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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종차별’은 우리 자신의 문제 - 샘 오취리 논란이 보여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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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조회 5,195회 2020-08-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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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페이스 논란

 

의정부고는 특유의 패러디 졸업사진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얼마 전 일부 학생들이 가나의 장례식을 패러디한 관짝소년단을 연출하면서 블랙페이스를 했던 사건이 있었다. 본래 블랙페이스는 과거 미국에서 백인 배우들이 우스꽝스럽게 흑인 흉내를 낸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오늘날에는 인종차별 행위로 금기시되고 있다.

 

이에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하는 샘 오취리는 자신의 SNS문화를 따라하는 건 알겠는데 굳이 얼굴 색칠까지 해야 하나라며, “흑인들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고 정당한 항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한국 네티즌 대다수의 반응은 놀라울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어디서 가르치려 드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한국에서 돈 쉽게 버니 우습게 보이나등의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샘 오취리가 어느 방송에서 눈을 찢는 모습을 보인 것(샘 오취리는 스페인의 못 생긴 얼굴 대회 이야기를 하면서 최대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려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을 찾아내서는, 샘 오취리 역시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 행위를 하지 않았냐며 도리어 성을 냈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만약 샘 오취리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그리고 샘 오취리의 국적이 저개발국 가나가 아니었다면, 한국 네티즌들이 과연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 의문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다른 흑인들이 블랙페이스를 비판하며 우리가 비하 의도 없이 욱일기가 그려진 옷을 입었으면 한국인들도 화를 냈을 것이라고 항변하자, “어디서 감히 못사는 흑인들 주제에 욱일기 얘기를 꺼내느냐는 수준 낮은 공격이 이어졌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 특히 못사는흑인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심리가 날것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미국 흑인들의 인종차별 항의시위를 자신들과 거리가 먼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 생각했지만, 정작 한국 역시 인종차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 한국사회의 인종주의는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주 오래된 차별

 

2018년 고용노동부는 이주 노동자를 고용한 504개 사업장에 대해 노동관계법령 준수 여부를 점검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전체 사업장의 88.3%에 해당하는 곳에서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 위반, 성희롱·성폭력 등이 적발됐다. 직장 선택의 자유마저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를 필두로, 한국사회 이주 노동자의 대부분은 기초적인 노동권마저 보장받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이토록 열악한 처우에 신음하는 이주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주 노동자에 대한 반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장면을 더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언어적 조롱, 언어폭력, 성희롱 및 성추행은 자본가들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동료 한국인 노동자들 역시 차별의 가해자들이다. 이런 차별은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인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다는 그럴듯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심지어는 민주노조 진영 내에서도 이주 노동자에 대한 차별 사건이 벌어진다. 건설노조의 일부 단위에서는 공공연하게 외국인 불법고용 근절을 내세우며 이주 노동자를 고용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더 큰 힘을 만들기 위해 국적을 뛰어넘어 단결할 것을 호소하는 대신, 당장 이주 노동자 고용을 막아 내국인의 노동조건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협소한 조합주의적 이해에 갇힌 노동자운동은 사회 진보에 역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생생한 실례다.

 

차별을 끝장낼 유일한 방법,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

 

자본주의는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들이 자본가계급의 지배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노동자들 사이에 차별과 분할의 논리를 확대하고 강화한다. 여성, 인종, 출신 국적, 성적 지향 등 무엇이든 노동자의 단결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자본가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거꾸로 우리는 자본가들의 차별과 분할의 논리에 맞서, 모든 노동자의 동등한 권리와 연대를 주장해야 한다. 최근 국회에서는 성별, 장애 유무, 나이, 출신 국가, 성적 지향, 학력 등을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아선 안 된다는 내용으로 차별금지법이 발의됐다. 모든 종류의 차별 금지는 노동자운동의 거대한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데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노동자운동 역시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자기 역량을 유감없이 투여해야 하는 이유다.

 

나아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진실이 있다. 일상적 시기에는 노동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차별과 분할의 논리, 즉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견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의 의식은 절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이 실질적으로 강화될 때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차별의 논리를 스스로 깨부수는 모습을 역사 속에서 분명히 드러내곤 했다.

 

자본에 맞서 투쟁할 때면,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차별과 분할 대신 폭넓은 단결이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임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갖가지 차별과 분할의 논리는 노동자의 거대한 역량을 옭아맨 자본의 굴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의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바로 이런 뜻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단지 지배계급이 달리 전복될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복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모든 낡은 찌꺼기를 목구멍으로부터 씻어버리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역량을 갖추게 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이를 실제로 증명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맞선 영웅적 투쟁을 벌일 때, 그들이 예전에 가졌던 반동적인 차별의 논리는 단숨에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거대한 노동자투쟁이야말로 갖가지 사회적 차별을 끝장낼 실질적인 수단이다. 크룹스카야가 쓴 <레닌을 회상하며>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맺는다.


논쟁은 무척 흥미로웠다. 예를 들자면, 조항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바느질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한 볼셰비키 청년이 이렇게 지적했다. “무엇 때문에 모두 바느질을 배워야 하는 건가요? 여자아이라면 물론 배워야지요. 안 그러면 나중에 남편의 바지 단추를 달아 주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모두 다 배워야 하는 이유는 뭐지요?!” 이 말은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여자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항변했다. “바지 단추는 아내가 달아야만 하나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지요? 케케묵은 여성 노예제를 유지하고 싶은 건가요? 아내는 남편의 동지이지 하녀가 아니란 말이에요?” 여성만 바느질을 배우면 된다는 제안을 했던 당사자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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