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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할 때, 비로소 민주노조가 찬란히 솟아오른다!” -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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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석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 울산노동자배움터 조회 6,179회 2018-04-2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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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가 427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연다고 한다. 지난 316일 해고자들의 생계비를 끊어버린 잘못된 결정을, 지회는 스스로 바로잡을 것인가? 울산에서도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 동지들의 올바른 판단을 돕고자,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가 남긴 교훈을 간략히 함께 돌아보려 한다. 


 

해고자를 어떻게 대할 건가: 노조의 운명을 가르는 질문

 

민주노조란 진정 무엇인가? 민주노조는 어떻게 노동자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었는가? 그 핵심에는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하는 문제가 놓여 있었음을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는 웅변한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울산의 주요 노조는 대부분 1987년 대투쟁 속에서 등장했다. 이전까지 공돌이, 공순이라며 천대받던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움켜쥐고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고용안정과 임금인상 같은 경제적 개선도 중요했지만, 노동자로서 삶에 대한 자부심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회사 밖에서도 자랑스럽게 작업복을 입고 다니는 문화가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민주노조가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노동자의 강력한 단결력이었다. 개인으로서는 미약한 존재일 뿐인 노동자가 강고한 대중적 단결을 실현하자 거대한 자본에 맞서는 거인으로 우뚝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단결력을 공고히 세우는 핵심에는 해고자문제가 놓여 있었다.

 

누가 해고자가 됐을까? 자본의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한 노동자들, 다시 말해 가장 앞장서 싸운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을 해고하며 자본은 무엇을 노렸을까? 생계를 박탈해 주저앉히려 했다. 앞서서 싸우다간 생계를 박탈당할 거란 두려움을 다수 노동자대중에게 안기고자 했다. 그러므로 해고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노조의 운명이 갈렸다.

 

자본은 해고자를 멀리 하라고 노조에게 강요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종한 노조는 힘을 잃고 종이호랑이가 됐고, 끝내는 자본의 하수인, 즉 어용노조가 됐다. 이치는 간단했다. 앞장서 싸운 노동자를 노조가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는데, 누가 앞장서 싸우려 했겠는가? 조합원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치열한 전투마다 선봉에 서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치고 나가려는 노동자들 없이, 격렬한 대중투쟁의 후과를 묵묵히 감수하려는 용감한 지도자들 없이, 노조가 어떻게 거대한 자본을 위협할 수 있었겠는가?

 

반대로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할 때 노조는 단결력을 극대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고, 바로 거기서 노동자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은 민주노조가 찬란히 솟아오를 수 있었다. 1987년 대투쟁부터 1995년 민주노총 건설까지 한국 민주노조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었던 현대중공업노조(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아 1996~97 총파업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해 온 현대자동차노조(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이 두 노조는 어떻게 해서 그런 역할을 감당할 정도로 높이 솟아오를 수 있었을까? 그 한복판에는 공히 해고자문제가 놓여 있었다. 바로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함으로써 노조의 대중적 단결력을 극대치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을 통해 강력한 민주노조가 찬란히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중공업: 조합원들의 가슴 속에 흘러넘치던 자부심

 

1987년 대투쟁을 주도한 현대중공업노조는 첫 집행부 전원이 구속, 해고됐다. 이후 노조 수습대책위와 사측이 합의에 이르면서 모든 해고자를 복직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자본은 가장 눈엣가시가 된 2명의 복직을 끝내 이행하지 않았다.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2만 명의 거대 현대중공업노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고, 나아가 전국에서 민주노조운동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기폭제가 된 그 위대한 파업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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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해고된 동료들의 복직을 위해 함께 싸울 줄 아는 자부심을 보여줬다.


198812월 현대중공업노조는 해고자 2명의 원직복직과 상여금 600% 등 단체협약 요구를 갖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파업 7일 만에 위원장이 약간의 임금인상에 직권조인하고 잠적했다. 조합원 대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12천 파업대오가 운동장에 모여 사흘간 치열하게 토론하고 표결한 끝에 비상수습대책위원회를 세워내고 파업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조합원 대중은 자본의 농간을 단호히 분쇄하고 해고자 원직복직과 단체협약 쟁취를 위해 계속 전진하기를 강렬히 원했다.

 

현대중공업노조는 원직복직, 단협쟁취구호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파업을 이어나갔다. 경비대 수백 명이 사시미 식칼, 자전거 체인,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파업대오를 난자했던 그 악명 높은 식칼테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파업대오는 오히려 더 강고해져 갔다. 결국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노태우 정권이 육해공 15천의 전투경찰을 투입했다. 조합원들은 공장에서 밀려났지만 가두투쟁을 이어나갔고, 노동자가족인 동구 주민 대다수가 이에 합세했다. 조합원들 스스로 1980년 해방광주를 재현했다고 느꼈던 그 2주간의 가두투쟁으로 1,115명이 연행됐다.

 

결국 힘에 밀린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투쟁 지도부 55명이 구속되고 해고됐다. 해고자 2명을 복직시키려고 시작한 싸움인데, 되레 55명이 추가로 해고됐다. 그러나 현장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의 가슴 속엔 패배감보다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비록 해고자 2명은 복직시키지 못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해고당한 동료의 복직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울 태세가 돼 있는 자신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구나. 12천 파업대오가 이토록 서로를 당당하게 지켜낸다면, 당장의 승패를 떠나 장차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지도부를 잃은 상태였지만, 조합원 대중은 기가 죽지 않았다. 파업을 거치는 동안 탄생한 다양한 현장모임을 토대로 수백 명의 선진 노동자가 기층 활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파업대오가 갖고 있던 단결력은, 현장복귀 이후에도 기층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강고하게 유지됐다. 파업 기간 조반장을 통한 자본의 말단 관리체계는 완전히 붕괴했고, 현장복귀 이후에도 형식만 복구됐을 뿐 도무지 권위가 먹히지 않아 실제로는 작동불능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자본은 조합원 대중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습 지도부와 단체협약을 타결하면서, 자본은 파업에 참가한 일수를 기준으로 128일 파업 기간의 임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해야만 했다. 처절한 패배 속에서도 당당히 쟁취한 값진 승리였다.

 

현대중공업노조는 더욱 거침없이 전진했다. 1990년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결집체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됐다. 자본가들은 전노협만큼은 용인할 수 없다며 들끓었고, 노태우 정권은 이에 힘입어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의 약점을 해결한 뒤, 전노협을 와해시키기 위해 전면적인 탄압을 퍼부었다. 전노협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그 때, 현대중공업노조가 다시 대반격의 위대한 신호탄이 돼 일어섰다. ‘골리앗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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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골리앗파업


또 다시 파업을 진압하러 온 육해공 전투경찰 15천 병력에 맞서, 현대중공업노조는 헬기로도 접근할 수 없는 82m 고공 골리앗크레인을 점거하고 노동해방의 핏빛 깃발을 하늘 높이 휘날렸다. 현대중공업노조의 골리앗파업은 이를 진압하러 가는 전투경찰에 맞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4.28 연대파업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51~4일 전노협 12만 조합원이 동참한 전노협 사수 전국총파업으로 이어졌다. 이제 정권이 물리적 탄압을 퍼붓는다 해도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결집체가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수준까지 노동자가 올라섰음을 만천하에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게 전노협이 지켜졌고, 그 연장선에서 1995년 민주노총도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 민주노총이 비록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80만 조합원의 민주노총이 버티고 있다는 전제 위에서 우리가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선배 노동자들의 고난에 비한다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우리 모두는 초창기 민주노조운동의 폭발적 성장을 선도하며 전노협을 앞장서 지켜냈던 그 시절 현대중공업노조에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현대중공업노조가 그렇게 높이 솟아오를 수 있었던 출발점은, 우리가 방금 살펴본 것처럼 바로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함으로써 대중적 단결력을 극대화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현대자동차: 목숨으로 지켜 낸 내 사랑 민주노조

 

1987년 대투쟁 이후 현대중공업노조가 민주노조운동을 선봉에서 이끌 때, 현대자동차노조는 민주노조를 확립하지 못한 채 집행부 성향에 따라 어용과 민주를 오가는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19932년간의 민주 집행부를 뒤로 하고 다시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다.

 

현대자동차 자본은 사상 최고치의 임금인상률로 어용 집행부의 입지를 세워주는 대신 현장의 노동강도를 살인적으로 끌어올렸다. 저항하는 노동자에겐 해고와 손해배상의 칼날을 무참히 휘둘렀다. 어용 집행부는 노사협조주의와 실리주의를 부르짖으며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 김영삼 정권은 구속과 수배로 민주 활동가들을 탄압했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깊은 어둠 속에 휘감겨 있었다.

 

그런데 그 어둠을 뚫고 누구보다 앞장서 용감하게 싸운 노동자가 있었다. 2공장 대의원 양봉수였다. 그는 19952월 의장2부에서 신차 마르샤 투입 시 적용할 UPH(시간당 생산대수) 문제로 사측과 협상하던 중 사측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하자 이에 항의하며 라인을 중단시켰다가 두 번째로 해고됐다.

 

해고자 양봉수는 해고철회를 요구하며 21일 동안 공장 안에서 철야농성을 벌였다. 329일 아침 그가 대의원으로서 마르샤 맨아워(단위시간당 작업량) 협상장에 들어가자, 경비 20여 명이 들이닥쳐 집단폭행을 하며 정문 밖으로 끌고 가 내던져 버렸다. 경비들이 노사 협상장에서 벌인 거친 폭력은 해고자를 노조에서마저 몰아내려는 자본의 완강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노조 집행부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우리 회사에 부당해고자는 없다. 다만 사규를 위반한 면직자만 있을 뿐이다.” 어용 집행부는 사측의 충실한 하수인답게 해고자를 노조에서 배제하는 데 적극 동참했다.

 

512일 오후 440분 현대자동차 정문 앞. 해고자 5명이 공동소위원연합회 출범식에 참석하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20여 명의 경비들이 4~5명씩 조를 이뤄 해고자를 한 명씩 붙들고 문 밖으로 밀어내며 강력히 저지했다.

 

445분 양봉수가 스스로 기름을 온몸에 끼얹었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 “오늘도 내 몸에 손댄다면 불을 붙이겠다!” 그러나 여전히 4~5명의 경비들이 양봉수를 붙잡고 막았다. 양봉수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치며 경비를 밀고 회사 안으로 3~4미터 들어갔다. 경비 1명이 양봉수의 등 뒤에서 허리를 껴안고 다른 3명이 달라붙어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격분한 양봉수는 손에 쥔 라이터 불을 댕겼다. 순식간에 양봉수의 온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양봉수는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몇 발짝 움직였지만 결국 앞으로 쓰러졌다. 옆에서 달려든 동지들이 윗도리를 벗어 뒤덮고 공동소위원연합회 깃발로 감쌌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경비실에 있던 분말 소화기로 겨우 불을 끄고 구급차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조치를 거쳐 화상병동이 있는 대구 동산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전신 75% 3도 화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613일 끝내 운명했다. 죽음을 넘나드는 병상에서 양봉수는 나는 노동조합을 사랑합니다”, “3만 조합원을 사랑합니다하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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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열사투쟁


해고자 양봉수의 절규는 깊은 어둠에 짓눌려 있던 3만 조합원을 마침내 움직였다. 1993년 노사협조주의 어용 집행부 등장 이후 끝없이 위축돼 있던 현장이 양봉수의 분신투쟁을 계기로 거세게 타올랐다. 노조 집행부가 사측과 한목소리로 양봉수를 비난했지만, 아래로부터 시작된 현장의 자발적인 파업이 하루 만에 공장 전체를 멈춰 세웠다. “양봉수를 살려내라며 현대자동차를 완전히 멈춰 세운 이 비공인 전면파업은 1만의 전투경찰이 투입되기까지 나흘 동안 계속됐다.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파업에 뛰어들었을까? 해고자 양봉수가 자신의 목숨까지 던져가면서 투쟁하는데 지켜주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었다. 간악한 자본과 어용 집행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이 파업은 현대자동차에서 민주노조의 새로운 출발점을 만들어 냈다. 해고자 양봉수가 자기 목숨과 맞바꿀 만큼 사랑한 그 민주노조가 조합원 대중의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이제라도 해고자 양봉수를 지켜내고 함께 하기 위한 투쟁에 당당히 떨쳐 일어선 서로를 확인하며, 조합원 대중의 가슴마다 민주노조의 뜨거운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 파업을 거치고 현대자동차노조는 크게 달라졌다. 강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19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 민주노총 총파업의 주역으로 당당히 떠올랐다. 그리고 이후 오늘날까지 20여 년 동안 민주노총을 주도해 왔다. 그동안 현대자동차노조 조합원의 삶은 귀족 노동자소리를 들을 만큼 눈에 띄게 변했다.

 

물론 오늘날 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조합주의, 부문주의 한계를 상징하고 있고, 이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지금의 삶을 지키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현대차지부는 비정규직, 중소영세 노동자를 비롯한 전체 노동자계급과 함께 강고한 단결투쟁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다만 현대자동차노조가 지금까지 많은 것을 성취하고 또한 앞으로의 전진을 꿈꿀 수 있을 정도로 발돋움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노조가 그만큼 높이 솟아오를 수 있었던 출발점은 역시 늦게나마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하는 정신을 바로 세움으로써 대중적 단결력을 극대화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쓰라린 기억: 민주노조 박살내는 해고자 청산시도

 

울산에서도 가슴 벅찬 전진만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02년 현대중공업노조에 마침내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을 때 벌어진 사건은 너무나 참혹했다.

 

현대중공업 자본은 10여 년 치밀한 노무관리와 노조무력화 전략을 펼쳐 아래로부터 민주노조를 고사시켜 나갔다. 대의원 절대다수가 어용으로 넘어간 뒤에도 5년여를 버티던 민주 집행부가 마침내 2002년 선물비리라는 충격적 과오와 함께 붕괴했다.

 

그런데 2002년 어용 집행부가 들어서자마자 한 일이 바로 해고자 청산이었다. 어용 집행부는 해고자 13명 가운데 4명은 복직시키고 나머지 9명에 대해서는 1~3년치 위로금을 지급하고 노동조합과 관계를 명예롭게 청산 조치한다고 사측과 합의했다. 그러고는 이 해고자 정리안을 마치 해고자와 합의한 것인 양 속이고서 조합원 총투표에 기습 상정해 통과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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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용 집행부의 해고자 청산은 민주노조가 사망했다는 절망감을 현장에 퍼뜨렸다.


해고자의 불성실, 생계비 지급 부담의 과도함 등 여러 핑계를 갖다 붙였지만, 진짜 이유는 조합원 대중 스스로 해고자를 버리게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해고돼도 노조가 지켜주지 않는다는 절망감, 마침내 민주노조가 사망했다는 절망감을 조합원 대중이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은 말 그대로 절망의 공장이 돼 버렸다. 해마다 10여 명의 노동자가 이런 저런 사고로 목숨을 잃어야 했고, 그럼에도 대다수 조합원은 일하다 다쳐도 산재신청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억압과 통제 아래 살아야 했다.

 

2013년 극심한 현장통제와 거듭되는 임금동결에 분노한 조합원 대중이 현대중공업에서 민주 집행부를 다시 등장시켰다. 그러나 민주 집행부는, 2002년의 청산을 거부하고 10년 넘게 버텨온 해고자 4명의 원상회복을 추진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런 어정쩡한 태도로는 진정한 민주노조를 재건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5~17년 현대중공업 자본이 정규직 7천 명과 사내하청 25천 명을 몰아내는 어마어마한 구조조정에 나섰을 때, 현대중공업노조는 투쟁다운 투쟁 한 번 제대로 조직해 볼 수 없었다. 잠깐 활력이 흐르던 현장은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지금 2016~17년 임단협에서 자본이 요구한 개악안을 대거 들어주고서도 또 다시 2,400명 희망퇴직 공세 앞에 직면해 있다.

 

지금껏 살펴본 것처럼, 울산 노동운동의 역사는 서로 다른 여러 상황을 마주하면서도 하나의 중대한 진실을 웅변해 왔다. “해고자를 지켜내고 해고자와 함께 할 때, 비로소 민주노조가 찬란히 솟아오른다!”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 동지들 또한 이 소중한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으로 강고한 민주노조 건설의 길을 열어 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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