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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기후재앙과 사회주의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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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김요한 조회 30,798회 2021-02-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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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대안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젊은이들

 

 

20199, 수십만 젊은이들이 기후변화에 맞선 학생파업의 일환으로 전 세계 도시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기후위기운동은 20188월 젊은 스웨덴 기후 활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를 위한 학생파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스웨덴 의회 앞에 서면서 시작됐다. 이 행동에 영감을 얻은 미래를 위한 금요일운동이 유럽 도시들로 확산됐는데, 학생들은 세계 환경위기에 맞서 또 다른 지구는 없다는 구호 아래 등교를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다. 201812월 폴란드 카토비체 기후변화회의(COP 24)에서 툰베리가 힘 있게 연설하면서 이 운동의 사기를 북돋웠다.

 

15세의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명은 극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계속 벌 수 있는 기회를 위해 희생되고 있습니다. 우리 생태계는 내가 사는 나라 같은 선진국의 부자들이 사치스럽게 살 수 있도록 희생되고 있습니다. 소수의 사치를 위해 다수가 비용을 지불하면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가 기후위기운동의 선봉에 서 있다. 현재 기후위기운동의 강령은 정부 당국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긴급한 조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데 제한돼 있다. 그러나 그 운동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충격으로 세계의 젊은이들과 좌파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폭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즉 어떻게 기후변화 위협에 맞설 것인가, 본질적으로 환경파괴적인 자본주의 동학(動學)과 자본가국가의 관계, 그리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 무슨 조치가 필요한지에 대해서다. 무엇보다도 그 운동은 젊은 세대의 광범위한 부문에서 환경위기에 대한 자각을 일깨웠는데,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급진적으로 변혁하지 않고서는 미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세계의 지배층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세력, ‘녹색 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세력, 기후정상회의에서 제기된 겉치레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 그린뉴딜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제안을 내놓는 세력 등으로 나뉘어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로부터는 불평등, 불안정 노동, 지구의 훼손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젊은이들의 대중운동이 새로운 기회를 창출했다.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의 진짜 원인인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해 필요한 혁명전략에 대해 논의할 기회 말이다.

 

기후변화로 불리는 재앙적 현상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 공동의장 데브라 로버츠는 앞으로 수년간은 우리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기후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중요한 과학단체들이 이미 수십 년 동안 기후변화를 경고해왔다. IPCC<사이언스> 같은 유명한 과학저널은 진정 파멸적인 시나리오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왔다. 즉 지금의 이산화탄소 배출 수준이 지속된다면, “세계는 적어도 지난 10,000년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의 기후변화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이것은 지금의 해양순환을 변경시키고 기후 패턴을 급격히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토마스 칼, 케빈 트렌버스, “현대의 지구적인 기후변화”, <사이언스>, 200312)

 

이런 추정이 처음에는 막연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세계가 다음의 파괴적인 결과들을 목격하면서 점차 선명해졌다. 파괴적인 폭풍, 열대 사이클론, 태풍, 허리케인의 증가. 적도에서 극지대로의 열 전달. 토양 수분의 감소. 빙하와 극지대 빙판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그 결과 농경지가 침수되고 해안의 대수층(지하수를 품고 있는 지층)에 염분이 쌓인 것.

 

IPCC에 따르면 1880년부터 지구 표면의 평균온도가 1°C 올랐다. 이것은 이미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극단적인 변화로, 재앙적인 기후현상의 빈도와 지속시간뿐만 아니라 강도도 증가시켰다. 여기에는 카리브해에서 반복되는 허리케인과 점점 파괴력을 더해가는 토네이도도 포함된다. 2017년에 푸에르토리코와 다른 카리브해 나라들을 파괴했던 허리케인 마리아, 3월에 모잠비크에서 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이클론이 그런 사례다. 산불은 더욱 거세고 빈번해져서 전 세계 도시들을 황폐하게 했다. 폭염이 확산돼 세계 인구의 30퍼센트가 영향을 받는다. 남아시아에서는 4,100만 명이 거대한 홍수피해를 입는다. 또 재앙적인 가뭄의 증가도 있었는데, 가뭄 때문에 소말리아에서는 76만 명이 이주해야 했다.

 

유엔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2천만 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것은 전쟁으로 발생한 난민 수보다 많다. 또한 독일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가 기후변화, 특히 지구온난화로 촉발된 무력충돌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표현인 기후전쟁에 대한 논의도 점차 확산되고 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확인한 바와 같이, 현재 추세가 계속될 경우 낮게 잡아보더라도 기후변화의 결과 2030년부터 2050년까지 매년 25만 명 이상이 추가로 사망할 거라고 한다.

 

이런 참화는 제국주의 열강에게 자원을 약탈당한 세계의 가장 가난한 민중에게 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가난한 민중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강력하게 발전한 미국에서조차 기후변화는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초래했다. 최근 서부지역의 산불이나 캐롤라이나의 엄청난 홍수처럼 말이다. 이들 사례 모두에서 환경재앙은 가장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주로 영향을 미친다. 자본이 산출해낸 자원들’, 즉 기술, 기계, 돈 등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과감한 조치로 기후변화에 맞서야 할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IPCC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온실가스 배출을 2030년까지 45퍼센트 감축해야 급격한 해수면 상승, 극단적인 기후현상, 그리고 식량부족을 확산시킬 1.5도의 온난화 임계치 초과를 피할 수 있다.

 

이런 예측 속에서 부분적이거나 개혁적인조치들은 의미가 없다. 지구온난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 어쩌면 가장 파괴적인 징후일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기, 그리고 녹색 자본주의

 

전 지구적 기후변화위기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응은 두 가지 전략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하나는 과학적 증거를 부정하며 기후변화를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캠페인이다. 다른 하나는 녹색 자본주의또는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촉진하겠다는 전략이다. 이것은 국제협정을 촉진하고 생산체제의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재편을 목표로 하면서, 자본주의 축적과 착취의 방식을 보존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진영은 매우 폭넓다. 여기에는 트럼프, 공화당원, 미국의 극우인사들도 포함되지만, 그 중심에는 세계의 거대기업들이 있다. 루시아노 안드레스 발렌시아가 지적했듯이, ‘기후위기 부정 산업을 밀어가는 주요 세력은 에너지 회사들뿐만 아니라 석유, 자동차, 철강 회사들로, 온실가스 배출에 주요 책임이 있는 회사들이다.

 

BP, 엑슨모빌, 코크인더스트리즈 같은 거대기업들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캠페인에 매년 수백억 달러를 지출한다. 그들은 심지어 지구기후연합(Global Climate Coalition) 운영 같은 로비 활동을 벌이는데, 여기서 과학자들과 홍보 전문가들을 고용해 기자, 정부,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가 부정확하며 (온실가스) 배출 규제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됐다는 점을 확신시키려 든다.

 

이것이 기후변화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기본 입장이다. (거짓을 치장하기 위해) ‘대안적 사실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자들이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게 놀랍지는 않다. 간단히 말해 그들의 입장은 기후변화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우리 잘못이 아니고 자연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기후변화의 재앙적 결과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적 증거들도 역시 단순히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물론 과학은 경제적 이익이나 계급투쟁에 영향을 받는다. 자본과 거대독점체들의 제국 아래 중립적인 과학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과학계의 압도적 다수가, 또 심지어 세계 자본주의 지배층의 많은 수가 냉소적으로, 지구 온도가 2°C 이상 오를 경우 전 지구적 재앙을 보게 될 거라는 데 동의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를 퍼뜨리는 자들은 자본주의 경제가 초래한 환경적, 사회적인 파괴를 부정하면서 기후변화가 단지 좀 더 더운 여름을 뜻한다는 거짓 사상을 퍼뜨리는 그들 자신이다.

 

논쟁 반대편 녹색 자본주의진영의 다양함도 만만치 않다. 미국 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에마뉘엘 마크롱, 다양한 번창하는 자본주의 기업들, 세계기구, 심지어 환경운동가들과 NGO들 모두 기후변화 부정론자들의 관점에 반대한다. 신자유주의, 신케인스주의, 그리고 녹색 경제학의 융합을 실천하면서, 그들은 지구온난화를 규탄하며 비싼 비용이 드는 기후정상회의에 참석한다. 기후정상회의에서 그들은 기후를 보호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야심찬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데 동의하지만, 이 목표들은 아무런 진지한 실천적 결과가 없는 일련의 서면 약속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기후변화를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로 인정한다 해도 그 해법까지 제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구온난화에 맞서는 그들 정책의 대부분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며 그 파멸적인 결과를 억제하는 것을 뜻하는 완화적응조치를 촉진하는 것쯤으로 제한된다.

 

이런 종류의 가장 중요한 세계적 전략은 200412월에 비준된 교토의정서였다. 조지 부시 행정부의 참여 거부에도 불구하고, 단지 선진 34개국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다소 감축하는 것을 권고하는 것에 불과했던 이 협정조차 대단한 진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교토의정서는 기업들이 (‘탄소배출권매매를 통해 오염 유발자들이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권리를 승인하는) ‘유연한 방법을 사용해 유의미한 탄소 감축 목표를 피하는 것을 허용해준다. 그렇다.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는 지구온난화 위기를 이용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냈다. 수백억 달러 가치의 탄소배출권이 거기에서 세계적으로 사고 팔린다.

 

교토회의(1997년 제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이어,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아예 실패했고, 2013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제1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는 단지 논의가 꽉 막혀 있다는 사실만 드러냈다. 마지막 주요 정상회의는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였다. 2015195개국 대표들은 당시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이 기후협상 역사상 최초의 보편적 협정이라고 표현한 협정에 참여했다.

 

그러나 철학자이자 생태주의자인 호르헤 리에흐만이 지적한 대로, “지구온난화에 대한 세계 정상회의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으며, 연극 외교를 연습한 것뿐이다.” 파리 정상회의는 단지 지구의 주요 오염 유발자들이 조직한 또 다른 공연에 불과했다.

 

협정문은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2°C, 더 나아가 1.5°C까지 제한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 감축 조항은 국가적 수준에서’, 즉 개별 국가 차원에서 결정된다. 협정문에는 목표 미준수에 대비한 어떠한 형태의 책임, 계획, 점검체계 및 제재조항도 안 들어있다.

 

게다가 그 협정문이 2020년 발효되기 위해서는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최소 55퍼센트를 차지하는 55개 국가의 비준, 승인, 찬성 등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나라든 협정 발효일로부터 3년 후라면 언제라도사전 통지를 하고 협정에서 탈퇴할 수 있다.

 

교토의정서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완전한 코미디다. 이 점은 세계 최고 기후학자 중 한 사람인 NASA 과학자 제임스 한센에 의해 확인됐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정말 사기이고 가짜다. ‘우리는 (기온 상승폭) 2도 제한 목표를 가지고 5년마다 조금 더 잘하려 노력 중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그저 무의미한 말잔치다. 아무런 행동이 없는 단순한 약속이다. 화석연료가 제일 저렴하다면 계속 사용될 것이다.”

 

파리협정이 본질상 탄소 감축에 완전히 무력한데도, 트럼프 행정부는 (교토에서 부시가 그랬듯이) 감축비율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 결정은 필연적이다. 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협정이 온실가스 배출을 제한하려는 시도라 하지만, 그 협정이 설정한 제한은 자본주의 체제와는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이윤 확장과 축적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심지어 지구가 파괴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중국과 미국, 유럽연합이 대기를 파괴하는 온실가스 대부분을 배출하고, 자본가들이 기후변화를 부정하거나 무용한 환경위기 대응 회의를 여는 동안, 세계의 나머지는 기후변화에 따른 타격을 계속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녹색 자본주의로 지구와 인류, 그리고 모든 생물을 존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에 불과한 이유다. 세계 기후위기의 해법은 어떤 경우에도 기후위기를 초래한 바로 그 체제 안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환경위기, ‘그린뉴딜’, ‘지속가능한 자본주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교환관계,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즉 그토록 강력한 생산과 생산수단과 교류수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낸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낸 저승의 힘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이 문장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을 예나 지금이나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문장을 자본과 자연 사이의 모순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세계 환경위기의 무서운 징후들 중에서도 기후변화는 자본주의가 불러낸 저승의 힘의 표지이며, 그 첫 번째 파괴적 결과를 이제 피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 보인다.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현 상황은 지배계급의 이윤욕을 위해 휘둘리는 경제체제의 논리적인, 그리고 결코 우연이 아닌 결과다. 심지어 그 이윤욕 충족이 환경과 전 세계 노동자 농민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그렇다.

 

자본주의는 그 시초부터 자연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는 행태를 드러냈다. 자연이 인류에게 제공하는 자원이 무한하고, 무엇보다 공짜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엥겔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인류가 자연을 정복한 것에 대해 지나치게 자만하지 말자. 그런 정복은 우리에게 복수를 하기 때문에 정복자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것처럼, 자연 외부에 서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연을 지배할 수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육체와 피와 두뇌를 가진 우리가 자연에 속하고 그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자연 변증법>)

 

마르크스는 도시와 농촌 사이, 인간과 지구 사이에서 일어난 물질대사의 균열에 대한 이론에서 자본의 파괴적 힘을 분명하고 비판적으로 인식했다.(‘물질대사의 균열에 대해 더 면밀하게 분석하려면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 유물론과 자연>을 보시오.) 자연의 보편적 물질대사의 균열이 진정 자유롭고 지속가능한 인간 발전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필연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당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의 이론적 지평에서는 먼 시나리오였던 일이, 우리 시대에는 명백한 현실이 됐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생산체제 및 소비방식의 불합리성 때문에 이제 지구의 자연적 균형과 이를 통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 대부분과 수백만 생물 종의 존재 자체가 중대한 위협을 받고 있다.

 

유럽과 전 세계에서 기후변화에 맞서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현실을 점점 더 깨닫고 있다. 그들이 생태위기의 원인으로서 자본주의 체제를 맹렬히 규탄하는 이유다. 그들은 심지어 세계 지도자들이 기후정상회의 선언에서 의도했던 것은 거짓 선전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이를 넘어설 전략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말이다. 그들의 현재 전략은 단지 강력하게 규탄하고,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긴급한 조치를 시행하라고 자본주의 정치 대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에 제한돼 있다. 기껏해야 그들은 그린뉴딜의 전망을 받아들인다. 미국과 유럽의 환경운동가 대부분이 그렇다.

 

미국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뿐만 아니라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같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들도 이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오카시오-코르테즈에 따르면, 다른 어떤 조치보다 그린뉴딜은 미국이 10년 안에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도록 하면서 그와 동시에 재생에너지에 기초한 효율적인 전국 전력망 건설로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대로 그 정책은 지금의 생태위기에 책임이 있는 억만장자 거대회사에게 우리가 이 재앙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인프라를 개발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거대회사들은 상당한 공적지원금을 제공받을 것이다.(‘그린뉴딜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비평은 레프트보이스에 실린 블라덱 플라킨과 로버트 벨라노의 그린뉴딜이 아니라 계획경제가 우리를 구할 수 있다를 보시오.)

 

그린뉴딜이나 이와 유사한 계획들에는 (유엔이 내세운 지속가능한 개발을 위한 2030 의제도 마찬가지인데) 만약 산업화된 거대 국가들의 정부가 현 상황을 인식하게 되면 기업들과 함께 환경보호를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할 것이란 생각이 깔려 있다. 진정한 지속가능한 개발이 마침내 달성되는 것이다.

 

이 개념(‘지속가능한 개발’)의 반복적 사용은 의미심장하다. 수십 년 동안 이 개념이 정치, 경제, 환경 문헌에서 지속됐다. 심지어 반자본주의 좌파로 자칭하는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용어에 대해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1987세계 환경 및 개발위원회에서 발표된 것으로, “미래 세대가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현재의 필요에 맞추는 개발을 뜻한다.

 

그러나 현재의 필요조차 충족되지 않는 자본주의에서, 미래 세대의 필요까지 다뤄질 리 만무하다. 오늘날 진보적인정치세력의 많은 부분에서 지지를 받는 그린뉴딜‘2030 의제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가능하며 현재의 위기를 낳은 기업들이 결국에는 지구를 구할 세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런 생각은 분명하게 모순적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망

 

자본주의 체제에서 우리가 처하게 된 절대적으로 비이성적인 결과에 맞서, 과감하고 긴급한 조치를 시행해야 할 필요성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현재의 재앙에 주요한 책임이 있는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자들의 선의에서 나올 수 없다. ‘녹색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거대기업이 내세우는 새로운 진보적 녹색 의제에서도 나올 수 없다.

 

세계경제의 합리적 계획화를 통해서, 즉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경제적 관계의 영역에 이성을 도입함으로써현재와 미래를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는 객관적 조건과 물질적 이익 때문에 재앙을 피하는 데 이해관계가 걸린 유일한 계급, 즉 노동자계급의 손에 경제계획의 권한이 쥐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기후정상회의의 코미디와 제국주의 기업들이 내세우는 녹색 자본주의란 약속에 맞서, 완전하게 이성적이고 생태적으로 생산, 분배, 소비를 재조직화기 위한 이행강령의 시행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에너지 부문을 급진적으로 재조직할 필요가 있다. 거대 에너지기업을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통제와 소비자위원회의 감독을 받는 회사들로 바꿔 수용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즉 에너지 부문은 완전하게 재편될 것이며, 주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오직 재생에너지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급격히 전환할 수 있다.

 

동시에 자동차 제조회사뿐만 아니라 모든 교통운송 회사들을 보상 없이 노동자계급의 통제 아래 국유화할 필요가 있다. 모든 수준의 대중교통을 발전시키면서 자동차 생산과 개인 차량을 대폭 줄이기 위해서 그렇다.

 

이런 산업들을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관리 아래 국유화하는 것은, 진정한 지속가능한 종합 계획을 수립한다는 목표 아래 모든 전략적 경제 부문을 국유화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른 필수적 조치들과 이 강령은 자본주의 틀 내에서는 성취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에겐 재앙에 책임이 있는 자들과 단호하게 맞서는 혁명전략이 필요하다. ‘기후정의투쟁을 위해 거리로 나선 전 세계 젊은이들은 이제 위기의 진정한 대안을 향한 유일한 길로 나아가기 위해 그들의 강령을 급진화시켜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세계경제의 지렛대를 노동자계급의 손에 거머쥐게 할 계급투쟁의 강화가 바로 그것이다.

 

동시에 노동자계급은 이런 요구들을 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투쟁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든 문명 위기에 대한 진보적 해결책을 찾는 투쟁의 요구로 만듦으로써, 이 투쟁에서 헤게모니를 쥔 주체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자연적 물질대사를 회복하고 사회적 생산을 재편할 수 있는 연대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 전제조건이다. 자원의 고갈 없이 자연의 순환주기를 존중하고, 빈곤과 사회 불평등을 끝장내면서 말이다. 오직 사회주의 체제만이 이런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환경재앙이 어렴풋이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질문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1차 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 대학살의 전야에 위대한 폴란드 혁명가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계급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또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함께 붕괴해 공멸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에서 사회주의는 인류에게 미리 정해진 결과가 아니었다. 유일하게 불가피한시나리오는 노동자계급이 이를 막지 못했을 때 자본주의가 도달하게 될 붕괴와 이 과정에 수반하는 재앙이었다.

 

우리 세기의 쇠퇴하고 부패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과 세계 인민에게 전쟁과 빈곤의 야만성 외에 지구의 파멸 가능성까지 안겨주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 환경재앙을 피하기 위한 진정한 생태적 과제는 필수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이어야 하고, 따라서 노동자계급에 의해 주도되고 혁명적 투쟁으로 실행돼야 한다.

 

기사 원문 링크

Diego Lotito, “Climate Catastrophe and Socialist Strategy”

페이스북 페이지 노동해방투쟁연대

텔레그램 채널 가자! 노동해방 또는 t.me/nht2018

유튜브 채널 노해투

이메일 nohaetu@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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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22/06/25 2,020
현장
강진관 22/06/21 1,586
국제
옮긴이 양준석 22/06/19 6,469
5583feb34f61ceb07c94bc70c5c91334_1655096006_9876.png 사회
양동민 22/06/13 6,159
국제
옮긴이 양준석 22/06/11 3,236
7d01e22e1f579ed6dc68a27e156ffd53_1654899601_1257.jpg 사회
김요한 22/06/11 1,697
현장
강진관 22/06/09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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