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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공정성 논리,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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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덕 조회 4,995회 20-08-1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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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우화: 누군가 저 바위를 깨버리자고 외쳤다. 시지프는 안 된다, 너도 공정하게 바위를 밀어 올려라!” 하며 바위 밑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다시 한번 공정성을 한국 사회 가장 중요한 이슈로 끌어올렸다. 숱한 언론이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노조와 청년들의 정규직화 반대 목소리를 실었다. 원론적으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찬성하지만 그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노력에 따른 보상기회의 평등 YES, 결과의 평등 NO’를 외치는 청년들의 주장이 크게 부각됐다.

 

반론도 꽤 있었다. 현장에서 실제로 일해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력은 왜 부정하는가? 시험만이 정규직화의 유일한 잣대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애초에 안정적이고 질 좋은 정규직 일자리가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인데 왜 비정규직 탓을 하는가? 하지만 무수하게 쏟아지는 정규직화 반대 목소리에 밀렸다. 어디서부터 이 공정성 논리를 반박해야 할지, 어떻게 깨뜨려야 할지 막막해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당신은 어디에 선 청년인가요?

 

2년 전 SBS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실험 제목은 당신은 어디에 선 청년인가요?’였다. 각기 다른 21명의 청년이 한 출발선에 섰다. 보증금 마련, 소득공제, 출신 지역, 해외여행, 성추행·성희롱 등을 포함한 56개의 질문에 따라 참가자들은 출발선을 기준으로 한 걸음 앞으로 가기도, 뒤로 물러서기도 했다(현재 최저시급을 받지 못한다면 한 걸음 뒤로, 소득의 절반 정도를 저금할 수 있다면 한 걸음 앞으로 등). 실험이 끝난 후 청년들이 선 위치는 제각각이었다. 한 걸음 더 뒤로 가야 하는데 더이상 물러설 자리마저 없는 청년도 있었다.

 

청년들이 결코 단일한 계급, 계층이 아님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물론 청년 세대를 아우르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의 20대는 IMF 경제위기 전후에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2008년 경제위기를 경험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상승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추락을 직접 경험했다. 예전에도 질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은 치열했지만 지금처럼 가혹한 시대는 없었다. 이 정글 속에서 청년 세대는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익혔다.

 

그런데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정도, 불안과 공포를 이겨나가는 방식은 청년들 사이에서도 똑같지 않다. 출발선이 다르고 교육의 기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 내부에도 계급, 성별, 지역, 문화적 격차와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그에 따라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단일하지 않다. 일용직 형틀 목수로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서원도 씨(32)의 얘기를 들어보자.

 

인국공(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기사를 봐도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이천 물류창고 화재나 23세 성악도의 죽음, 이런 산재 기사가 더 내 일처럼 느껴지지. (너는 왜 노력을 안 하느냐는 어떤 친구의 지적에) 나도 너 같은 엄마 있었으면 오늘 뭐 먹을지 걱정 안 하고, 다음 달 고시원비 어떻게 내나 걱정 안 하고, 공부만 할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럼 달랐을 거라고, 너 정도는 아니라도 대학은 가지 않았겠느냐. 저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 공동체와는 유리돼 있다는 느낌이 커서 그냥 관조하는 게 딱 제게 맞는 포지션 같다.”(“공정과 불공정 사이 부정당한 삶의 노력”, 2020630일자 경향신문)

 

불안정한 삶과 노동에 시달리는 수많은 청년의 목소리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 최근 내가 만난 숙명여대 한 학생은 지방대, 전문대에 다니는 친구들의 경우 인국공 논란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도 취업에 매달리지만 인국공이라는 공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그 극소수의 대부분은 소위 일류대, (in)서울 대학 학생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서울 대학교 학생들은 정규직이고 지방대, 전문대 학생들은 비정규직이라는 비유가 많이 통하기도 한다. 인서울 대학생들의 목소리, 즉 판검사, 경영진, 소수 공기업 등 그나마 중간계급적 지위가 보장되는 약간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되고 있다는 지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기업,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지 못하는 대학생들은 취업준비생취급도 받지 못한다.

 

여기에 대학에도 갈 수 없어 졸업하자마자 생계에 뛰어든 수많은 고졸 노동자의 삶과 그들의 분노를 떠올려보자. 과연 고통을 겪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는 과잉대표되고 있는 청년들의 목소리에 묻히고 있는 게 아닌가?

 

뒤틀린 분노

 

대학생들은 하나의 계급이 아니다. 학생들은 특정 계급에 편입될 수밖에 없으며, 편입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일부 학생들은 자본가의 지위로, 소자본가의 지위로 도약하는 걸 꿈꾼다. 물론 그 밖의 대학생들도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더 나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에 뛰어든다.

 

그러나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취업준비생이라고 다 똑같은 조건에 있는 게 전혀 아니다.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차이, 대학 서열의 차이가 엄연히 있다. 대학 사회는 자본가계급, 중간계급, 노동자계급이라는 사회 전체의 계급 구성과 분화를 반영한다. 자본가계급과 중간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는 학생들이 있다. 부모의 경제력, 좋은 학벌 등 그들이 놓여 있는 물질적 기반이 그들의 정치적 태도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시 반복하자면, 부모의 경제력과 배경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조건에 있는 학생들, 자본주의적 가치관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는 학생들은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더더욱 공정성에 매달린다. 물론 이들만이 시험을 유일한 잣대로 보고 무임승차에 반대한다는 논리를 펴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만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문제 제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특히나 그런 위치에 있고 그런 가치관을 가진 학생들에게서 당장 어떤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들의 정치적 태도는 그들이 편입되는 사회집단, 즉 자본가계급 혹은 중간계급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태도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난망하다. 이들에게 기대를 걸 순 없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을 비롯한 노동자운동은 누구를 주목해야 하는가?

 

알바를 두 탕, 세 탕 뛰면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들, 아니 이미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들어가 초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삶과 노동의 무게 때문에 인국공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겨를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들 대다수 가난한 청년에게 안정적이고 질 좋은 일자리를 지속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 빼고는 다른 선택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순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다수 청년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 청년 실업률을 비롯한 청년들의 삶에 대한 각종 통계를 얘기하지 않더라도 대다수 청년의 고통은 너무나 크다. 이들의 삶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절망이다. 좌절감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그중에서도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청년들이 있다. 이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들은 일용직과 아르바이트, 단기 취업을 반복하며 노골적인 저임금과 착취를 경험한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늘어나지 않는 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에 뼈저린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의 삶은 주목받지 못한다.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 위로 퍼질 기회도 거의 없다.

 

물론 이들의 분노도 왜곡되고 일그러지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학교체계는 오직 입시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사회적 교육, 공동체 교육도 시키지 못할 정도로 교육 제도가 무너져 있다.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곤 거의 전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역시 개인의 능력을 키우는 방법밖에 없다는 자본주의 경쟁 이데올로기뿐이다. 살아남지 못하면,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탈락자라는 낙인을 아로새겨 좌절감을 심어주는 게 대학을 포함한 지금의 교육 제도다.

 

여기에 노동자운동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는 교묘한 장치들이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언론은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빨아가고 비정규직 제도를 강요하는 진정한 주범인 자본가계급의 실체를 감춘다. 그 자리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밀어 넣는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자리 부족의 주범이라는 악선동을 통해, 청년들의 분노가 노동자들과 노동자운동을 겨누도록 유도한다. 청년들의 분노가 왜곡되고 일그러지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다. 더군다나 가난한 청년들의 분노를 집단적 계급투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노동자운동의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최대 희생양

 

정말이지 청년들은 누구보다도 어두운 미래를 걷어치우고 싶어 한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저항에 나설 수 있는 그들의 잠재력은 상당히 크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는 청년들의 저항의식이 온전하게 발휘되고 청년들이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향해 전진하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여 왔다. 스포츠, 섹스, 스크린이라는 소위 3S 정책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최근에는 자본주의 공정성 논리가 많이 활용된다.

 

하지만 희망은 분명히 있다. 가난한 청년들, 아무런 빽도 없고 아무런 자원도 없는 청년들이 한국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면서 사회적 억압과 착취의 최대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구의역 김 군의 죽음, 태안화력 김용균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수많은 청년이 구의역 김 군과 태안화력 김용균의 죽음을 안타까워했고 분노했다. 수많은 청년이 간절히 탈출구를 찾고 있다. 반값등록금 운동, 철도파업 때 번졌던 안녕들하십니까 운동, 촛불항쟁에서 나타난 청년들의 참여만 봐도 그렇다.

 

우리는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 정규직화 반대 목소리에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찬성하지만이라는 전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제멋대로의 해석이 아니다. 비정규직 제도가 얼마나 끔찍한지 이미 청년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다만 과정의 공정함, 결과의 공정함에 대한 청년들의 문제 제기는 결코 쉽게 풀리기 어렵다. 자본이 강요하는 바늘구멍 같은 경쟁을 통과해야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선 끊임없이 경쟁해야만, 자신과 다른 사람의 노력을 비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극소수 청년에게만이 아니라 가난하고 열악한 처지의 청년들을 포함한 청년 세대 전체에게 안정적인 일자리와 삶을 제공할 수 있는 전망을 열어야 한다. 약육강식의 경쟁이 사라져 모두의 노력을 온전하게 인정할 수 있는 사회 체제 건설의 전망 말이다.

 

노동자운동은 청년들의 보수화를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열악한 처지의 청년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자녀이기도 한 그들이 자본가들이 의도한 목적대로 휘둘리지 않도록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 더욱더 과감하게 젊은이들의 다수가 포진해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자운동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실천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 살아가고 있고 노동자계급으로 편입될 수 있는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공정성이란 명분 아래 불평등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이 체제에 맞설 수 있는 힘도 그들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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