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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열 개의 장면으로 돌아보는 ‘KEC전쟁사’ - 노조파괴 끝판왕에 맞서 끝장투쟁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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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진 이미옥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 조회 7,298회 2019-08-2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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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노동과세계 

  

편집자 주   창사 50주년 행사가 치러질 99, KEC지회 동지들은 노조파괴 10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 노조파괴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또다시 추진되는 구조고도화와 공장폐업 위협에 맞서 승리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글을 기고해준 황미진(KEC지회 부지회장), 이미옥(KEC지회 수석부지회장) 두 동지가 노조파괴 10년을 돌아보며 잊을 수 없는 열 개의 장면을 골랐습니다. 한 장면 한 장면 되새겨보며 투쟁과 연대의 의지를 곧추세우게 됩니다.

 

 

#1 _20106, 전쟁이 시작됐다

 

2010630일 새벽 1, 철컥 소리와 함께 기숙사 내 방 문이 열렸다.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소름 끼치게도 웃고 있었다. 깡패처럼 보이는 그들은 직장폐쇄가 됐으니 나가!”라고 소리쳤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무서웠다.

 

그들은 욕설을 퍼붓고 몸을 잡아 방밖으로 끌어냈다. 기숙사에 있던 여성 조합원들은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채 슬리퍼 차림으로 서럽고 수치스러워 울었다. 회사 관리자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다급하게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신고접수 완료라는 문자만 날아왔다. 자본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지, 공권력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처절히 알게 됐다.

 

#2 _난생 처음 당한 직장폐쇄, 낯선 거리에 서다

 

회사의 악행을 알리고 우리의 투쟁은 정당하다는 내용의 선전지를 처음 돌리던 날, 선전지를 건네는 손과 심장이 미치도록 떨렸다. 창피해서, 너무도 부끄러워서 가방에 넣어 버렸고 또 빨갱이 귀족노조란 소리에 숨어버렸다. 아니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다. 선전물 하나 못 돌리는 자신을 그날 보았다.

 

#3 _13일간의 공장점거, 끝내지 못한 싸움

 

102115, 우리는 1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교섭을 거부하는 회사와 교섭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 준비 없이 들어간 공장은 춥고 공포스러웠다. 폐쇄된 1공장을 에워싼 수천 명의 병력은 새벽이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처럼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공장 안에서 비닐을 덮고 추위를 견뎌야 했고 작은 컵라면 하나로 하루를 버텼다. 그래도 우리는 이 시간만 견디면 회사와 합의되리라는 희망으로 견뎠다. 그러나 지부장의 분신으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113일 싸움을 끝내지 못한 채 <사회적 합의>라는 문서 한 장에 공장점거를 해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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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깡패와 국가폭력을 동원하며 시작된 KEC 자본의 노조파괴 10년 전쟁

 

 

#4 _342일간의 파업을 접고


공장점거투쟁 후 파업대오는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12월에 2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사표를 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생활비는 떨어졌고 지회 재정도 바닥났다. 천막농성장에서 피 말리는 시간을 지냈다. 20115, 지회는 파업 철회를 결정했다. 파업 철회는 조합이 패배한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을 텐데.’ 대책도 없이 조합원을 복귀시키는 지도부가 조합원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5 _반인권교육 - 반격의 훈련장

 

파업을 철회하고 3주 후에 직장폐쇄가 철회됐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린 것은 반인권교육이었다. 회사가 분류한대로 우리는 빨강, 파랑, 노랑색 티를 입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고 적힌 현수막을 보며 묵언수행을 강요당했다. <명심보감>을 읽었고, 시험을 쳤다. 시험문제의 답은 다 나 가 라였다. 회사는 우리를 차례대로 불렀다. “나가라!”고 했다. “파업 참가자는 절대 회사로 들어올 수 없다며 의기양양했다.

 

지회 임원들은 조합원들과 퇴근 후 매일 간담회를 했다. “회사의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싸운다면 반드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조합비로 마련한 작은 사무실에 빼곡하게 모여 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녹취와 채증이 일상이 됐다. 함께 저항하면서 징계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85, 마침내 반인권교육을 깨고 우리는 모두 현장으로 복귀했다. 어용 조합원들과 어울리며 회식도 가고, 관리자들에게 맞서며 지회는 빠르게 현장을 장악했다. 간부들은 조합원과 소통하며 매일의 실천지침을 공유했다.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투쟁했다. 똘똘 뭉쳐 싸우며 지회는 천하무적 노동조합은 이거다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6 _다시 민주광장에서 파업가

 

2013218KEC지회는 또다시 임단협 파업 출정식을 열었다. 20106월 뜨겁게 모였던 바로 그 민주광장에서. KEC지회가 제기한 단체교섭응낙가처분 판결로 교섭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2010600명 대오가 집결했던 민주광장에 지회 120명의 조합원들이 모였다. 눈물이 났다. 파업을 철회하는 날, KEC지회 깃발이 민주광장에서 날리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주광장 하늘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힘찬 팔뚝질로 파업가를 다시 부르며 지회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7 _“승리 없이 퇴사 없다” - 두 번의 정리해고를 이기다

 

2012224일 현장에 복귀한 지 6개월 만에 지회 조합원 75명이 정리해고를 당했다. 해고 예고장을 받은 조합원들은 울지 않았다. 해고통보를 받지 않은 동료들이 오히려 눈물을 보였다. 나쁜 건 회사인데 동료들이 아파했다. 우리는 필승의 각오를 다지며 외쳤다. “승리 없이 퇴사 없다!” 해고된 우리들은 미친 듯이 싸웠다. 정리해고로 만든 재원으로 관리자들의 임금을 인상하겠다는 회사에 굴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싸운 지 3개월 만에 우리는 당당히 승리하고 현장에 복귀했다.

 

그러나 회사는 20143월 두 번째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이번에는 해고자가 148명이었다. 어용노조 조합원도 정리해고 대상이 됐다. KEC지회는 파상파업을 했다. ‘파상파업이 뭐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용노조 조합원이 일하는 작업장 안에서, 설비가 돌아가며 제품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작업복을 입은 채로 바닥에 앉아 정리해고 철회 피켓을 만들었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불렀다. 조합원 모두가 모여 투쟁계획을 짜고 간담회를 하고 틈틈이 정리해고 동병상련 봄소풍을 준비하며 몸짓 연습도 했다. 엄청 분주한 나날이었다.

 

SNS를 타고 지회의 파상파업이 알려졌다. 대단하다고들 했다. 뭐가 대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동지들의 응원으로 더욱 용기가 났다. 2014417일 아침. 정리해고 동병상련 봄소풍을 준비했던 그날 회사는 정리해고를 취소했다. 두 번째 정리해고를 막아낸 우리는 공장 정문 앞에서 진짜 봄소풍을 즐겼다. 함께 춤을 추며 모두가 웃고 있었다.

 

#8 _2014년 폐업 반대투쟁, 사선을 넘다

 

KEC 노조파괴는 구조고도화를 하기 위해 계획되고 실행됐다. 구조고도화 사업은 공장 땅을 상업용지로 바꿔 대형쇼핑몰과 호텔 등을 짓도록 허용하는 일이다. 공장은 사라지고 노동자는 모두 일자리를 잃는다.

 

201410, KEC가 구조고도화 사업을 신청했다. 지회는 조합원들에게 구조고도화가 되면 공장을 폐업한다는 걸 알렸다. 막아야만 했다. 이 싸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 KEC폐업반대 범시민서명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간부와 조합원을 가리지 않고 비상체계에 돌입해 서명운동에 나섰다. 주말도 없이 미친 듯이 했다. 2010년에 선전지 하나 돌리지 못했던 내가 목이 터져라 서명해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조합원 모두가 변했다. 간부가 없어도 스스로 좌판을 펴고 동네를 돌며 서명을 받았다. 시민들이 힘내라며 가져다주신 커피 한 잔, 적극적으로 서명해주던 학생들. 그들을 보며 아이들이 커서 살아갈 세상에는 해고도 없고, 안전하고, 존중받고 일하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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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안팎에서 KEC 동지들의 완강한 반격이 이뤄졌다.

 

 

국화꽃 필 무렵 시작한 서명운동은 함박눈이 날리는 겨울까지 계속됐다. 2번도로 농협 앞, 중앙시장, 금오산, 인동, 옥계, 도량, 신평, 형곡. 우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미친 듯 소리치며 서명을 받았다. 절박한 시간이 흘렀다. 1215, 우리는 구조고도화를 막아냈다. 일자리와 공장을 지켰다. 그렁그렁 눈물 한 자락을 흘리며 다 같이 웃었다.

 

#9 _손배

 

20169, 공장점거에 대한 손배 30억 원이 현실로 닥쳤다. 2011년부터 시작된 손배소송은 조합원들에게 피 말리는 고통 그 자체였다. 회사가 손배를 탄압의 무기로 꺼내든 순간부터 많은 조합원들이 두려움 속에 공장을 떠났다.

 

여러 차례 조정을 거쳐 30억의 조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 서울에서 구미까지 수차례 내려와서 진짜로 조합원들을 다 죽일 생각이냐? 조합원들을 보라!”고 하셨던 변호사님. 민주노조와 조합원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힘들어 할 조합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합원들과 함께 넘어야 했다. 조합원들과 토론했다. 손배로 임금이 당장 압류되는 조합원들은 함께 이겨보자고 결정했다. 손배 대상이 아닌 조합원들은 매월 15만 원에서 40만 원까지 CMS를 내며 3년을 함께 버텨줬다. 2017년 설날을 앞두고 조합원들의 정성이 가득 든 하얀 봉투(명절휴가비)를 건네받았다. 봉투와 함께 전해진 동지들의 마음을 받아들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20197, 끝없는 터널 같았던 손배가 마침내 끝났다. 함께 견뎌주고 이겨내준 우리 조합원들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또한 함께 해주신 전국의 많은 동지들이 너무 고마웠다.

 

#10 _교섭창구단일화, 소수노조의 한계를 넘어

 

KEC지회는 소수노조다.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가 다수노조다. 소수노조에는 교섭권이 없다. 회사는 KEC지회와 체결한 단체협약을 20139월에 해지했다. 무단협 상태에서 어떤 노조활동도 보장받지 못한 채 매일 차별에 맞서 싸웠다. 회사는 어용노조를 통해 단체협약을 해마다 개악했다. KEC지회는 이 상태를 두고 볼 수 없었다. 2018년 처음으로 교섭창구 단일화에 참가했다. 본격적인 임단협 교섭이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는 전체 사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고, 모범 단체협약을 분석하고 지회 요구안을 마련했다. 조합원 설명회를 거치고 대의원대회를 통해 핵심 요구안을 확정했다.

 

2018년 임단협 핵심요구는 단일호봉제였다. KEC는 최저임금 미달 사업장이다. 최저임금마저 위반하고 있는 임금체계를 바꾸기 위해 직접 단일호봉제를 만들었다. 1년 내내 수많은 이벤트와 선전전을 벌이며 임단투를 조직했다. 선전지가 나갈 때마다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어용노조 조합원에게 설명하고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어용노조 조합원들도 임금체계를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지회가 교섭창구 단일화에 참여했으나 어용노조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다. 잠정합의안이 나오는 날까지 입을 닫았다. 엉망진창의 합의였다. 우리는 부결하자고 선전했다. 결과는 반대 212 대 찬성 138, 큰 차이로 부결됐다.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어용노조는 부결된 안을 그대로 회사와 합의했다. 어용노조 조합원 일부가 탈퇴했다. 2018년 임단투를 겪으며 또 하나의 경험을 쌓았다. KEC지회는 오늘도 조직하고 투쟁하며 민주노조의 주춧돌을 하나씩 쌓는다.

 

노조파괴 장례식, 다시 맞은 공장폐업 반대투쟁

 

노조파괴 10년이다. 회사는 창사 50년이다. 자본은 50년 중 10년을 공장 망치는 노조파괴에 올인했다. 저들은 용역폭력과 직장폐쇄, 해고와 구속, 어용노조와 정리해고, 손배와 폐업까지 한순간도 파괴를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끝을 봐야 한다.

 

지회는 814일 노조파괴 끝장투쟁 선포식을 열었다. 조합원들은 파업으로 힘을 모았다. 5년 만에 정문에 천막을 다시 세웠다.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어용노조 해체, 손배 해결, 해고자 복직을 결의했다.

 

KEC 자본은 99일 창사 5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공장 땅에 대형쇼핑몰을 짓는 구조고도화 재추진을 공식화할 예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 노조파괴 장례식을 치른다. 피눈물로 견뎌온 10년의 고통을 끝장내기 위해 노조파괴라는 괴물을 우리 손으로 장사 지낸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조합원들과 함께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다. 노조파괴를 끝내고 공장폐업에 맞선 투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동지들의 연대를 호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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