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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책 <시설사회>를 읽으며 노동운동의 확장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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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자서울성모병원 노동자 조회 4,638회 2021-02-2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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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는 흔한 생각에 맞서는 장애인들

 

 

장애여성공감이 엮은 책 <시설사회>는 탈시설 운동 전반을 다루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시설이 있다. 중증장애인, 미혼모, 탈가정 청소년, 난민, 이주민, 노숙인, 정신장애인, 에이즈환자, 성폭력피해자 등을 위한각종 복지시설은 정작 그 수용자 또는 이용자를 위해 복지를 제공하는 곳이라기보다는 그들의 권리를 억압하거나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다.

 

영화 도가니에서 그려진 사례(광주인화학교와 인화원)처럼 시설에서 발생한 폭력이나 비리사건이 어쩌다 큰 이슈가 될 때 잠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거나 정부가 나서서 개선책을 내놓긴 하지만, 그때뿐이다. 이 책은 이런 시설들의 문제점, 나아가 이런 시설의 존재를 당연시하고 시설 바깥 일상공간 전반에서도 사회구성원 일부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시설사회에 의문을 던지며 탈시설을 주장한다.

 

가족과 도시

 

이 책의 첫 번째 장은 가족이다. 시설 문제를 다루는데 가족이 시작점인 게 좀 이상한가? 시설을 이용하거나 시설에 장기(영구) 수용된 이들은 누군가의 가족이(). 그리고 가족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시설에 보냈거나 또는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버림받아서 어쩔 수 없이 시설에 보내진 사람들이다. 미혼모와 입양아, 탈가정 청소년, 한부모가정, 중증장애인 등 이른바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시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

 

가족은 흔히 친밀한 관계라고 한다. 정신장애인이나 어린 아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에서 종사자를 엄마나 아빠 등으로 부르게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테다. “가족은 사생활권과 자율성이라는 관념으로 만들어진 감옥일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뒤통수 한 대 맞은 느낌! ‘가족이니까라는 일반적인 생각, 가족이라는 틀에 억지로 관계를 끼워 맞추려는 우리의 습관이 어쩌면 오히려 서로의 자유나 권리를 침해하거나 그것을 방치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가족은 이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현대사회에는 일그러진 가족관계도 얼마든지 있다.

 

학대사건의 35%가 거주지에서 발생한다면 집이 시설보다 안전한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설과 지역사회를 이분화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가족 자체도 도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가족을 단위로 개인의 시민권을 침해해 온 제도적 가족주의등의 화두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다.

 

가족 문제와 함께 도시를 보자. 도시의 구조와 리듬은 신호등에 따라 차량 흐름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어지고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보폭으로 걷거나 휠체어로 이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리듬이 깨진다. 그것은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 따라서 배척해야 할 것으로 간주된다. “도시 내 리듬의 형성은 그 시작부터가 정치적인 과정으로 특정한 권력과 구조의 시선과 선별작업이 함축되어 있다.”

 

필자들은 이런 배타적인 도시의 리듬을 깰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자동차들의 흐름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그 흐름은 수많은 교통법규와 반복적인 수행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라면 탈시설을 추구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그 리듬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탈시설

 

이렇게 가족과 도시로부터 던져진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 무엇보다 탈시설 운동에 직접 참여해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것은 상당히 낯선 영역이다. 그러나 여러 시설 이용(수용)자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 소수자, 가난한 밑바닥층, 차별받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노동자인 우리는 이 영역을 낯선 것으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먼저 시설이란 무엇인가부터. 책의 몇 구절을 같이 읽어보자.

 

시설은 이질적인 집단을 배제,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배제의 논리는 복지대상의 자격을 심사하는 논리와 일치한다. 갱생의지, 사회와의 통합정도는 보호받을 만한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복지의 역사는 특정 집단을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에서 구제의 대상으로, 구제에서 편입의 대상으로 재배치하는 과정이었다. 정신질환이 있거나 정신장애가 있는 이들은 여전히 구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만 여겨지고 있다.”

 

시설은 사회구성원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다수 정상들의 안전과 편리함을 위해 특정 집단을 사회로부터 분리, 배제하며 관리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시설이 정책적, 제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공공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 민간에 의해 유지된다. 구치소나 난민(외국인)보호소 등 국공립의 경우에도 반인권, 폭력, 비리, 폐쇄성이라는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간시설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설은 문제적 공간, 개혁 또는 폐지의 대상이 된다.

 

탈시설 정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거주시설 입소자가 시설을 떠나 자기 공간으로 이주하는 탈시설. 이 경우 자립정착금 지원, 임대주택 공급, 탈시설지원센터 운영이 필요하다. 둘째, 시설의 규모, 환경, 서비스 내용과 방법을 변경하는 기존시설 개혁중심의 탈시설.”

 

둘 가운데 어느 것이든 사회적, 국가적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적 뒷받침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리고 책은 첫째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탈시설 운동은 시설의 소규모화나 민주화 같은 탈시설화가 아니라 시설폐쇄를 목표로 한다. ‘누군가는 시설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전제 자체에 도전한다.”

 

좋은 시설은 없다

 

사회복지 체계를 집단별로 만들면서 해당집단이 열등하다는 낙인을 만들고 분리와 배제를 촉진하여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모순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탈시설 운동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집단의 구분이 개인의 신분으로서 일상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 선별적 복지를 하겠다며 사람들을 분리하는 건 애초의 의도나 목적과 무관하게 억압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책에서는 다양한 시설의 사례를 상세히 다룬다. 난민(외국인)보호소나 요양병원에 반강제적으로, 반영구적으로 수용된 에이즈환자의 실상은 그 자체로 끔찍하다. 어쩌면 이런 시설은 범죄자를 수용하는 구치소보다 더 무법적이고 반인권적인 곳일지도 모른다.

 

에이즈 환자를 입원시킨 요양병원은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완벽히 수행하고 있다. ‘에이즈 환자와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맥락에서 에이즈 환자를 배제하는 1,500여 개의 요양병원이나 에이즈 환자를 받아주고 있는 요양병원은 같은 꼴이다. 좋은 요양병원은 에이즈 환자도 퇴원할 수 있다는 조건을 수반해야 가능하다.”

 

탈시설 운동에서는 좋은 시설은 없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좋은 시설을 만들면 되지 않은가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시설의 바깥, 즉 이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니라면 좋은 시설은 과연 가능할까? 따라서 탈시설 운동이 도전하는 구조는 시설을 유지함으로써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이 사회, 사회구성원 일부를 배제하고 낙인찍고 차별하며 분리수용하는 것을 사회통합과 국민안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운동들의 연대

 

탈시설 운동은 노동운동과 별개의 것일 수 없다. 장애인, 노숙인, 이주 노동자, 난민, 성폭력피해자, 이 가운데 하나라도 노동자와 무관한, 노동과 무관한 존재가 있나? 이들 모두는 곧 노동자계급의 일부이며, 노동권, 인권, 주거권, 참정권 등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 이런 저런 다름을 이유로 이들을 사회 바깥 외딴 섬에 가두고 권리를 박탈하고 없는 셈 쳐도 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따라서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폭력과 무권리에 방치하는 것을 용납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이 자기 역할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더 이상 낯선 영역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이제 우리도 시설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치세하는 자와 무권리상태에서 억압과 착취를 견디며 이 사회를 지탱하는 자로 나뉘어 있는 한, 좋은 시설도, 시설 거주자의 사회복귀도 요원하다. 탈시설 운동은 계급사회의 부당함과 차별을 없애는 운동, 가난한 밑바닥 노동자 민중의 희생과 피땀 위에 이윤의 황금탑을 쌓아올리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깨부수는 운동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연결돼야 한다.

 

탈시설을 위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운동들의 연대가 요청된다. ‘분리된 세계를 없애는 것을 넘어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운동으로서 탈시설 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 노동해방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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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공감, <시설사회 - 시설화된 장소, 저항하는 몸들>, 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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