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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헝가리의 ‘노예법’과 유람선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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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482회 2019-06-0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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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물길을 따라 유람선들이 몰려 다니며 언제든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이다.

 

 

529일 밤 헝가리에서 발생한 유람선 참사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사확인조차 안 되는 상황이다. 현지인들도 함께 안타까워하며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함께 겪어온 우리에겐 더욱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헝가리 현지에선 이미 명백한 인재(人災)’라거나 예견된 사고라는 주장이 나온다고 한다. 관광사업으로 돈을 벌기 위해 수십 개의 업체들이 수백 척의 유람선을 운행하고, 야간에도 평균 70여 척의 배가 동시에 다뉴브강에 떠다녔다.

 

그 많은 배들의 상태도 좋지 않다. 이번에 사고가 난 허블레아니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 후인 1949년에 건조된 배다. 선령이 70년이나 됐다.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게다가 관광객들의 증언에 따르면 구명조끼나 다른 구명장비를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사례도 많다.

 

물론 반론도 있다. 사고가 난 허블레아니호가 낡긴 했지만 수시로 노후 부위를 교체하고 점검을 받아 문제 없다고 판정 받았으며, 최대 승선인원인 80명에 맞춰 80개의 구명조끼와 다른 구명장비도 비치돼 있었고, 선장은 경력 24년의 베테랑인데다, 허블레아니호가 사고를 일으킨 게 아니라 다른 배에 추돌당한 사례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더 커진다. 도대체 사고는 왜 일어난 것인가?

 

헝가리판 자본가 살리기

 

참사가 일어난 529일 밤. 다뉴브강은 며칠간 내린 많은 비로 수위가 높아졌고 유속도 아주 빨랐다. 당일에도 폭우가 내려 영업을 중단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유람선 갑판은 미끌거렸다. 그런데도 허블레아니호를 비롯한 많은 유람선들이 별 일 없다는 듯이 영업을 강행했다.

 

강폭이 좁아, 날씨가 좋을 때에도 소형 유람선과 대형 유람선이 뒤섞여 서로 교통상황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비까지 내려 어려움이 더 커졌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형 유람선 바이킹시긴호가 작은 배인 허블레아니호를 무리하게 추월하려다 추돌사고가 일어났다.

 

처음부터 다뉴브강이 이렇게 번잡하진 않았을 것이다. 소형 유람선 위주로 조성된 관광상품이 인기를 끌자 대기업들이 뛰어들면서 대형 유람선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불황으로 곤란한 처지에 있던 자본가들이 관광사업으로 재미를 보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다뉴브강을 난장판으로 만들어갔다.

 

그래서 현지에서도 위험에 대한 경고가 나왔다. 관광산업을 규제하거나 적어도 유람선 야간운행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아무런 규제를 하지 않았다.

 

노예법

 

그런데다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적절한 노동조건도 보장되지 않았다. 경제위기를 긴축과 노동개악으로 돌파하며 자본가 살리기에 나선 헝가리 오르반 정권은 올해 1월부터 연장근로시간을 연간 250시간에서 400시간으로 늘리고 연장근로수당 지급을 3년간 유예할 수 있도록 노동법을 개악했다. 단체협상과 노조를 무력화하는 조항도 함께 포함됐다.

 

오르반 정권은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려는 사람들을 위해 어리석은 행정적 규제를 없앤 것이라며 이를 정당화했다. “52시간 근무제를 강행하며 더 일할 수 있고 더 일하고 싶어 하는 버스기사들을 억지로 집으로 보내더니운운하며 노동시간 단축요구를 비난하던 자유한국당 입장과 꼭 닮았다.

 

노예법아래에서 어떤 유람선 노동자는 하루에 15시간씩 일주일에 7일하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는 내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다고 증언했는데, 결국 더 이상 못하겠다며 22일만에 일을 그만뒀다. 그러고나서 받은 임금은 시급 5,300원 수준이었다.(“유럽 크루즈업계, 저임·장시간 노동에 시즌 시작되면 두세 달 만에 인력 절반 그만둬”, 62일자 <경향신문>)

 

이런 극악한 노동조건이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만성적인 인력부족, 최악의 노동강도, 그에 따른 높은 이직률 속에서 유람선 노동자들은 안전을 돌아볼 여력을 가질 수 없다. 위험에 대처할 여력도 박탈당한다. 불행한 사고가 일어날 환경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여행사들의 경쟁

 

여기에 기름을 부은 건 국내 여행사들의 경쟁이다. 더 많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은 경쟁적으로 저가 여행상품을 풀었다. 그러면서도 이윤을 챙겨가기 위해 어디서나 많이 볼 수 있는 하청에 재하청구조가 만들어졌다.

 

국내 여행사들은 헝가리 현지 협력업체(이른바 랜드사)와 계약하고, 이들이 다시 현지 유람선 업체와 계약한다. 국내 소비자들은 몇 단계의 사슬을 거쳐 유람선에 타게 되는데, 그 각각의 단계마다 업체들은 서로 경쟁을 벌이고, 이윤을 확보하기 위한 비용절감을 시도한다. 그렇게 탄생한 저가 여행상품은 종종 가장 저렴한 숙소와 형편 없는 식당과 위험한 교통수단으로 구성된다.

 

이번 참사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드러났다. 여행사와 협력업체는 계약을 취소하면 유람선 업체에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소비자에게도 환불을 해야 하니,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유람선 일정을 무리하게 강행해야 했을 것이다. 애초부터 원가절감을 위해 안전장비나 안전요원을 제대로 배치할 수 없는 수준의 저가 관광상품이었다


유람선 업체들도 더 많이 벌기 위해당연하다는 듯이 배를 띄웠다. 노예법 아래에서 혹사당하는 유람선 노동자들은 승객의 안전보다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운행스케줄을 맞추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생명보다 돈이 먼저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 일부 언론에선 사망자 보험금 최대 1억 원따위의 역겨운 보도를 쏟아냈다. 모든 걸 돈의 문제로 치환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실종자 수색도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유람선들은 번잡한 운행을 재개했다. 똑같은 여행사들과 협력업체들과 유람선 업체들이 더 많이 벌기 위해관광객들을 빨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여가를 누리는 데서조차 다음 희생자가 누가 될지 모르는 도박을 해야 하는가?

 

해결의 실마리는 분명히 있다. 올해 1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선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오르반 정권의 노동개악을 노예법이라고 불렀다. 시위에 나선 노동자들은 우리는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살고, 저들은 성에서 산다고 외쳤다.

 

자본가들의 부의 성채를 짓기 위해 노동자가 쥐어짜이고, 이 때문에 모두의 생명과 안전이 위태로워진다는 걸 이해한 노동자들은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목소리가 더욱더 커질수록 우리에게 위험을 강요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도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투쟁하는 노동자가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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