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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항쟁 30주기: 노동자계급이 이어가야 할 투쟁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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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549회 2019-06-0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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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광장에 몰려 나온 노동자들. 5.18 광주항쟁으로부터 정확히 9년 뒤인 1989518일의 장면이다.

 


30년 전 중국 톈안먼광장은 피로 물들었다. 마치 한국의 군사독재세력이 5.18 광주항쟁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쳤던 것처럼, 중국 지배계급은 톈안먼광장에 흐른 피를 씻어내고 감추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당장에는 그런 은폐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자본주의가 팽창하는 만큼 노동자계급도 성장해왔다.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노동자투쟁의 새로운 물결이 조성되고 있다. 중국 지배계급은 이 새로운 물결이 권력과 체제를 겨냥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지배계급이 영원토록 노동자들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을 수 있겠는가. 노동자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30년 전 톈안먼광장에서 결사항전의 정신을 보여준 투쟁의 기억을 계승해야 한다.

 

1989

 

1989년 중국에는 이미 상당한 불만의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1987년 이후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실업률도 올라가면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추락했다. 맹렬하게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그 정점에서 재산과 특권을 불려가던 부패 관료집단을 향한 정치적 불만도 점차 고조됐다.

 

이런 불만 때문에 곧장 급진적 대안이 떠오른 건 아니다. 장차 목숨을 건 항쟁에 뛰어들게 될 사람들은 오히려 중국 지배계급 내부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후야오방(胡耀邦) 같은 민주적, 개혁적 이미지를 지닌 인물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자신들의 고통과 불안이 해소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후야오방은 곧 중국공산당 안에서 견제대상이 됐고,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힌 채 축출됐다. 1989415일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의 집회와 시위가 시작됐다.

 

불길이 일어나다


빈부격차와 정치부패에 대한 대중의 인내심이 이미 상당히 고갈됐기 때문에, 후야오방의 사망은 자연스럽게 정부를 향한 정치적 규탄의 계기가 됐다. 당 간부들의 재산을 공개하라거나 자유로운 신문 발행을 허용하라는 구호도 나왔다.

 

시위 참가자들은 민주주의 쟁취’, ‘독재 타도같은 요구를 외쳤다. 중국 정부는 이 시위를 반혁명폭란으로 규정했다. 이런 태도가 오히려 투쟁에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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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가득 메운 투쟁의 물결

 


5월로 넘어가면서 톈안먼광장에 모인 대학생들이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520일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고 나와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아직 진압명령을 받지 않은 군인들은 시위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위대는 군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학살극


64일 새벽, 중국 정부는 진압명령을 내렸다. 덩샤오핑이 선택한 방식은 대량학살이었다. 리펑 총리에게 무력 진압을 명령하면서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해산을 거부하던 시위대는 탱크에 짓뭉개졌다. 기관총이 난사됐다. 톈안먼광장뿐만 아니라 베이징 도처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1,000명 넘게 살해당했지만 정부는 정확한 숫자를 지금껏 공개하지 않고 있다. 64일 이후 수만 명이 체포됐고, 수백 명이 처형됐다.

 

1980년 광주에서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려 했던 시민군이 자신의 결말을 예감했듯이, 마지막까지 해산에 저항했던 베이징의 시위대도 자신의 결말을 예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처럼 살아갈 순 없다는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마음으로 투쟁에 나섰다. 학살의 위협이 그들을 멈춰 세울 순 없었다. 중국 지배계급이 광장과 거리의 핏자국을 닦아낼 순 있지만, 저 거대한 항쟁의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을 것이다.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중국 지배계급은 왜 학살극을 벌이기로 결정했을까? 뒤집어 보면, 그렇게 하지 않고선 자신들의 권력을 지탱하기 어려울 거라는 두려움에 그만큼 강력하게 사로잡혔다는 것 아닌가?

 

빠른 기세로 운동이 확산되면서 중국 정부는 통제력을 잃어갔다. 처음 시위를 주도했던 대학생들은 온건한 편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강경한 세력이 힘을 키웠다. 단식투쟁을 벌이며 대학생들이 조금씩 지쳐갈 무렵에 젊은 노동자들, 청년 실업자들, 청소년들이 운동으로 밀고 들어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다른 지방에서도 투쟁에 합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몰려들었고, 베이징뿐만 아니라 100개 이상의 도시에서 투쟁이 벌어졌다. ‘폭정을 타도하자!’는 구호는 정권을 직접 겨냥했다. 철도가 봉쇄되기도 했으며, 총파업을 호소하는 주장도 나돌았다.

 

새롭게 탄생한 노동자자치연합은 중국 노동자계급이 관제노조의 굴레를 깨고 독립적으로 결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당시 노동자자치연합을 건설한 노동자들은 이후에도 관제노조와 정부의 통제에 속박되지 않는 자주적인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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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오토바이 행진을 연상시키는 시위행렬

 


결전을 피할 수 없는 시점


반면 중국 지배계급은 대중의 요구를 들어줄 수도 없었다. 아래로부터 불만과 항의를 유발한 물가폭등과 실업난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빈부격차와 부패를 제거한다는 건 이윤과 특권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지배체제를 포기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강경진압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분열됐다. 군부대 투입을 거부한 일부 장교는 서둘러 축출, 교체됐다. 게다가 동원된 병사들이 시위대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순 없었을 것이다. 피지배계급이 지금 이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느낀 것 이상으로, 지배계급 역시 현상유지는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이것이 모든 혁명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중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혁명의 가능성이 항상 현실성으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가장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이 투쟁을 누가 어디로 어떻게 밀어갈 것인가에 관한 명확한 전망과 조직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학생들은 정부가 대량학살을 벌일 리 없다는 환상에 갇힌 채, 단지 정부에 압력을 넣는 정도에서 멈추려 했다. 이제 갓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 노동자들 역시 운동을 주도해나갈 만큼 정치적으로 훈련되지 못했다.


미래를 위한 기억


여기에 비극의 원천이 있었다. 결전을 치러야 하는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왔지만,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오직 한 쪽만이, 즉 지배계급만이 그 사실을 냉정하게 직시했다. 먼저 현실을 직시한 중국 지배계급은 대중에게 공포심을 불어넣고 운동을 붕괴시키기 위해 강력한 타격을 준비했다.

 

현상유지도 불가능하고 결전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했던 투쟁대열은 저항의 정신과 씨앗만을 남긴 채 스러져갔다. 중국 지배계급은 당분간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당분간일 뿐이다. 이미 중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정권을 대리하는 관제노조 대신 스스로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민주노조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국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지금 이대로 살아갈 순 없다고 느끼며 항쟁에 나서야 할 시간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도래한다고 해서 모든 게 잘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톈안먼항쟁의 교훈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시기 운동에 결여됐던 것을 채워 넣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교훈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자본가 살리기를 위해 노동개악을 밀어붙이는 정권과 자본의 공격 앞에 현상유지도 불가능하고, 장차 결전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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