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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 감싸고도는 사법부도 공범이다!” - 그렇다면 사법부의 독립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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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조회 233회 2020-07-1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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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칠레에서 시작해 여러 나라로 퍼져나간 퍼포먼스 참가자들은 경찰, 판사, 국가, 너희가 강간범이라고 외쳤는데, 최근 한국에서 손정우에 대해 내려진 판결을 보면 그 구호가 딱 들어맞는다.

 

 

사법부도 공범이다!”

 

76일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법원에 대한 분노가 뜨겁다. 판결을 내린 서울고등법원 강영수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이 수십만 명을 돌파했다. 여성단체를 시작으로 각계각층의 분노한 시민들은 사법부도 공범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했다.

 

손정우는 20157월부터 20183월경까지 웰컴투비디오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3,055개를 올려 범죄수익 4억여 원을 챙긴 범죄자다. 그러나 한국 법원은 1심에서는 손정우가 반성한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2심에서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양가족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고작 징역 16개월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손정우가 운영한 위 사이트에서 어느 미국 남성이 성착취물을 1회 다운로드하고 1회 접속한 혐의로 미국 법원에서 징역 70개월을 선고받은 것과 비교하면, 한국 사법부가 반사회적 성범죄에 대해 얼마나 솜방망이 처벌을 하고 있는지 확연히 드러난다. 국내에서 검거된 웰컴투비디오회원 235명 중 법원 선고까지 이어진 것은 손정우를 포함해 43명뿐이며, 이 중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손정우 하나다.

 

한국 법원의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손정우 사건에서만 드러난 일이 아니다. 최근 대구고법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서 갓갓의 공범인 오프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또 대전지법은 아동·청소년 이용 성착취물을 제작한 A씨의 감형 사유로 외모 콤플렉스로 인한 경솔한 판단운운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안희정 성범죄의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판단했던 1심 판결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법부의 독립도 중요하다?

 

이처럼 성범죄를 사실상 방조·조장하고 있는 한국 법원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완전히 정당하다. 최근 반여성적 판결을 반복하는 판사들에 대한 규탄은 보통 청와대 청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손정우를 풀어준 강영수 판사에 대해 대법관 자격 박탈 청와대 청원이 이뤄진 것처럼 말이다.

 

또 서울중앙지법의 오덕식 판사 역시 n번방 운영진 이모 씨 사건을 맡았다가 다수 국민청원이 제기된 후 재배당을 자청해야만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50여만 명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는 고() 구하라 씨에게 성관계 동영상 유포를 협박해 자살로 몰아간 최종범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 장자연 씨를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직 기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법으로 보장된 법관의 지위를 국민청원으로 흔드는 것은 위험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매우 정당하게도 사법부의 반여성적 판결을 비판하며 민주적 통제를 주장하는 여성학자 권김현영 역시 법관의 독립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나, 그 독립성을 스스로 지키려면 법관은 사회변화를 읽어내고 사회정의에 대한 깨어있는 생각을 유지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즉 사법부의 독립이란 여전히 지켜야 할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주장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는 여론에 따른 마녀사냥을 피하고 재판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취지라고 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법관이 진정 경계해야 할 것은 이른바 떼법이나 국민정서법에 따라 사회적 여론에 휘둘리며 법치의 원칙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부르주아 이론가 몽테스키외가 사법권을 입법권과 행정권에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립된 개념이다. 몽테스키외는 재판권이 입법권과 행정권에서 분리돼 있지 않으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재판권이 입법권과 결합되면 시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권력의 사용이 자의적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신분제와 절대왕정에 맞서 근대적 시민권을 확립해야 했던 시대에는 사법부의 독립이 진보적 가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사법부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법관의 신분은 보장된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재판관, 법관이 법률을 위반한 때에는 국회에서 탄핵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다. 대부분의 법관은 고위직 공무원으로서 각종 혜택을 누린다. 예비 판사로 임용되면 공무원 3, 지법 부장판사는 1, 고법 부장판사는 차관급 예우를 받는다. 사법농단의 장본인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관 정원 확대 대신 상고법원 설치를 고집한 이유가 대법관의 권위 훼손을 우려해서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법관 14명 모두는 장관급 예우를 받으며, 이들의 정년은 만 70세다.

 

정말 법 논리에 의한 판단일까?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지위 보장이 필요하다는 논리의 이면에는, 정해진 법률과 법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은 훈련된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지적 작업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어느 판사는 무책임하고 선동된 여론, 진실을 말하지 않는 언론, 저급한 비방과 협박으로 도배된 SNS 과 같은 민주주의의 적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판사의 직업적 양심에 따른 당당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김태규, <법관이 양심 핑계로 정치적 이념 구현하려고 들면 법치의 종말>). 책임 있는 주장인지 무책임한 주장인지, 진실인지 아닌지, 저급한 것인지 고급한 것인지 모두 판사의 직업적 전문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판사의 직업적 양심이란 과연 사회 다수 대중의 인식 수준과 차별화된, 고도의 법리적 전문성에 따라 형성된 특별한 차원의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964년 당시 18살이던 최말자 씨는 성폭행을 시도하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혐의로 6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당시 법원은 성폭행에 대한 정당방위라는 최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법원은 최 씨에게 처음부터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라고 되묻는 등 심각한 2차 가해를 했다.

 

최말자 씨는 지난 56일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면서 이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로잡고 싶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미투 운동을 보며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현실에 분노하며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최말자 씨가 50년 만에 용기를 낸 과정에서 법관의 법적 전문성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노동자투쟁에 대한 법원의 판단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노동법에서도 노동조합의 단결권, 단체행동권 행사가 법적으로 정당하면 자본가가 민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법적으로 정당한노조 활동인가? 법조문 어디에도 이에 관한 구체적인 규정은 없다. 이때 판례가 툭하면 들이대는 기준이 사회통념 상 합리적인 범위라는 것인데, 이는 번역하면 판사 마음대로 결정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노동자투쟁의 사회통념 상 합리적인 범위는 투쟁의 정당성과 대중의 투지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현재 통용되는 노동 판례 중 그나마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판례들은 1990년대 초 민주노조운동의 전성기에 확립된 것들이다. 즉 악법은 어겨서 깨뜨린다는 원칙 아래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투쟁했던 시기에는, 판사들 역시 강력한 사회적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범죄, 노동자투쟁 등 첨예한 사회적 대립의 문제 앞에서, 사법부의 독립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판사들의 판결을 좌우한 건 전문적 법리가 아니라 다수 대중의 진보적 의식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압력이었다. 역사는 소수 엘리트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움직인다는 분명한 진리가 다시 확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균적인 교양을 갖춘 노동자라면, 일정한 조력만 행해진다면 주어진 문제에 대해 충분히 사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한 사회적 역할을 굳이 직업적 판사만이 독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미 각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다양한 배심원 제도가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현직 판사조차 지적하듯이, 한국의 사법부는 제도적 독립을 너무 강하게 보장해서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나 견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사법부의 독립은 계급 대립을 은폐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전근대적 신분 질서와 투쟁해야 했던 시기에는 사법부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원칙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법부의 독립이란, 자본과 노동의 노골적인 계급 적대를 은폐하는 역할로 기능한다. 예컨대 지난해 톨게이트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파견 대법원 확정판결이 보여준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사법부가 자본가권력의 전횡에 맞서 노동자의 권익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인 것처럼 보일 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실제로 사법부는 대단히 제한된 범위에서, 노동자투쟁을 체제 안에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노동자 권익을 부분적으로 인정할 뿐이다. 하청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보장, 특수고용 노동자의 노조할 권리 인정 등 현재 법 해석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문제에 대해서 법원은 현행법의 한계를 들먹이며 자본가 편을 들기 일쑤다.

 

특히 자본가들의 지배를 위태롭게 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는 입법부(국회), 행정부(정부 부처), 사법부(법원) 모두 조금의 입장 차이도 없다. 레닌은 노동자투쟁이 격렬해지는 경우 아무리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그 헌법에 노동자를 향해 군대를 출동시킬 가능성, 계엄령을 선포할 가능성 등을 부르주아지에게 보장하는 단서와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지 않은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상 시기에는 사법부가 일정 정도 자본가들의 전횡을 제어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법원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법률 대응 정도로 자기 투쟁의 범위를 제한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엥겔스는 부르주아에게 법률은 신성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부르주아는, 설사 어느 개개의 법률이 특별히 자신에게 해가 된다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입법은 자신의 이익을 지켜 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법률의 신성함, 일단 확립된 질서의 불가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의 가장 강력한 지주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진짜 민주주의의 역사적 경험

 

이처럼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에 따른 심판이라는 원칙은 실상 허구적이거나 자본의 이해를 지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허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완전한 민주적 통제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민주주의다.

 

이를 실제로 보여준 위대한 역사적 경험이 있다. 바로 18719월 자본가계급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던 파리 노동자들의 혁명, 즉 파리코뮌이다.

 

당시 파리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통치는 신비한 일이어서 훈련을 거친 카스트의 손에 위탁해야만 하는 초월적 기능인 듯한 미망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신 파리코뮌은 모든 공직을 선출하고, 선출된 관료들을 언제든지 해임 가능하도록 했으며, 그들에게 숙련 노동자의 평균임금만을 지급했다. 이를 통해 인민의 오만한 주인들이 이제는 공중의 감독 아래 활동하게 됨으로써 가짜 책임이 진정한 책임으로 대체된 것이다.

 

사법부 역시 이런 원칙의 예외가 아니었다. 파리코뮌은 사법부의 외견상의 독립성을 폐지하는 대신 다른 모든 공직과 마찬가지로 판사들 역시 노동자들이 선출하고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도록 했다. 마르크스는 국가의 재판관들이 코뮌의 기관으로 전화했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사법부가 노동자 민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노동자 민중에게 통제받게 됐음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에도 자본가들은 계급지배 질서를 바닥에서부터 뒤흔든 파리코뮌을 격렬히 비난했다. 자본가들은 파리코뮌에 대해 등가 원자들의 군집이며, 서로를 경계하며,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최고 통제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며 무질서와 혼란이 극심한 체제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러나 누구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사회,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이상 아니겠는가? 실제로 파리코뮌에서는 살인, 약탈, 폭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채 자신의 역사적 창의성에 대한 열정만이 가득했다.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노동하는 다수 대중이 전면적으로 사회 운영에 참여할 때 훨씬 강력한 역량을 발휘한다는 역사적 경험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도 똑같이 반복됐다. 한창 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9년 레닌은 인민 대중이 스스로 순결하고 소박하게 거칠고 단호하게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면 부르주아지는 겁에 질려 지성이 땅에 떨어졌다고 아우성치지만, 그런 순간에 역사의 영역으로 침투하는 것은 개인의 지성이 아니라 대중의 지성이며 대중의 지성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이라고 자신이 목격한 바를 기록했다.

 

사법부의 독립 대신 사법부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통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는 노동자들은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기만적인 가치가 아니라, 사법부 역시 노동자 대중이 아래로부터 통제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주장해야 한다.

 

성범죄자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일삼는 법관들을 징계하고, 박근혜 정부 때 사법농단을 일삼은 판사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은 기본이다. 나아가 노동 사건을 전담하는 노동법원을 신설하고 노동자 재판관 제도를 두게 하는 것, 검찰 내에 자본범죄수사처를 신설하도록 하고 자본가 범죄를 노동자 검사가 수사하도록 하는 것 등도 충분히 요구 가능한 사안이 된다.

 

우리는 지난 기사에서 노동자정부를 향한 계급투쟁의 길을 만든다는 원칙에서 이와 관련된 여러 아이디어를 제출한 바 있다(관련기사: ‘선출된 권력 vs 선출되지 않은 권력’, 그 거짓 프레임을 넘어 노동자 민중의 정부를 향하여). 노동자 단결 투쟁의 원칙 아래 이런 고민들을 더욱 풍부하게 구체화시키자.

 

사법부가 노동자 민중 위에 군림하는 대신 노동자 민중의 봉사자가 되도록, 노동자들이 사법부를 통제하게 하자! 그리고 노동자권력이야말로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궁극적인 길임을 명확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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