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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갑질’이라는 돌림병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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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462회 2018-04-2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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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조현민 전무의 물벼락 갑질사건 여파가 일파만파다. 방송에 출연한 평론가들은 꽤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분노조절장애 여부를 걱정해 주기도 한다. 질병이 있다면 치료를 받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한 개인의 질병이 이토록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다니 이상한 일 아닌가. 게다가 한 개인만 그런 게 아니다. 그의 가족이 줄줄이 유사한, 또는 더 심한 증상을 보인다.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뿐만 아니라 스타트업 기업 셀레브의 임상훈 대표, CJ파워캐스트 이재환 대표 등의 갑질도 동시간대에 폭로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고용승계와 보상을 요구하던 화물 노동자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맷값이라며 돈을 내던진 최철원(당시 M&M 대표) 같은 자도 떠올릴 수 있다. 이런 갑질 사례가 자본가들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사회집단 내에 돌림병처럼 나돌고 있다.

 

빗나간 진단

 

일각에선 이 돌림병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모종의 구조적인 문제로 시각을 확장하려 한다. 개인적 일탈이나 부도덕의 소치로 돌리는 편협한 시각(또는 조현민과 그의 언니와 어머니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에 착목하는 불쌍한 시각)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여기서 등장하는 구조적인 문제, 이를테면 재벌 세습체제나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 같은 것들이다.

 

이런 진단이 끌어내는 결론도 정해져 있다. 재벌 세습체제에 기생해서 한자리 해먹는 조현민 같은 자들을 죄다 쫓아내고 전문경영인을 앉혀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유시민이 역설한 주장이 그렇다.) 그리고 계열사 간 불공정거래를 단죄하고 공정거래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현민이 노동자들에게 행패를 부린 건 아무것도 아니고 한진그룹 총수일가의 일감 몰아주기 사건이야말로 진짜 갑질이라고 규정한 경향신문의 관점이 그렇다).

 

그간 재벌 자본가들이 쌓아 온 산더미 같은 악행 때문에, 이 정도의 결론조차도 꽤나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역시 이상하다. 재벌 세습체제 따위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을 GM전문경영인카허 카젬과 배리 엥글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비웃음을 흘리며 부도협박으로 노동자를 농락한 건 더러운 갑질이 아닌가? (아무리 대공장 노조에 불만이 있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게다가 저들에게 물벼락을 맞고, 모욕적인 욕설을 듣고, 뺨을 맞고, 성추행을 당하고, ‘맷값운운하며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던 노동자들에게 기업들 간의 공정거래는 또 무슨 상관인가?

 

자본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공정과 불합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문제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일터에서 매일 같이 겪는 저 모든 부당함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오너들의 돌림병

 

그 뿌리를 찾기 위한 실마리는 사실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 TV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재벌가 오너라는 말이 그것이다. 오너(owner). 소유주라는 뜻이다. 그들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 즉 회사의 건물, 생산설비(대한항공이라면 비행기), 창고, 사무실, 작업도구, 원자재 등에 대해 소유권을 행사한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이러한 노동의 수단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아무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결정권,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배타적 소유구조를 우리는 사적 소유라고 한다.

 

이 사적 소유권이 오너들에게 무소불위의 힘을 안겨준다. 오너라는 이유로 이윤을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잘라낼 수 있는 생살여탈권을 손에 쥐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는 먹고살기 위해 자본가에게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런 사적 소유의 힘 덕분에 저들은 노동자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일을 시키려하고, 가능한 한 더 적게 주려하며, 노동자를 이윤을 창출하는 맷돌에 갈아 넣을 인간재료로 취급할 뿐이다.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노동자는 장부에 적힌 숫자와 다를 바 없다.

 

저 오너들이 노동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건 그 자연스런 결과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갑질이라는 돌림병의 실체이고, 뿌리다. 공짜노동을 쥐어짜내는 착취가 진짜 갑질의 실체라면, 물벼락과 욕설과 손찌검 등은 저 진짜 갑질의 뿌리에서 자라난 추악하고 역겨운 줄기이자 꽃이다.

 

표적

 

그까짓 것, 회사 때려치우면 되는 것 아닌가? 경기가 좋을 때라면 그럴 수 있다. 나에게 모욕감을 안겨 준 사장에게 욕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어디로든 회사를 옮기면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그런 좋은 시절은 돌아올 것 같지 않다. 회복 불능의 장기불황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지금 직장을 때려치우면 갈 데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그래서 해고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생살여탈권을 쥔 자본가는 거인이 되고, 노동자는 난쟁이가 된다.

 

거인은 당연하다는 듯 난쟁이를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갑질을 부리는 것이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냉혹한 계급적 위계질서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보여준다. 즉 자본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아주 정상적인 모습이다. 단지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이 얼마나 강력한가에 따라, 또는 이윤 확대 과정에서 직면한 내외적인 상황에 따라 자본가들의 갑질은 때로는 거친 모습으로, 때로는 부드럽고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살을 어디로 날려야 하는지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공분을 사고 있는 조현민이라는 한 개인을 처벌할지라도, 자본주의라는 질병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또 다른 조현민들과 주기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화살은 자본주의 자체를 겨냥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사적 소유권을 무기로 노동자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치명적인 갑질이며, 또한 다른 모든 갑질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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