 마치 자기들이 선포한 시한인 양 “4월 23일까지 임단협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떤 지원도 의미가 없어진다”며 노동조합의 양보를 종용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총칼 아래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장 노동자들은 GM 자본과 문재인 정부가 칼만 안 들었을 뿐 임금, 복지와 권리를 강탈해 간 주범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수치스럽고 치욕적이라는 평가는 단순히 정권과 자본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 지도부와 간부, 현장조직, 활동가들은 대체 무엇을 했는지 준엄하게 묻고 있다. 정부와 GM도 미웠지만 노동조합도 미웠다. 그래서 GM의 현장 노동자들 적지 않은 수가 입을 닫아버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것보다 더 나은 결과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일까? 


사태를 차분하게 복기하며 평가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 아직 투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이런 사례가 GM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와 자본가들은 GM 사례를 충분히 연구 검토해 다른 사업장에도 적용하려 할 것이다. 이미 문재인 정부는 금호타이어, STX, 성동조선 구조조정을 지휘하며 얻은 노하우를 한국GM 구조조정에서 활용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노동자계급운동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패배한 투쟁이라 할지라도, 도대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인지 파헤쳐야 한다. GM 현장 노동자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구조조정을 앞둔 많은 사업장 노동자들이 투쟁전선을 제대로 구축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말이다. 아프고 쓰라리다는 이유로 이 과정을 생략해버리면, 노동자계급은 마취상태에서 제2, 제3의 GM사태를 맞이하고 말 것이다.


GM 자본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기까지


2009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모기업 GM의 파산보호신청 영향으로 한국GM(당시 GM대우)도 잠시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2009년 그 짧은 시기를 뺀다면 한국GM은 2006년 이후 2012~13년경까지 외형적 성장을 이어갔다. 완성차 생산량은 연간 80만 대까지 치솟았고, 그보다 많은 CKD 수출을 기록했다(120만 대).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GM 차량 중 무려 20%가 한국GM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인력규모도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늘어났다. 사내하청 인력 일부를 ‘발탁채용’하는 등 정규직 신규채용이 수십~수백 명 규모로 실시됐고, 비정규직 사내하청 규모도 늘어났다. 생산량과 고용의 안정은 노동자들의 자신감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다.


2011년 10월, 한국GM지부는 규약을 변경해 사무직 노동조합과 1사 1노조를 실현한다. 한 몸이 된 사무지회는 2012년 봄에 부평공장에서 매주 1천 명이 넘는 집회로 분위기를 띄우며 생산직 노동자들에게도 강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기본급 동결을 강요받았던 GM 노동자들은 생산량 증가세 속에 점차 자신감을 가졌고, 늘어난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는 현장의 분노도 축적시켰다. 


2012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파업은 그해 9월 초까지 총 13일간 매일 주야 3~4시간씩 총 96시간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집행부가 서둘러 추진한 8월 중순 잠정합의는 18.7%라는 기록적인 찬성률로 부결됐다. 그 뒤로도 24시간 파업이 더 이어지며 사무직 연봉제 폐지라는 상당 수준의 양보안을 GM 자본이 내놓고 나서야 종결될 수 있었다. 2001년 정리해고투쟁 이후 지금까지를 통틀어 한국GM 대중투쟁의 파고가 가장 높이 솟구쳤던 것이 바로 2012년 투쟁이었다.


사무직과 생산직이 1사 1노조로 통합하고 가장 역동적인 투쟁이 벌어졌던 2012년


하지만 GM 자본도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2년 11월, GM은 돌연 차세대 크루즈를 군산공장에 배정하지 않겠다고 통보한다. 한 달 뒤인 12월에는 사무직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공격을 시작한다. 이것은 2012년 정점에 오른 대중투쟁을 잠재우기 위한 일시적인 공격인가, 아니면 이후 몇 년간 이어질 공격의 서막인가? 간부와 활동가들은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 못했고 혼란스러워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생산량과 고용은 2013년에도 이전 수준을 유지했다. 2013년 초에 GM은 5년간 8조 원을 투자한다는 ‘GMK 20XX’ 계획을 발표하며 노동자들을 현혹했다. 하지만 곧 GM의 공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졌다. GM은 2013년 12월, 한국GM 자회사로 유럽판매법인 역할을 해온 쉐보레 유럽의 철수를 결정했고 2014년 1분기에 또다시 사무직 희망퇴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2012년 말에는 불분명했던 본질이 2013년 말에는 명확해진 것이다. 일시적인 공격이 아니라 GM 자본의 면밀한 전략에 입각한 본격적인 공격이었다. 2014년부터 생산량도 곤두박질친다. 당장 완성차만 20만 대 가까이 줄어들게 되며 CKD 수출량도 하락을 면치 못했다. 자본의 공격성이 분명해지고 실제 피부에도 느껴질 정도가 됐으니 노동자들도 본격적인 저항과 투쟁을 조직해야 할 시점이었다.


거듭된 배신행위, 해체되기 시작한 계급운동


그러나 간부와 활동가들의 상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상황은 혼란스러울 것 하나 없이 명확해졌지만, 많은 간부와 활동가들이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수 간부들이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기를 회피했다.


2014년 생산량 하락은 대부분 군산공장에서 일어났다. TPS(휴업)가 일상이 됐고, 일하는 날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아졌다. GM은 1교대 전환을 요구했고, 최소한 잡다운(JPH Down, 시간당 생산량 감축)이라도 해야 한다며 노동조합을 압박했다. 결국 2014년 2월 말에 군산지회는 제대로 저항도 조직하지 못한 채 잡다운 요구를 수용했다.


잡다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량이 줄어서 시간당 생산량만 감축되는 게 아니다. 일자리 수도 함께 줄어든다. 그 고통은 온전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담해야 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약간의 전환배치만 있을 뿐 고용은 유지된다. 2014년 잡다운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방어를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내팽개친 계급배신행위였다.


그러나 GM 자본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군산공장 생산물량을 더 줄였고, 또다시 TPS가 늘어났다. 자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신차(크루즈)를 받고 싶은가? 그러면 1교대에 합의하라!” 잡다운 합의를 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2015년 1월, 군산지회는 또다시 비정규직 대량해고를 의미하는 1교대 전환에 전격 합의하게 된다. 2014년에만 360명, 2015년에는 600~700명, 도합 1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군산공장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일련의 계급배신행위가 벌어진 군산공장에서 정규직에게는 밝은 미래가 보장됐는가? 계급배신의 대가로 2017년 초에 배정받은 신차 크루즈, 그러나 GM은 이미 남미, 북미에서 크루즈 현지생산을 시작하며 한국GM의 수출물량을 확 줄여버렸다. 내수에서도 어처구니없는 가격정책으로 판매량은 바닥을 쳤다. 


비정규직 1천 명 해고를 용인하고 수많은 양보를 거듭한 끝에 신차 크루즈를 배정받은 지 1년 만인 지난 2월, GM은 군산공장 폐쇄를 전격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노동조합이 알아서 기어도 무자비하게 짓밟는’ 자본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GM은 오래 전부터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했고, 노동조합이 아무리 양보해도 공장폐쇄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2012년에 활발한 대중투쟁이 벌어졌던 이곳에서, 불과 2년 만에 계급배신행위가 현장의 별다른 저항 없이 용인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활동가와 간부, 현장조직은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생산량이 늘어나고 그 어느 때보다 고용이 안정됐던 바로 이 시기에, 활동가와 간부들은 미래를 위한 전략적 투쟁을 준비하기보다 자본이 풀어놓은 미끼와 떡밥을 덥석 물며 도취되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는 2016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016년 5월, 검찰은 납품비리혐의로 한국GM지부 전 지부장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화장실에 감춰진 수억 원의 돈다발을 발견했다. 군산공장에서 1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쫓겨나던 바로 그 시기에 지부장은 납품업체로부터 돈을 챙긴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으로 지부장과 간부가 구속됐고, 검찰은 노조 간부들이 ‘취업장사’를 벌인 혐의에 대해서도 전면적인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수십 명의 대의원, 간부, 활동가들이 정규직 취업장사를 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모두 2012년부터 시작된 발탁채용, 즉 사내하청 노동자들 중에서 정규직으로 신규채용을 했던 일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가장 역동적인 대중투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 한복판에서, 비록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노조 간부들이 사내하청 노동자들로부터 수천만 원씩 돈을 받고 정규직 채용을 회사에 청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6년 11월, 이런 취업비리에 다름 아닌 현직 지부장도 연루됐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재벌과 결탁한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이 폭로되며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조직하던 바로 그 시점에 터져 나온 사건이었다. 당시 지부장은 2017년 2월 사퇴했지만 얼마 후 1심 재판에서 법정 구속됐다. 검찰은 전현직 지부장을 포함해 17명의 노조 간부들을 취업비리혐의로 기소했다.


조합원 직선으로 선출된 전현직 지부장이 비리로 구속될 만큼, 노사협조주의 세력만이 아니라 그동안 민주파로 행세해 왔던 현장조직까지 거의 모든 세력이 취업비리에 연루돼 있었다. GM이 본격적으로 고용을 공격하던 시기에 이런 비리가 지속됐다는 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일련의 계급배신 행위가 현장의 별다른 저항 없이 용인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타락해 있었고, 그만큼 미조직, 비정규직 대중으로부터의 사회적 고립은 커졌다. 


하나의 가능성 -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반격


반격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역동적 대중투쟁의 주역이었던 사무지회는 2014년 교섭과 투쟁을 통해 미국식 업적연봉제를 폐지하고 호봉제를 쟁취했다. 2012년 말과 2014년 초 2차례의 희망퇴직 공격을 뚫고 쟁취해낸 결과였고, 당시 박근혜 정권이 성과급제, 직무급제 등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더욱 빛나는 성과였다. 하지만 이 성과는 사무직 안으로만 갇힌 채 생산직, 정비직 쪽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2015년이 되면 GM은 한국GM의 자회사인 쉐보레 러시아까지 철수, 매각하면서 공격 수위를 더 높이게 된다. 군산공장 가동률은 더 떨어졌고 부평2공장과 창원공장 생산물량도 감소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은 군산공장 비정규직 집단해고를 용인하는 계급배신행위를 저지르고, 일부 지도부, 간부, 활동가들은 각종 비리에 연루돼 있었다. 현장 노동자들의 체념과 패배주의까지 더해졌다.


새로운 활로는 없는 것일까? GM 정규직 노동자들의 사회적 고립감이 심해지고, 자본과의 대결은 점점 더 열세에 빠지고 있었다. 만일 이 시기에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돌파구가 있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비정규직 부문이었다. 특히 2006년 투쟁의 참담한 패배로 노동조합 조직이 무너졌던 창원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2013년 이후 노동자계급운동이 해체되기 시작한 한국GM 현장의 흐름을 거슬러 유일하게 성장한 부문이 바로 창원공장 비정규직투쟁이었다.


그들에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다만 그들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을 뿐이다. 우선 무너진 노동조합을 재조직하기 위해 남아 있는 소수의 조합원들이 불법파견소송을 제기한다. 이것만 보면 다른 사내하청 노조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정규직화를 위한 소송에만 몰입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소송은 주로 조직화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고 고용안정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현장투쟁을 조직했다.


특히 단기계약직을 활용하는 3, 6, 9 계약제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해고에 맞선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휴업급여 미지급, 각종 수당 누락 등을 고발하며 불법천지 현장에 근로기준법, 노동법이 살아 움직이도록 했다. 이런 과정에 불법파견 소송 1심, 2심 승소 소식이 전해지자 미조직 노동자들이 점차 노동조합 문턱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이들의 운동은 비정규직 부문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뜻있는 생산직, 사무직 등 정규직 활동가들과 학습 및 모임을 함께 하며 글로벌 GM의 의도를 분석하고, 그에 맞선 계급적 운동을 건설하는 데 상당한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창원을 넘어 부평공장, 군산공장으로까지 확장됐다. 2014년에는 이런 뜻에 공감하는 정규직,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연월차를 써가며 군산공장을 찾아 1교대 전환 반대와 비정규직 조직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헌신적인 노력이 지속되자 군산공장 비정규직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해 2015년 초에 비정규직지회 조직에 성공하게 된다. 비록 결성된 지 얼마 안 돼 군산공장 1교대 합의로 조합원 전원이 해고되고 말았지만, 집단해고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정규직 조직화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직화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 창원공장을 넘어 계급적 운동을 조직하려 했던 생산직, 사무직, 비정규직 활동가들에게서 나온 힘이었다.


 

2015년에 부평, 창원의 생산직, 사무직, 비정규직 활동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군산비정규직지회가 

계급배신적인 군산공장 1교대 전환 반대, 비정규직 조직화에 나섰다.


이러한 힘은 다시 창원공장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2016년이 되면 3년 전 첫 소송을 제기한 조합원 5명에 대해 대법원이 불법파견 확정판결을 내리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모두 창원공장 정규직으로 출근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은 다시 한 번 창원공장 미조직 노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화로 이어졌고, 전체 조직대상의 25% 수준(160여 명)으로 조합원 규모가 늘어났다.


이 소식은 창원을 넘어 부평공장과 군산공장으로 알려지게 됐고, 그곳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한다. GM 자본은 정규직운동의 퇴행과 정반대로 성장하는 비정규직투쟁에 집중 경계태세를 갖추게 된다. 심지어 창원공장에서는 비정규직지회 조직화에 제동을 걸기 위해 하청업체 관리자들을 앞세워 업체가 불법파견 소송을 대행하는 코미디 같은 광경도 펼쳐졌다.


비정규직투쟁에 대한 GM 자본의 공격은 2016년 말 4개 하청업체와의 도급계약 해지로 이어졌다. 이들 4개 하청업체는 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 밀집된 곳으로, 노동조합 탄압 목적임이 너무나 명백했다. 하지만 이 공격은 조합원, 비조합원을 불문하고 하청업체 전체 노동자인 360명의 고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다.


창원비정규직지회의 조직률은 25%에 불과했지만 대부분의 조합원들이 생산의 핵심공정에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독자적으로 생산을 멈출 힘을 갖고 있었고 이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생산에 타격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당시 박근혜 퇴진투쟁으로 도도하게 올라오던 촛불시위에 적극 결합하며 GM 자본을 포위했다.


GM 자본은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온갖 악선동을 퍼부으며 비정규직투쟁과 이간질을 시도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정규직지회 파업으로 간헐적인 생산중단사태가 연말까지 이어지자 결국 대화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비정규직지회는 교섭권을 지부장에게 위임했고, 2016년 마지막 근무일(12월 29일)에 합의를 하게 된다.


정규직 노조의 대리교섭을 넘지 못했고 자본의 정규직, 비정규직 이간질에 약점을 노출했다는 한계가 남긴 했으나, 3승계(고용, 단협, 근속승계) 등 대부분의 요구를 쟁취해낸 것은 분명한 성과였다. 취업비리, 납품비리로 전현직 지부장과 활동가, 간부들이 사법처리되는 등 정규직운동의 퇴행이 벌어지던 악조건 속에서 거머쥔 값진 승리라 할 수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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