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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적 합의주의’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탈리아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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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720회 2020-06-1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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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3월에 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한 사업장 수칙이 합의됐는데 왜 이탈리아 곳곳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총파업까지 이어졌을까?

 

 

지난달 21일 노회찬재단 주최로 코로나19와 사회연대전략이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 소식을 보도한 <매일노동뉴스>는 정부가 국가채무를 늘려야 할 필요성과 더불어 노사 신뢰가 바탕”, “노사는 위기협약 체결해야등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런 제목에 녹아들어가 있는 관점은 사회적 타협을 위해 노조가 먼저 임금동결을 선포하자는 한석호, 이남신 등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매일노동뉴스> 칼럼 돌팔매 맞더라도 목청껏 임금동결을 주장하고 싶은데”, “코로나19 위기극복, 담대한 임금동결을 제안한다참조)

 

토론회에서는 여러 사례와 함께 이탈리아 사례도 소개됐다. 이탈리아노총은 정부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노사정 협약을 맺는 데 참여했고, ‘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한 사업장 수칙이 마련됐다. 317일 국회에서 통과된 이탈리아치유(Cura Italia)라는 이름의 법령에는 60일간 해고를 금지한다는 내용까지 들어갔다. 이후 추가 법령을 통해 이 기간은 세 달 더 연장됐다.

 

코로나19 위기가 몇몇 사업장이나 일부 지역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한, 정부에게 책임을 묻고 국가 차원에서 대응책을 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 점에서 이탈리아 사례는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노사정 대화를 통해 의미 있고 강제력 있는 사회적 협약이 맺어진 성공사례처럼 보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많은 사안을 기업과 시장의 권한에 내맡기며 노동자를 위기 앞에 무장해제시키려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적극적으로 대응해 정부로부터 강제력 있는 조치를 끌어낸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성공?

 

사회적 합의주의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끝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에서 노사정 합의로 어떤 조치수칙이 마련됐다면, 그다음에 볼 것은 그런 조치나 수칙이 얼마나 또는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사례를 살펴보자.

 

이탈리아 북부 산업도시 밀라노 외곽 페스키에라 보로메오(Peschiera Borromeo)에 이탈리아 티엔티/페덱스(TNT/FedEx) 물류창고가 있다. 티엔티는 페덱스의 이탈리아 자회사이고, 페스키에라 보로메오 물류창고는 이탈리아 내 물류센터 중 가장 큰 축에 속한다. 사실 티엔티는 이탈리아에서 한창 코로나19가 창궐하며 노동자들이 위험에 내몰린 초창기부터 투쟁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정부가 공공장소와 도시 전체를 봉쇄하고 사람들이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지만, 노동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꼬박꼬박 공장과 작업장으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티엔티 물류창고를 포함해 아마존과 자동차공장, 조선소, 매장 등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이런 투쟁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노동현장에 이런저런 안전수칙이나 법령을 도입하는 건 불가능했거나, 더 불완전하거나 더 지연되는 방식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티엔티/페덱스 노동자들은 안전한 작업조건과 고용안정을 요구하며 여러 물류창고에서 파업을 했고, 430일과 51일 진행된 전국 총파업에도 참여했다.

 

이미 3월에 코로나19 확산 저지를 위한 사업장 수칙이 합의됐는데 왜 이탈리아 곳곳에서 투쟁이 벌어지고 총파업까지 이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가들이 합의를 지킬 생각이 없었고, 정부도 그런 자본가에게 제재를 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장과 매장, 물류센터에서 무수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자본가들은 이윤을 손에 넣기 위해 서둘러 작업장을 재가동했다. 정부는 수천 개의 기업이 자체적으로 자신의 사업이 필수업무라고 주장하기만 하면 바로 재가동할 수 있도록 허가해줬다. 이탈리아에서 이뤄진 노사정 합의란 그런 것이었다.

 

이탈리아 노사정 합의, 현장에선 이렇게 적용됐다

 

자본가들은 꽤 인상적인 법령으로 회자된 한시적인 해고금지 조치마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올해 초의 여러 투쟁과 협약을 거친 결과, 페스키에라 보로메오 물류창고에서 5년간 일해 온 티엔티/페덱스 계약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규직 채용이 예정된 51일이 되자, 사측은 합의를 지키는 대신 66명의 계약직 노동자를 해고해버렸다. 회사의 입장은 간명했다. 기존 합의를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66명의 계약직 노동자는 또다시 파업을 해야 했다. 물류창고에서 같이 일해온 정규직 노동자들도 이 해고에 반대하면서 공동으로 점거파업을 했다. 이들과 같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있는 투린, 로마, 나폴리, 볼로냐 등 다른 도시의 물류창고 노동자들도 연대파업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해고반대와 더불어 일시적으로 휴직하는 노동자에게 임금이 온전하게 지급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유급휴직이나 작업장 안전보장에 관한 노사정 합의가 없어서 문제였나?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협약은 이미 체결돼 있었다. 이탈리아의 사회보장보험으로도 12개월에서 최대 36개월까지 해고 대신 일시적인 휴직 방식으로 고용을 유지하되 임금은 80% 수준으로 낮춰 지급하는 조항이 있다.

 

이탈리아 자본가들은 이 모든 제도와 협약을 무시할 태세가 돼 있음을 보여줬다. 정부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류창고 점거파업이 이어지자 여러 대의 버스로 경찰이 투입됐고, 이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방패로 밀쳐냈다파업이 계속되자 사측은 아예 물류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노동자들은 당장 물류 폐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일단 511일자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그 뒤에 다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티엔티/페덱스 노동자들은 경찰의 곤봉에 맞고 발로 걷어차이며 손가락이 부러지거나 실신하기도 하는 등 이 파업을 깨려는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에 맞서고 있다. 노사정 대화와 사회적 합의를 체결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이탈리아노총은 이 투쟁을 엄호하고 확산하며 현장에서 퍼져나가는 자본가들의 진짜 공격을 받아치는 데에는 그다지 적극적인 것 같지 않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한국에서도 위기가 심화될수록 이 위기를 사회적 합의주의로 타개하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릴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든 민주노총을 노사정 대화에 끌어들여 손발을 묶으려 할 것이다. 이미 원포인트운운하며 노사정 대화가 시작됐다. 민주노총 김명환 위원장은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저들과 악수를 나눴다. 일각에선 노동자가 먼저 양보해야 한다며 자발적 임금동결론에 군불을 지피고 있다.

 

그렇게 해서 모종의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고 가정해보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선 가정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그나마 여러 사업장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상징적이지만 총파업까지 벌어졌던 이탈리아에서조차 자본가들과 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농락한다. 그렇게 쓰라린 방식으로 노사 간의 신뢰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러면 그만큼의 투쟁조차도 조직하기를 꺼려하면서 알아서 양보부터 하려는 노동조합을, 한국의 자본가와 정부는 어떻게 대할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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