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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 사망 80주년: 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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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161회 2020-08-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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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트로츠키의 유언 중에서)

 

 

트로츠키라는 이름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이다. 그나마 널리 알려진 게 있다면,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트로츠키의 유언에서 착안한 제목이라는 사실 정도다. 레닌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데에서 탁월한 역할을 했던 트로츠키는 1940227일 망명지 멕시코에서 유언장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그로부터 반 년 뒤, 그는 스탈린이 보낸 자객 라몬 메르카데르에게 등산용 피켈로 머리를 찍혀 목숨을 잃었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해외로 추방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결국엔 암살자를 사주해 그를 살해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라몬 메르카데르는 20년간 복역한 뒤 풀려나 소련에서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받았다. 스탈린은 이미 죽고 난 뒤였다.

 

보수파 학자들은 스탈린의 트로츠키 암살에 대해, 권력을 둘러싼 정적들 간의 암투 정도로 취급하곤 한다. 그런 거라면 80년 전에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우리가 굳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스탈린은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했던 것일까? 트로츠키라는 인물은 무엇을 대표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할까?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관료집단의 성장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날 무렵, 역사에 뛰어들었던 혁명가들 중 러시아가 단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같은 주요 도시에선 비약적으로 산업이 발전하고 그만큼 빠르게 노동자계급이 등장했지만, 그보다 더 광범한 영토가 후진적인 농업경제에 머문 채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이 약점을 넘어서려면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필수적이었다. 인접한 독일 같은 나라는 이미 강력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고, 제국주의 전쟁을 매개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의 성공 여부는 곧 독일을 비롯한 세계혁명의 성공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안타깝게도 러시아와 함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 나라들에서 조성된 위기와 투쟁은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권력을 잃은 반동세력은 내전을 일으켜 노동자국가를 무너뜨리려 했다. 신생 노동자국가는 고립된 채 처절하게 저항했고, 내전을 일으킨 반동세력을 가까스로 패퇴시켰다.

 

하지만 전쟁은 가장 헌신적이고 투철한 선진 노동자들의 생명을 대거 앗아갔다. 옛 러시아에서 관리, 엔지니어, 장교 등의 지위를 누리던 자들이 당과 노동자국가의 주요한 위치를 야금야금 채워나갔다. 고난에 찬 시기를 이겨내며 혁명적 투쟁의 정신을 지켜왔던 사람들 대신 피로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또 다른 격변보다는 현상 유지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당과 소비에트 정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비대한 관료집단으로 똬리를 틀게 됐다. 스탈린은 이들 관료집단의 퇴행적 정서와 이해관계를 대변하면서 권좌에 오를 수 있었다. 마치 개별 자본가들이 자본의 인격적 표현인 것처럼, 스탈린은 유별난 개인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인격적 표현이었다.

 

사태 전환의 가능성, 그리고 잃어버린 기회

 

그렇다고 모든 기회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1920년대 중후반 중국에선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계급투쟁의 가능성이 성장하고 있었다. 1930년대 초반 독일에선 파시즘의 등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라는 과제를 중심으로 혁명적 경향의 전진 가능성이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프랑스에선 대대적인 공장점거 파업 물결과 함께 준혁명적 정세가 조성됐고, 스페인에선 프랑코 파시스트 세력의 쿠데타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항전이 시작됐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러시아에서 탄생한 노동가국가가 고립을 타개하고 새롭게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중대한 기회였다. 트로츠키는 이 기회가 물거품이 돼선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각각의 사안에 목소리를 냈다. 그 모든 사안을 꿰뚫는 관점의 바탕에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계급적 단결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이 문제는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도 핵심 쟁점이었다.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에게 러시아 혁명의 주도권을 넘겨주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불신했다. 이처럼 전망을 제약하며 스스로 손발을 묶는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이 전진하는 과정에서 도태되는 길을 걸었다. 역사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단결력, 주도력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세력에게 길을 터줬다.

 

스탈린을 지휘자로 세워놓은 관료집단은 이런 역사의 교훈에 등을 돌린 채 좌충우돌했다. 중국에선 공산주의 노동자들이 국민당 휘하로 들어가 독립성을 잃게 만듦으로써 장제스의 쿠데타 앞에 무방비로 학살당하도록 길을 열어줬다. 독일에선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 공동전선을 형성해야 할 시기에 공산당만의 종파적 독자 행보를 고수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분열을 해소하지 못했고, 이는 히틀러가 승승장구하는 디딤돌이 됐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선 다시 인민전선이란 이름 아래 노동자의 독립성을 마비시키며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의 동맹에 종속시켰다. 심지어 스페인에선 스탈린이 지원군으로 보낸 군대가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군사력으로 위협하며 무장해제시키기까지 했다. 결국 프랑스는 독일 나치 군대에 점령당했고, 스페인에선 프랑코 세력이 승리하면서 또 다른 대량학살과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반동적 전망과 혁명적 전망의 대결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추방되기 전, 아직 당 중앙위원회에서 발언할 수 있었을 때, 그는 스탈린을 향해 러시아 혁명의 무덤을 파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는 러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나라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스탈린에게 트로츠키란 그런 자신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규탄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비판하는 개인적 사건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단결을 일궈내 혁명으로 가는 길을 성공적으로 열어젖힐 것인가, 아니면 바로 그 독립성과 단결을 훼손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자본가 세력의 정치적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 그럼으로써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할 것인가라는 전망을 둘러싼 목숨을 건 대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츠키의 죽음 역시 결코 개인적인 비극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스탈린이 단지 포악한 성격을 지닌 한 개인이 아니라 반동적으로 퇴행하는 관료집단의 징표였던 것처럼, 트로츠키는 일국 사회주의라는 간판 아래 벌어진 러시아에서의 관료적 반혁명에 맞서 세계혁명의 정신을 지키고, 그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조차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 한 혁명가의 표상이었다. 그 밑바탕에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치적 독립성을 향한 투철한 헌신이 깔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기억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한국에서 트로츠키란 이름은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조차 여전히 생소하다. 80년 전 그의 죽음을 상기하는 건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 한 번쯤은 우리 노동자운동의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자.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심지어는 이른바 진보정당으로 조직된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들 자신의 단결된 투쟁의 힘보다는 문재인 정부와의 대화와 합의가 더 현실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기승을 부리지는 않는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보다는 개혁적인 체하는 일부 자유주의 자본가 세력과의 동맹에서 해결책을 찾으려는 자들이 주위를 서성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 관료집단들이 지도부를 자처하며 노동자운동의 방향타를 이리저리 꺾어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런 관점이 노동자운동을 지배했을 때,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손발이 묶이고, 반동세력에게 길을 터주며, 결국 노동자운동의 궤멸로 이어졌다는 것을. 1차 세계대전에서 2차 세계대전으로 나아가던 위기의 시대에 노동자운동의 궤멸이란 곧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며 피의 강물에 잠기는 것을 뜻했다.

 

또다시 우리는 위기의 시대 한복판에 있다. 1940821일 트로츠키의 죽음은 이 위기의 시대에 그런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금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반드시 움켜쥐어야 할 원칙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잊어선 안 될 노동자계급의 기억이 그의 삶과 죽음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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