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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은 과연 노동자의 벗인가? - 이제 그들의 ‘공정성’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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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5,548회 2019-09-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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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눈과 귀를 허튼 곳으로 돌리는 공정성이란 가짜 화두(사진_뉴시스)

 

 

조국 없이는 검찰 사법부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앞세우며,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이 조국 일병 구하기 작전에 돌입했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조국의 위선을 맹공격하면서, 정권에 대해 연일 포화를 퍼붓고 있다. 이렇게 두 주요 자본가정당들의 쟁투 속에서 조국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인선이 사회적 논쟁의 태풍으로 떠올랐다. 그 속에서 공정성이란 화두가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짜 화두다. 아니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눈과 귀를 허튼 곳으로 돌리면서, 자본주의의 논리 속으로 포섭하는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공정성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나는 그것을 판도라의 상자에서 꺼내기를 희망한다.

 

그들이 공유하는 공정성의 논리

 

부르주아 언론들은 조국의 딸과 관련해 논문 제1저자 기재, 고려대학교 입학과정 등 여러 증거를 내세워 공정성 문제를 제기한다. 공정한 과정을 통해 소위 명문대학에 입학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대학교 인턴십에 참가해 논문을 영어로 작성하는 데 도움을 준 것에 불과한데, 논문의 제1저자로 올리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이 대학 입학에 영향을 줬으니 공정성을 위배했다는 것이다. 이는 자유한국당 계열 보수세력이 전면에 내세우는 논리다.

 

정부와 민주당 또한 이 공정성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이들 또한 정확히 동일한 논리적 기반 위에 서 있다. 조국 본인을 비롯해, 유시민 등 민주당과 정부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핵심 논객들도 이 공정성 논리를 완전히 공유한다. 다만 이들은 자한당이 비판하는 것처럼 심각한 공정성 위배는 없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1저자로 논문에 등재한 것은 교수의 선의를 반영하는 에피소드정도의 사안이며, 이것이 고대 입학에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는 논리다. 들어갈 만한 학생이 들어간 것이니 공정성의 룰을 심각하게 위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왜 학벌과 공정성에 집착하는가?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교묘한 구조를 발전시켜왔다. 또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이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세뇌장치들을 만들어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능력 있는 자들이 능력 없는 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다. 작업장과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출중하므로 지배하고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 능력을 보증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바로 학벌이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학벌을 활용하고자 했다. 또한 자본가들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이 노동자를 공격하고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그들에게 학벌을 요구했다. 이들은 자본가계급의 시녀가 아니라 뛰어난 학벌을 가진 능력 있는 자들이고, 따라서 이들의 생각과 판결은 정의롭고 정당한 것이니 잠자코 복종하라는 것이다.

 

이런 자본가계급의 필요와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순결한 학벌이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학벌에 불순물이 끼어들면 학벌=능력=지배의 정당성이란 알리바이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이 소위 공정성에 집착하는 이유다.

 

공정성에 대한 수많은 질문

 

자본가계급에게 필요한 공정성이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공정성이다. 따라서 이 공정성에는 계급의 각인이 찍힌다. 노동자계급이 패배자로 떠밀리고 자본가계급이 승리자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그런 공정성 말이다!

 

과거 독일의 히틀러는 게르만·아리아인종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올림픽을 이용하려 했다. 이미 독일에서 유대인과 집시, 그리고 이른바 유색인종은 스포츠계에서 배제되고 있었고, 올림픽에도 불참 압력을 받았다. 애당초 서구 백인들에게 유리한 구조로 올림픽이 자리를 잡아왔기 때문에, 히틀러 정권에게 올림픽은 유대인과 유색인종 등의 열등함을 입증하기에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히틀러의 올림픽과 똑같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영어, 수학을 잘 하면 능력이 출중한 것인가? 영어, 수학은 잘 못하지만, 공을 잘 차고 봉사정신이 투철한 학생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친구들을 위해 희생하는 학생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 기막힌 손재주를 갖고 있고, 용감한 학생은 능력이 없는 것일까?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노동자계급의 아들, 딸에게 기본적으로 불리하다. 어려서부터 외국 여행을 다니고, 해외 어학연수를 다닐 수 있는 부잣집 자식들에게 영어는 일방적으로 유리한 과목이다. 부잣집 자식들은 고액과외 등으로 어려서부터 수학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다. 반면 노동자계급 자식들에게 유리한 과목은 주변부로 밀려난다. 뛰어난 손재주는 종목에 들어가지 않는다. 협동심과 따뜻한 배려심, 정의감, 봉사심도 그렇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그들만의 리그에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이 끼어드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한다. 반대로 자본가계급의 자식들은 그 리그에 최대한 편입시켜야 한다. 그런 필요와 요구에 의해 학벌제도는 끊임없이 변신한다. 조국의 딸이 들어간 고려대학교 입학전형은 이른바 금수저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에서 2년 이상 부모와 함께 살고, 영어를 원주민처럼 아주 잘 할 수 있어야 입학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전형은 면접에서 네 부모님은 직업이 무엇이니?’라는 질문을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형이다!

 

또 하나의 장치가 더해진다.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특목고의 상위계층 부모들이 맺는 네트워크다. 이 네트워크에서 그들은 서로 품앗이를 하면서, 일반 고등학생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스펙 쌓기를 서로 지원한다. 어떤 평범한 학생이 대학 의대 실험실 프로젝트에 참가할 기회를 꿈꿀 수 있겠는가? 어떤 평범한 학생이 의대 교수와 함께 논문을 작성해 제1저자가 되는 것을 꿈꿀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것은 상식적인 일이 된다. 그리고 소위 명문대학들은 그 상식적인 일이 만들어낸 엄청난 스펙을 근거로 자본가계급과 상위계층 자녀들에게 능력의 보증수표를 발행하고, 반대로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을 철저히 배제한다. 어쩌면 소위 스펙은 어느 계급에 속해 있는지를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아니었을까?

 

공정성과 경쟁

 

대학의 신입생 선발기준이 우회적으로 반영하는 자본가계급의 요구가 기업들에서는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삼성을 비롯해 대기업에서 치르는 인적성 입사시험의 출제원리가 협력, 정의, 저항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맞춰져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대기업 면접관들 앞에서 노동조합에 우호적이거나 평등을 지지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불합격의 지름길이다. 대학 커리큘럼은 이런 대자본의 요구에 철저히 맞춰져 있다.

 

이 구조 속에서는 본능적으로 협력, 정의, 저항의 본성을 갖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은 밀려나기 십상이다. 그런 배제는 초, , 고등학교에서부터 이미 시작된다. 자본가계급의 자식들에게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윤리와 경제를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은 결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다. 불평등과 착취를 정당화하고, 이윤을 위한 노력을 기업가의 창의성으로 칭송하는 경제를 노동자계급의 자식들이 이해하고 내면화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자본주의 세상의 실제 모습과 동떨어진 위선적인 윤리를 노동자계급 자식들이 수용하는 것도 어찌 쉽겠는가?

 

그런데 자본가계급의 공정성이 달성하려는 목표는 경쟁과 맞물릴 때만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할 때만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예비 노동자들을 몰아넣은 뒤, 자본가계급은 공정한 경쟁을 명령한다. 소수의 승자는 지배자가 될 것이고, 다수의 패자는 노동자로 지배당할 것이라고 그들은 준엄하게 선언한다. 이 신성한 경쟁의 링이 가진 권위는 절대 침범당해서는 안 된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공정성이다.

 

그런데 이 공정성이 위협받고 있다! 최순실만이 아니라 조국도 이 공정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게 자본가계급과 지배자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준엄하게 다스려서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공정한 운동장처럼 재단장해야 한다. 이게 모든 자본가정당들이 지금 힘주어 노력하고 있는 일이다.

 

위선 그리고 사법개혁

 

조국 딸 사태의 본질은 간명하다. 지배계급의 재생산 논리를 조국은 그대로 답습했다. 말로는 특목고를 반대한다고 했지만, 자신의 딸은 부르주아 학교인 특목고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이 특목고에 형성된 상류계층의 네트워크 구조를 십분 활용해 스펙을 쌓게 했다. 이것은 완전한 팩트다. 조국은 한국 자본가계급 주류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것은 사모펀드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 대박을 노린 투자이건 상속세를 회피하려는 술책이건, 사모펀드 문제에서 조국은 자본가들에게 익숙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바로 집안의 재산을 대물림하면서 자본가계급의 지위를 재생산하는 모습 말이다. 그런데 민주당과 정부는 이런 자가 사법개혁의 유일한 적임자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사법개혁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현 정부의 사법개혁이란 검찰의 권한 일부를 경찰이나 제3기관에 이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상관이 있겠는가? 더 많은 권한을 이양 받는 경찰은 검찰만큼이나 친자본적인 조직이다. 경찰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는 자본가들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나,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한 없이 적대적이다. 노동자들에게 둘 사이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다.

 

사법개혁을 부르짖는 조국과 민주당 정부는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다. 조국과 민주당 정부는 한일 분쟁을 틈타 자본가에 대한 규제를 풀고 노동자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도입하고 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권, 공무원·교사의 파업권 등 노동자에게 절실한 권리를 반드시 법제화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표명하지 않고 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그 따위 적임자는 꺼져라!’ 하고 분노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공정성

 

자본가언론들과 자본가정당들은 조국 딸 파문으로 구멍이 난 자본가계급의 공정성을 기워 수선하려 할 뿐이다. 아무리 잘 기워 수선하더라도, 그것은 공정성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그것은 자본가계급 사이의 공정성일 뿐이고, 여기서 노동자계급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

 

앞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소위 명문대학 입시가 완전히 공정하게 치러진다면, 그래서 그런 공정한 경쟁 속에서 걸러진 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면, 그 사회는 과연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일까? 아마도 그런 사회는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정당화하는 체제, 즉 능력을 가진 자들이 세상을 지배할 뿐이므로 이 지배를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위선적인 자기 정당화가 가장 확실히 관철되는 체제를 의미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체제가 말하는 공정한 경쟁으로 선발돼 명문대학에서 교육받은 자들이 검사, 판사, 기자, 고위 정부관리, 정치인이 돼 노동자계급을 탄압하고 억압하며 지배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그런 공정성에 맞장구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본가계급의 공정성과 노동자계급의 공정성은 완전히 다르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기준으로, 그들의 입맛대로 설정한 능력기준을 거부한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능력은 의사의 능력에 못 미치는가? 응급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저 앰뷸런스 운전자의 능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인명구조를 위해 불구덩이에 온몸을 던지고, 저 높은 빌딩 벽을 타며,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119 구조대원의 능력이 왜 교수의 능력보다 떨어지는가? 컨베이어라인을 타며 자동차를 조립하는 저 숙련된 노동자의 능력이 왜 대기업 이사의 능력보다 낮게 취급되는가?

 

이미 노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업과 업종,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노동자는 동등하고, 기본적으로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각성이 그것을 표현한다. 이 각성은 동심원처럼 퍼져가면서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들의 운동을 잉태하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공정성의 깃발을 흔들어댄다. , 우리가 설정해놓은 경쟁의 링으로 들어와라! 학벌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본가계급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학벌이라는 장치를 통해, 경쟁이라는 장치를 통해, 노동자계급을 갈기갈기 찢어놓아야겠다고 그들은 외친다. 일부 노동자들은 입사시험을 거쳐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일부 노동자들은 그냥 비정규직으로 채용한 뒤 그들은 선언한다. ‘능력에 따른 대우! 공정한 성과급! 공정한 직무급제!’ 그렇게 그들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정규직 노동자들과 분열시키려 발악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심어놓은 자본가계급의 공정성이 일부 노동자들을 파고들고 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가령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런 기만적인 공정성에 맞서 정규직화 쟁취투쟁에 당당히 나서고 있다. 먼저 깨인 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의 노동이 우리의 노동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렇게 새로운 능력기준과 새로운 공정성이 잉태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성한 노동자들은 분명히 깨닫고 있다. 자본가계급의 엘리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노동자들을 위하겠다고 하는, 정의와 공정성을 대변하겠다고 하는 엘리트들을 조심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공정성은 노동자를 위한다고 하는 엘리트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의 공정성은 단결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집단행위를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기여를 깊이 존중하고, 하는 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노동자 모두의 동등한 가치를 이해하며 하나로 단결한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새로운 공정성은 잉태된다. 이 새로운 공정성은 부르주아 엘리트주의를 저 멀리 밀어내고,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코뮌, 노동자평의회처럼 모든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자주적인 집단조직으로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동자의 집단기구는 법을 제정하고, 판결하며, 법을 집행하는 권한 모두를 자신의 손에 움켜쥔 노동자권력으로 자신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노동자들이 추구하는 사법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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