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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 장강명의 소설 <산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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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자서울성모병원 노동자 조회 197회 20-01-0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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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 한때 이런 말이 회자됐다. 한창 구조조정으로 정리해고 바람이 불 때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은 단지 비유에 그치지 않았다. 해고 노동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숱했다.

 

세상이 좋아졌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점점 늘고 해고는 일상다반사가 돼버렸다. 이제는 회사에 고용돼 있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도 뭣한 상황이다.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로 나뉜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장강명의 연작소설 <산 자들>은 바로 그런 산 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들, 하지만 과연 살아있는 것인지 스스로도 분명치 않은 불안한 나날에 대한 이야기.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사무직 아르바이트로 일하다 상냥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고된 혜미. 자회사로 갈지 말지 이메일로 답장을 보내지 않아 대기발령을 당하고 결국 스스로 나가야 했던 다섯 명의 식품회사 홍보물 편집팀원들. 공장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게 된 산 자와 죽은 자. 밧줄 올가미를 목에 걸고 강제철거에 맞서는 철거민 선녀. 애초부터 뭔가 괜찮은 걸 노려볼 기회조차 없었던 취준생. ‘학대받는 동물의 표정을 하고 있던 이사업체 직원들, 서비스센터 기사, 택배 노동자, 피자 배달원 등등.

 

잘못한 것도 없는데 윗분이 화났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쓰게 한 것에 대해 한 등장인물이 말한다. “그건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에 관계된 일이지. 자기가 돈이 있다고 남의 존엄을 무시하면 안 되지. 그게 갑질이잖아.”

 

지금 자본이 저지르고 있는 일, 학생들을 취업경쟁을 위한 스펙 쌓기에 목숨 걸게 하고 취준생으로 몇 년씩 허송세월하게 만드는 것, 프랜차이즈 본사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자영업자들을 저소득과 폐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 안정된 일자리를 미끼삼아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도록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놓는 것.

 

이 모든 일들은 바로 우리 인간의 위엄이나 품위와 관계된 일이다. 노동자의 존엄을 무시하고 갑질하는 자본주의 체제, 즉 이윤을 위한 경쟁과 착취의 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한, 산 자들의 발밑 또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모래언덕일 뿐이다.

 

살아남아도 개운치 않아

 

소설 속 인물들과 그들이 겪는 일은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핏 음울하고 무겁기만 한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재미있게 읽힌다. 디테일한 현실묘사 덕분이다. 기자 출신답게 작가는 디테일을 살려 경쟁사회에서 잘리고 버티고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학생도, 취준생도,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무한경쟁에 내몰려 지쳐가고, 서로 이유 없이 미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 서로는 적이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알면서도 이해하고 배려하기보다는 오로지 살기 위해 개별화되고, 마침내 살아남고 성공해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래서 혼란스럽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잘리고 싸우고 버티는 이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의문이 생긴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처절하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 소설은 물론 이를 대놓고 보여주진 않는다. 그러나 우린 어렴풋이 그걸 느낄 수 있다. 거대한 시스템, 사회구조 속에서 저마다의 위치에서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한국지엠 창원공장에서 비정규직 대량해고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도 안다. 대량해고는 단지 지엠 자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 자동차산업의 지각변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이미 군산공장 구조조정을 지켜본 정규직 노동자들도 모르는 게 아니다. 비정규직 해고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비정규직 해고 다음엔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이어질 것임을.

 

노사정이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는데도 하루아침에 무기한 휴직 연장 통보를 받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 또한 안다. 이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폭주기관차 같은 자본이, 선봉에서 투쟁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현장에 들어와 다시 노동자들의 잠재된 분노를 끌어 모을 구심이 되는 게 두려워 복직 연기를 했다는 것을.

 

그래서 무엇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혼란이 말끔히 씻겨나가진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까? <산 자들>은 그 실마리를 슬쩍 비춘다.

 

어머니는 세상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혼자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조금씩 생겨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그 기회가 올까? 내게 맞는 기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덤벼 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인지 과연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

 

2020년 새해가 밝았지만 희망보다는 절망과 불의가 여전히 우리를 덮치고 있다. 운 좋게 살아남아도 개운치가 않은 이 혼란스런 현실을 바로잡는 게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우리에게 그런 기회가 오기는 할지 거듭 되묻게 된다.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번 이렇게 되새겨 보자.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지.” “직접 덤벼 보기 전에는 이게 적당한 기회인지 알아챌 방법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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