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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무기로 사용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 ILO 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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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조회 6,649회 2019-02-2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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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사는 나라를 운운하며 조속한 ILO 협약 비준을 공언했던 문재인 정부는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사진_청와대) 

 

 

ILO(국제노동기구)는 정확히 말하면 국제 노사정 기구다. ILO 총회는 회원국의 3배수로 구성된다. 나라마다 정부, 사용자단체, 노동자단체에 각 1표씩 주어지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자단체의 경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번갈아 대표권을 행사한다.

 

다시 말해 ILO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정부도 모두 자신의 목적과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기구라는 것이다. 아니, 자본가들도 ILO 협약을 활용한다는 말인가? 사실이다. 한국이 EU와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에 따르면 조속한 시일 내에 ILO 협약을 비준해야 한다. 그렇다면 EU는 한국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에 그토록 관심이 많다는 얘기일까?

 

국제무역에서 자본가들은 노동기본권 박탈을 문제 삼아 상대국의 노동비용 상승을 유도하려 한다. 미국의 트럼프도 멕시코와 무역협정 과정에서 멕시코 노동자의 획기적인 임금인상을 조건으로 내걸지 않았던가. 수출경쟁력을 높여 자신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국제노동기준도 활용하는 게 자본가들이다.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30년 전의 고민

 

30년 전의 민주노조운동 역시 고민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갑자기 북한이 종전까지의 태도를 바꿔 남북한 UN 동시가입 가능성을 얘기하고,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가 UN 가입 직후 ILO 가입으로 직행할 때 도대체 그 정세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 것인지 말이다.

 

노태우 정권과 자본가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전교조(1989)와 전노협(1990)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반노동 정권으로 낙인찍힌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 그리고 UNILO 가입을 통해 국제무역에서 경제 강국들을 상대로 수출 길을 뚫는 등의 이익을 누리는 것이다.

 

만일 30년 전의 민주노조운동이 노태우의 ILO 가입 추진을 군사독재의 추악한 음모로 규정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1991년 전노협 중심으로 모든 민주노조운동 세력이 총단결한 ILO공대위가 건설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전노협과 ILO공대위는 한편으로 노태우 정권의 극악한 노동탄압 실상을 폭로하면서 ILO 협약과 기구를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99112, 노태우 정권이 ILO 헌장 국회 비준을 거쳐 가입절차를 마무리하자, ILO공대위는 복수노조 금지, 공무원·교원 단결권 박탈, 정치활동 금지 등을 근거로 한국 정부를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에 제소하게 된다. 1년 남짓 조사와 심의를 마친 ILO는 이사회를 거쳐 19932월에 한국 정부에 권고를 하게 되는데, 권고 내용은 ILO공대위가 제소한 그대로를 담고 있었다.

 

이 사건은 노태우 정권이 불법화시킨 전노협이 정당성과 대표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ILO공대위는 1994년 민주노조운동의 총결집체인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게 되며, 이 조직은 1995년 말에 민주노총 결성의 모태가 된다. 1995년까지 민주노조운동은 3차례의 ILO 제소를 모두 성과로 만들어냈다.

 

1996년 정세와 닮음꼴: 2019년 경사노위 논의

 

결국 민주노총 건설 직후인 19964, 김영삼 정권은 ()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며 노동기본권을 국제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밝힌다. 지금 경사노위에서 ILO 협약 비준과 노동법 개정을 논의하는 기구와 거의 유사한 이름의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노사정 논의가 시작된다.

 

그 이후 역사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국제노동기준을 적용한다는 약속은 점차 사라지고 사용자 요구도 논의해야 한다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탄력근로제) 도입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무노동 무임금 파업 시 대체근로 허용을 들이밀었고, 결국 이 내용대로 국회 날치기 통과를 강행하게 된다.

 

역사의 반복일까. 2019년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한 전개과정이다. 문재인 정권은 대선에서 ILO 협약 비준을 공약했다. 공약을 그냥 이행하면 되는데 굳이 사회적 대화를 하자며 경사노위 논의에 붙여 버렸다. 그러자 정권과 자본은 자유한국당 문턱을 넘어 국회를 통과하려면 사용자 요구도 일부 들어줘야 한다며 슬그머니 자본의 요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 요구들이 무엇이던가? 1996년 날치기 통과된 탄력근로제(변형근로제) 기간 확대 문제를 먼저 해결해 준 문재인 정권은 이제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확대 파업 시 대체근로 전면 허용 등 자본가들의 소원을 해결해주려 한다. ILO 협약 비준과 이 사안을 맞바꾸기 거래하자는 것이다.

 

다시 도래한 노동법 개악 정세,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의 활동가, 간부들이 ILO 협약 비준이라는 의제를 어렵게 느끼곤 한다. 안타깝게도 민주노총을 비롯해 공식 노동조합 체계에서 제대로 교육, 토론조차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특별한 교육자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길어봐야 A4 두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조합원들에게 나눠주고 읽기만 해도 된다.

 

1991ILO공대위의 경험을 돌아보자.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ILO 관련 전문가도 없고 서적도 구하기 힘들었던 당시에 ILO 제소는 물론이고 제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권고까지 끌어냈다. 지금 들어도 생소한 ‘35호 철폐’(복수노조를 금지한 당시 노조법 35호 폐지)는 대중적 슬로건이 될 수 있었다.

 

평범한 조합원들도 ILO 가입과 협약 비준이 왜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고, 현장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제3자 개입금지와 정치활동 금지조항 철폐를 위해 ILO 협약을 활용해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졌다. 이러한 전통과 저력은 1996년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공세 시절에도 이어졌다.

 

곳곳에서 정리해고, 변형근로, 무노동무임금에 대한 교육자료가 쏟아졌고, 쉬는 시간마다 현장 노동자들의 토론이 이어졌다. 김영삼이 끝내 노동악법을 통과시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쉼 없이 고민하고 토론했다. 1996~97년 민주노총의 역사적 총파업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문재인 정권은 ILO 결사의 자유 협약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진정, 제소할 사건들도 무더기로 쌓여 있다. 대리운전노조의 설립 변경신고에 대한 반려 통보 특수고용 노조들의 교섭 요구에 창구단일화 절차부터 가로막히는 현실 간접고용 노조들의 원청 사업주 상대로 한 교섭 거부와 조정신청에 대한 기각, 각하 결정들 기간제 교사노조 설립신고 반려한 사건. 이 모든 것이 ILO 결사의 자유 협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들이다.

 

노사정 사회적 대화와 거래의 대상으로 ILO 협약이 논의될 때, 이 협약은 민주노조운동의 무기가 아니라 덫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정권과 자본가들의 무기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와 거래가 아니라 집단적인 노동자 단결을 위해 활용하기로 마음을 먹으면, 그제서야 비로소 노동자들의 투쟁의 근거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역사는 1991년에서 1996년까지 5년의 역사를 2018~2019년 사이로 압축해 반복 전개되고 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남진 않았지만, 과거의 역사와 교훈을 바로 새긴다면 우리 또한 당시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장 곳곳에서 토론할 재료를 생산 공급하고, 활동가, 간부와 평조합원들을 준비시키며 아래로부터 총파업의 열기를 만들어냈던 역사와 경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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