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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 컨츄리> - 침묵하지 않을 때 변화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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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자서울성모병원 노동자 조회 590회 2020-08-23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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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리즈 테론 주연의 2005년도 영화 <노스 컨츄리>



<노스 컨츄리>는 실화를 다룬 영화다. 남성이 절대다수인 탄광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성폭력. 주인공은 이에 맞서 소송을 벌인다. 1984년 미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소송 사건. 원작소설은 <집단소송: 성희롱 법을 바꾼 로이스 젠슨과 랜드마크 사건>이다.

 

사생아를 기르는 싱글맘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아버지가 다니는 탄광에 취업한다. “네가 광산에 취직하면 아버지 체면에 먹칠이야.” 입사 전에 여자는 임신여부를 꼭 검사받아야 한다. 입사 첫날 첫 만남에서 들은 말, “의사 말로 아랫도리가 그렇게 쓸 만하다며?” 이 정도에 발끈하면 안 된다. “유머감각 좀 가져!”

 

아버지 체면에 먹칠하는 여자

 

동료 남성 노동자들의 언어폭력은 시도 때도 없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날아든다. 도시락에 남자성기 모형이 들어있고 간이화장실을 설치해달라는 요구에 그럼 여자들은 뭘 해 줄 거냐?’고 비아냥댄다. 담장과 크레인엔 실명이 들어간 입에 담기도 힘든 음담패설 낙서가 즐비하다. 담배 빌린다며 여성의 가슴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무르고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가지자는 농담을 건넨다. 실제 현장에서 강간을 당할 뻔한다.

 

문제제기를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관리자들의 대답. “가뜩이나 일자리 적은데 여자들이 끼어든 거야. 남자들이 속 편하겠어?” “여자가 여긴 왜 온 거야? 알 만한 처지에 왜 이래? 입 닥치고 열심히 일해. 남자 못잖게.”

동료 여성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냥 무시해라. 그래야 남자들이 나가떨어진다.” “해고 빌미 제공하지 마라.” “남자들은 원래 늑대다. 아담과 이브 시절부터 남녀지간은 원래 그렇다.”

 

아버지는 한 술 더 뜬다. “헤퍼서 이혼이나 당한 주제에. 남의 남편에게 함부로 꼬리를 쳐?” 아들마저 엄마 편이 아니다. “다들 엄마 보고 창녀래.”

 

사장에게 직접 항의하러 가자, 아주 친절한 말투로 당장 사표 처리해 주겠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주인공은 소송을 하기에 이른다. 여성 동료들은 말린다. “남자들이 동료를 배반했다고 할 걸?” “네가 입 닥치지 않는 한 점점 더 몹쓸 짓 할 걸.” “이래봐야 우리만 손해야.” “다수여야 안전하지. 떼를 지어 다니면 공격하기 어렵지만 흩어진다면 잡아먹히는 법이라 설득하지만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는다. 노조에서조차 외면한다. 결국 주인공 혼자 고소장을 제출한다.

 

하지만 이 성희롱은 탄광 여자들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다. ‘마을 전체가 만들어낸 사태. 판사는 세 명의 원고를 출석시키면 단체소송 자격을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싸움은 서서히 공기를 바꾼다. 딸을 비난하는 아버지에게 이제 더 이상 엄마는 침묵할 수 없다. “빨래 한 번 할 때마다 나도 돈 받아야겠네.” 조합원 모임에서 동료들이 대놓고 딸을 희롱하자 마침내 아버지가 나선다. “여기 모인 사람 중 수치스럽지 않은 광부는 내 딸 한 사람뿐이요.”

 

결국 재판에서 주인공 편에 서겠다며, 여성 노동자만이 아니라 양심 있는 남성 노동자들도 하나 둘 기립하기 시작한다.

 

기준선이 지워질 때

 

이쯤에서 영화 말고 다른 얘기를 좀 해 보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문으로 자결했을 당시, 시청사 앞 분향소 설치와 조문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많았다. 그가 저지른 성폭행을 뒤로 제쳐두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치적을 칭송하는 부르주아 언론과 지지자들의 분위기도 상당했다. 피해자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사과 한마디 없이 사라진 그의 책임을 묻고 분노하는 대신 순수하게 죽음을 슬퍼하고 좋은 시절의 그를 추억하기란 쉽지 않은 일임에도.

 

이는 단지 평소 박원순의 추종자, 지지자, 자본가들만의 일이 아니다. 노동자 가운데서도, 자본의 편에 서 있는 박원순의 행태에 분노하며 투쟁했을 사람들 중에도 그를 두둔하거나 애도하는 이가 있었다.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의 책임회피를 위한 자결에 순수한 애도’, ‘인간적 도리를 들먹이는 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그 당사자가 서울시장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손에 넣은 뒤 어느 계급의 편에 서 있었는지 분간하지 못한 채 노동자들이, 선진 노동자가 이에 대한 명확한 비판의식과 계급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채 휘둘려서야!

 

<노스 컨츄리>를 보면서, 같은 노동자인데 어떻게 남성 노동자들이 저렇게나 노골적이고 폭력적으로 여성 노동자를 대할까 처음엔 경악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자. 박원순 같은 이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노동자, 같은 동료인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남성 노동자. 얼핏 이해 안 되고 놀랍기까지 한 비이성적인 행동은 어쩌면 매우 닮아있다.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가라는 기준선을 제대로 그어놓지 못했을 때, 한편으로는 인간이나 국민으로서같은 허구적인 장막에 시야가 가려진 채 계급분단선을 넘나들게 되고, 한편으로는 여성 노동자를 같은 계급 동료로 여기는 대신 괄시와 농락의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우월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 둘은 양상은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

 

자본가들이 그들의 권력과 정치와 문화와 교육 등으로 이 사회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흠뻑 물들어있다. 노동자라고 해서 저절로 계급의식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모두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도 없다. 활동가라고, 선진 노동자라고 해도 아직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경쟁과 차별의식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한 경우도 많다.

 

결국 정치의 문제다. 노동운동이, 노동자계급이 자기만의 독립적인 노동자정치를 올바로 세우고 확고히 하지 못하는 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일상에서 밀려드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공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노조 교육에서만, 집회에 참가해 구호를 외칠 때에만 단결투쟁을 외칠 뿐 돌아서면 성차별, 남성우월주의 의식에 오염되는 구태를 되풀이하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우리 노동자 뼛속 깊숙이 심어놓은 경쟁, 차별, 성폭력 같은 자본주의 정치의 때를 벗어버리고 단결투쟁의 정신, 노동자계급의 정치, 노동해방의 신념으로 선진 노동자들부터, 나아가 민주노조운동 전체가 스스로를 쇄신하고 변해야 한다. 그런 변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영화 <노스 컨츄리>를 보면서 그 변화의 가능성을 함께 탐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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