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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회사가 사라졌다> - ‘답 없는’ 폐업 앞에 서서 답을 만들어가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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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민 조회 4,545회 2020-12-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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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사라졌다: 폐업, 해고에 맞선 여성 노동>,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지음, 파시클출판사


 

<회사가 사라졌다: 폐업, 해고에 맞선 여성 노동>은 성진, 신영, 레이테크코리아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성진은 자동차 가죽시트를, 신영은 반도체 부품을, 레이테크코리아는 문구류를 만드는 회사였다. 이 회사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최저시급만 주면서 수십 년간 혹독하게 초과착취하고 부려먹었다.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자, 회사는 최후의 수단으로 폐업과 정리해고를 단행한다. 이 책은 답이 없다는 폐업에 맞선 여성 노동자들의 아주 중요한 이야기.

 

집 가까운 일터가 최고라서

 

자본가들은 여성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여성 노동자를 더 가혹하게 착취한다. 남성 노동자들은 사업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쉽게 돈을 더 많이 주거나 편한 다른 사업장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일터는 더 제한적이다.

 

집 가까운 일터가 최고라는 말은 부양자라는 굴레가 어떻게 여성 노동자의 직장선택을 제약하는지 보여준다. 여성 노동자들은 가정에서 양육자로서의 책임도 함께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더 착취 받고 빼앗겨도 꿋꿋이 같은 사업장에 머무르며 일했다. 성진, 신영, 레이테크코리아의 여성 노동자들도 그렇게 일해 왔다. 자본가들은 그런 여성 노동자의 처지를 이용해 최대한으로 착취했다. 최저시급이 오르면 학자금, 성과금, 수당을 깎아서 임금을 동결했다.

 

당신들 노동은 천 원짜리야.” 최저시급이 오르자 레이테크 노동자들에게 사장이 한 말이다. “당신들은 요구할 수 없다.” 근무형태 변경에 대해 신영의 여성 노동자들이 관리자에게 면담을 요구했을 때 들은 말이다.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도 아니고 당신들은 요구할 수 없다는 말은 뭘까. 여성 노동자는 그런 존재로 취급됐다. 아무것도 요구해선 안 되고, 최저시급을 줘도 돈이 아까운 존재 말이다.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자본의 무기, 폐업

 

그런 취급을 받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투쟁하기 시작했다. 사장 입장에선 정말로 눈엣가시다. 처음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회유와 협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쉽게 노조를 깨버릴 수 없다 판단이 들자, 그 다음엔 해고해버렸다.

 

정리해고는 쉽고, 부당해고 판결을 받는 건 오래 걸린다. 어찌어찌 오랜 시간이 흘러 법적으로 부당해고임을 인정받아도, 사장에겐 다른 수단이 남아있었다. 폐업이다. 성진씨에스는 20183월 노동위 중재를 통한 해고철회 이후 바로 다음 달인 4월에 폐업을 통보했다. 신영프레시젼은 20191월 부당해고를 인정받고 해고자 전원이 복직한지 열흘 만에 다시 청산에 따른 해고를 통보했다.

 

폐업을 용인하는 사회

 

폐업을 한다고 사장이 빚더미에 깔려 길거리에 나앉는 일은 없었다. 우리 사회는 편의점이나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영세 자영업자가 망하는 일과 수백 명을 고용하는 중소기업이 문을 닫는 일을 가리지 않고 폐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폐업도 폐업 나름이다. 성진 사장은 그동안 노동자의 상여금과 점심값을 쥐어짠 돈을 챙기고서 쉬이 사업에서 손을 털었다’. 신영은 성가신 노조를 상대하며 공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와 골프장 사업에 투자하는 게 더 많은 이윤을 벌 수 있어서 손쉽게 폐업했다. 레이테크코리아는 시급 천 원 주기도 아까웠던포장부를 없애고 10년 간 포장일을 해오던 직원들을 해고했다.

 

산업의 변화로 더 이상 일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술탈취와 외주화, 업체변경으로 손쉽게 더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으로 대체됐을 뿐이다. 사장들의 이런 선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보장됐다. 기업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는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었지만, 폐업에 대해서 국가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 폐업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뤄지는지, 소유주에게만 유익하고 사회적으로는 해악적인 결과를 내는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폐업의 결과로 노동자들은 수십 년간 일해 온 공장에서 내쫓겼다. 사장은 그 동안 여성 노동자들을 초과착취하며 번 돈을 챙기고 유유히 공장을 떠났다.

 

사장은 그렇게 모은 자본을 가지고 또 다른 돈 되는 투자처를 찾아 나설 것이고, 노동자들은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힘겹게 다시 구직을 해야 한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근속과 숙련은 노동시장에서 쉽게 무시되기에, 여성 노동자들은 더욱 열악한 일자리로 내몰린다. 이 불공평한 풍경 앞에서 국가는 침묵한다.

 

노동조합 만들었다고 폐업

 

정말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폐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감이 충분하고 재정상태가 양호함에도 노동조합을 털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폐업하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값싸게 착취할 수 있었는데, 노동조합이 생기면 더 이상 초과착취가 어려워지니 사업을 접고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렇듯 노조파괴 수단으로 폐업은 역사가 아주 깊다. 오랫동안 폐업과 해고는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는 노동자에 맞서는 자본가의 주요한 수단이었다.

 

민주노조를 만들면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서 자본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채택하는 게 공장 자체를 폐업하는 거예요. 집단적으로 정리해고를 자연스럽게 당하게 되는 거죠.”(김혜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사수투쟁위원회, 157쪽에서 재인용)

 

성진, 신영도 노동조합이 생기자 폐업했다. 레이테크는 노동조합이 생기자 공장을 이전하고, 부서를 없앴다가 결국 정리해고를 했다. 노동조합을 만들면 해고하거나, 폐업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사업을 정리해버리는 것. 그렇게 노동조합에 가입하면 일터를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노동자를 무력화하고 초과착취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투쟁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사업 자체를 정리해버리는 자본의 공격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울산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서진이엔지는 작년부터 노동조합을 결성한 노동자들이 교섭을 요구하자, 올해 8월 업체를 폐업해버렸다. 업체는 사라지고 노동자들도 해고됐다. 현중은 서진이엔지 노동자들이 하던 작업을 외주화와 전환배치로 해결하고 있다. 성진, 신영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일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노동조합을 털어내기 위한 폐업인 것이다.

 

엘지는 지난 11월 말에 용역업체를 교체하고 엘지트윈타워 청소 노동자들에게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청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지 1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엘지트윈타워 청소 노동자들은 지금도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엘지트윈타워 로비에서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60대 이상의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엘지트윈타워 사례는 여성 노동자의 생애 전반을 휘감은 자본의 지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진, 신영, 레이테크처럼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중년 여성 노동자가 가장 많이 재취업하는 일자리 중 하나가 청소 사업장이다. 이 노동자들은 각자의 사업장에서 수십 년 일한 숙련공이지만, 이 사회는 여성 노동자의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비슷한 직군에 근속을 인정받으며 재취업할 기회도 거의 없다. 여성 노동자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순간 더 이상 값싸게 부릴 수 없기 때문이고, 저임금으로 부릴 수 있는 다른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지트윈타워 청소 노동자들은 성진, 신영, 레이테크에서 일해온 여성 노동자들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답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답을 찾아가기

 

성진, 신영, 레이테크, 그리고 엘지트윈타워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여성 노동자가 마주한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준다. ‘반찬값 버는 노동이라는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평생을 초과착취 당하며 살 것이냐, 아니면 노예 같은 삶을 강요하는 자본에 맞서 반기를 들 것이냐.

 

폐업과 해고는 후자를 택한 노동자들에 맞서는 자본의 강력한 무기다. 그 수단이 남아있는 한, 끝까지 투쟁하기를 결심한 노동자들은 결국 폐업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 노동자는 끊임없는 착취의 길을 일평생 걸어가거나, 또는 자본과의 투쟁이라는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 중에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길은 정말 막혀있는 길인가?

 

어딜 가든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가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에 무시당하는 일자리뿐이라면, 싸워서 바꾸는 것 밖에는 답이 없다. 비록 그 투쟁이 답이 없다고 여겨지는 폐업으로 이어지더라도 말이다.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 거야라는 노래가사(지민주, ‘길 그 끝에 서서’)처럼, 답 없는 상태를 마주한 것은 끝이 아니라 그 벽을 뚫기 위한 소중한 시작이다.

 

여성의 생애 전반을 휘감고 있는 자본의 지배를 깨는 길은, 단결을 통해 맞서는 길뿐이다. 이 나라에서 자본이 폐업과 해고라는 무기를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는 이상, 답 없는 상태를 마주하는 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투쟁하는 노동자는 답이 없는 폐업 앞에서 새로운 답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폐업에 맞선 성진, 신영, 레이테크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집단해고에 맞선 엘지트윈타워 청소 노동자들의 투쟁이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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