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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잠들면 여성에게 어둠이 찾아든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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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자서울성모병원 노동자 조회 5,413회 19-11-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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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보다 나은 영화나 드라마는 없다는 그 동안의 내 생각은 이번에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바뀌었다. 원작소설 못지않게 잘 만든 영화였다. 소설 읽으면서는 안 울었던 듯 한데 영화 보면서는 다른 관객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감탄도 많이 하게 됐다.

 

소설 나왔을 때나,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나 하도 논란이 많이 돼서 나도 모르게 남자 관객이 있는지 살펴봤다. 난 여성주의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되다니! 남녀대립의 구도는 이렇게 무섭다.

 

경단녀도 억울한데 맘충?

 

지영은 출산과 육아로 회사를 그만 둔 경력단절녀다. 자상한 남편, 화목한 친정가족, 평균적인 시집 가족들. 그런데 뭔가 많이 힘들었는지 우울증에 걸려 이따금 빙의가 되기도 한다. 명절날 친정에 온 결혼한 시누이 내외를 위해 다과상을 내오라는 시어머니에게, 친정어머니로 빙의돼 사부인, 사부인 딸이 친정 오면 며느리도 친정에 보내주셔야죠라고 말해 가족들이 경악한다.

 

남편에겐, 첫사랑이었던 후배로 빙의돼서 충고를 하고, 친정엄마로 빙의돼 옷 따뜻하게 입으라고 태연히 말한다. 엄마에겐 외할머니로 빙의돼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남편은 지영을 위해 이 사실을 숨긴다. “가끔 옛날 생각 많이 나고 저녁 되면 가슴이 쿵 내려앉을 때가 있지만 별 거 아니다라는 지영에게, 요즘 사람들 정신과 가는 거 별 거 아니니 한번 상담 받아 보라고 권한다. 결국 가족들이 다 알고 나서야 지영은 가장 늦게 자신의 병을 알게 된다.

 

지영의 아버지는 아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기성세대. 남동생은 이런 아버지 덕분에 누나들을 , 라 부른다. 학생 때 버스에서 성추행을 당한 뒤 도와준 승객 품에 안겨 펑펑 우는 지영. 아버지는 치마가 짧다, 남자들 보고 웃지 말라고 지영을 혼낸다. 회사에서 가고 싶은 기획팀에 여자라 뽑히지 못하는 지영. 회사 화장실에 몰카가 설치돼 여자직원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고 그 트라우마 때문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공중화장실에선 볼일 보는 게 두려운 지영.

 

성폭력방지교육을 받고 나와 담배 피우며 남자직원들이 대화 나누는 장면은 정말 현실을 잘 옮겨놨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엄마들끼리 모여서 나누는 대화는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지만 뒷맛이 씁쓸하다. : 명문대 나와서 지금은 전업주부가 된 자기 처지를 농담으로 웃어넘기는 엄마들. 아기 데리고 공원에서 커피 마시는 지영에게 어떤 남자는 좋겠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낮에 커피도 마시고라며 비아냥댄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쏟자 아이 때문에 시끄럽다. 아우~ 민폐, 맘충어쩌고 막말을 퍼붓는 사람들.


여성억압의 거의 모든 것

 

영화는 남아선호사상, 유리천장, 성폭력, 화장실몰카, ‘여성은 조신해야 한다등 일반적으로 퍼져있는 여성차별적인 문화를 다 담고 있다. 이른바 여혐주의자들이 목에 핏대 세우고 비난할 만큼 남녀의 대립(‘모든 여성의 적은 남성이라는 식의)을 대놓고 드러내진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성장과정, 직장생활, 가족관계에서 겪은 이런저런 성차별, 억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런 이야기 전개가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의 여성이라면 대부분 겪어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은 영화 속으로 성큼 들어와 버렸다.

 

원작소설과 영화를 비난하는 목소리 가운데 피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한 명의 인생에 다 우겨넣었다는 지적도 있던데, 나는 그게 뭐가 문제인가 싶다. 소설에서는 각종 통계자료까지 동원해서 여성이 겪는 차별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오히려 영화는 소설보다, 현실의 그것보다 덜 적나라하게, 덜 잔인하게 그려냈다고 본다.

 

당찬 여성, 용기 있는 여성, 그러나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지영과 엄마의 관계. 선생님 되는 게 꿈이었지만 가족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며 산 엄마. 지영의 병을 알고 찾아온 엄마는, 식당 그만 두고 아이 봐 줄 테니 너 하고픈 거 해라고 딸을 위로한다. 그때 지영은 말한다. ‘미숙아, 그러지 마. 니가 오빠들 뒷바라지하느라 청계천 미싱 공장에서 일하다 손 다쳤을 때 미안하고 고맙단 말도 못했어. 지영이는 강하니까, 니가 지영이 약하게 안 키웠으니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이 장면에서 관객석 온통 눈물바다) ‘엄마의 엄마로 빙의돼 엄마에게 건네는 말. 엄마의 인생을 보듬는 말이자, 나는 잘할 수 있을 테니 엄만 너무 걱정 말라는 지영의 다짐과 위로.

 

조신하라고 딸을 나무라는 아빠와 달리 막 나대, 더 나대!”라며 딸을 응원하는 엄마. 어려서부터 노동자로 살며 강하게 살아온 엄마는, 딸 또한 강하게 잘 키웠다. 그런 엄마의 응원이 없었다면 지영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고꾸라졌을지도 모른다.

 

지영의 직장상사 김팀장은, 출산 한 달 만에 복귀해서 지독하단 소리를 듣지만 당차게 헤쳐 나가는 전형적인 워킹맘. 남자상사의 성차별적인 말에 사이다 발언으로 한 방 먹이기도 하며 여직원들에게 존경받는 인물. 그러나 이런 김팀장도 다 남자로만기획팀을 꾸린다. 지영이 자신이 발탁되지 못한 이유를 묻자 ‘5년 이상 가는 프로젝트라 여자는 출산, 육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지영은, 김팀장이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며 안도한다. 그래도 개운친 않다. 출산, 육아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을 당연하게, 핸디캡으로, 안 좋게 보는 사회구조에서는 개인의 용기나 당참, 능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는 것이다.

 

책임은 사회에 있다, 해결책은 남녀노동자의 단결과 연대

 

지영의 남편은 자상하고 착하다. 하지만 그도 양성평등을 몸에 익힌 완벽한사람은 아니다. 아이 낳으라는 가족들의 등쌀에 어차피 낳을 거 그냥 빨리 하나 낳자고 하고, 집안일을 도와준다고 표현한다. 일을 하겠다는 지영에게 더 쉬어라고 했다가 아이 기르는 게 쉬는 거야?’라는 핀잔을 듣는다. 지영이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아이돌보미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자 자신이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해서 지영을 기쁘게 하지만, 시어머니의 분기탱천한 반대에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 그의 착함만으로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뛰어넘을 수 없다.

 

누군가는 별 걸 다 꼬투리 잡으며 예민하게 군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남녀 사이에 출산, 육아, 가사노동의 무게는 많이 다르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출산, 육아, 가사노동 등을 오로지 개인이,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도록 방치하고 부추기는 현실이 문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려면 친정이나 시집 가족 누군가가 아이를 돌봐주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충분한 보육시설(특히 직장보육시설)이 갖춰져 있고 눈치 안 보고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분위기와 복지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여성, 가족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지금의 현실은 달라지기 어렵다.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방기된 결과 남녀 또는 가족간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82년생 김지영>이 보여주는 여러 여성차별과 억압의 문제는, 남녀의 대립과 갈등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를 여성김지영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여성노동자가 겪는 이중의 굴레, 착취와 억압, 차별에 대해 누구도 엄살이다, 지나치게 예민하다고 돌을 던질 수 없다.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책임이 여성과 가족에게 떠넘겨진 결과, 종국엔 남녀갈등, 가족문제로 왜곡돼 버린다. 여성노동자와 남성노동자의 연대로 이 왜곡을 바로잡고 평등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발걸음을 내딛자. 여성의 고통에 대해 잠들어 있는 이 사회를 남녀의 단결된 힘으로 일깨우자.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숱한 김지영은, 그리고 그 김지영의 가족은 진짜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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