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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 우리의 페미니즘은 ‘반자본주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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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전해성 조회 51,573회 2018-11-3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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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Our Feminism Must be Anti-Capitalist(2018년 2월 27일자 <레프트보이스> 기사)

http://www.leftvoice.org/Our-Feminism-Must-be-Anti-Capitalist

 

이 기사의 필자인 셀레스테 무리쇼, 안드레아 다트리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빵과 장미’ 회원들이다. ‘빵과 장미’는 중남미의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볼리비아, 칠레,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그리고 유럽의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자! 노동해방>에선 이들의 경험과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몇 편의 글을 번역, 소개할 예정이다. 이 기사는 2017년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시위 직후에 쓰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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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 여성의 날 시위(사진_AP/Alvaro Barrientos)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회주의자는 시각이 좁고, 사회주의자가 아닌 페미니스트에겐 전략이 결여돼 있다.”(루이스 닐랜드, 1914년)

 

 

2017년 3월 8일, 전 세계 여성들이 대도시 중심지를 행진했다. 오랫동안 국제 여성의 날(3월 8일)은 소수 페미니스트 단체나 좌파 단체에게 대체로 상징적인 기념행사 정도에 그쳤다. 이번 국제적인 파업을 향한 호소는 그런 국제 여성의 날의 의미를 되살려냈다. 올해는 수백만 명이 여성의 날을 자신의 날로 선포했다. 그들은 작업장과 학교에서 행동을 조직했고,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 미국에서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50여 개 나라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났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지하철역 그란비아는 행진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완전히 폐쇄됐다. 유럽의 거의 모든 수도에서 이 국제행동에 동참이 이뤄졌다.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는 수천 명이 거리로 나갔으며, 노조총연맹 주도로 6시간 파업이 진행됐다. 

 

미국에서는 1월 21일에 전국 추산 3백만 명이 참여한 기록적인 여성 행진 이후, 3월 8일에는 시위가 급증했고, 이는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오랫동안 사라진 전통을 되살렸다. 

 

페미니스트 조직이나 노동조합, 정당들의 선언문을 읽지 않았더라도, 전 세계 여성들은 성차별적 폭력, 여성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불안정한 노동조건, 여성을 종속시키는 불합리한 불평등, 그리고 여성의 삶을 규정하는 끊임없는 두려움에 대한 분노를 표현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노조관료들이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벌어진 파업에 이러한 분노가 투영됐다. 펩시코 공장에선 새벽 5시부터 파업이 시작됐다. 현재의 노동조합 지도부에 반대하는 현장위원회가 노동자 총회를 소집했고, 거기에서 이뤄진 투표를 바탕으로 결행한 파업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선 라탐항공(남미 최대의 항공사) 노동자들이 체크인 서비스를 중단했다. 역시 노동조합 지도부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조직한 총회를 거쳐 추진된 파업이었다. 

 

사회주의 여성조직인 ‘빵과 장미’의 활동은 이들 두 파업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데 일부가 됐고, 다른 남성 여성 노동자들의 활동과 더불어 3월 8일 파업을 조직하는 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부분파업과 시위가 있었다. 교사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여러 교사 노조들이 정부와의 투쟁 한복판에서 파업에 복무하도록 밀어붙였다.

 

법 앞의 평등이 실제 삶에서의 평등을 뜻하진 않는다

 

3월 8일 대중시위와 투쟁이 재개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성은 이미 평등을 얻었다면서 이런 시위를 비판한다. 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자본주의 위기와 함께 긴축조치와 재정삭감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이미 쟁취한 권리(적어도 제국주의 나라들과 우루과이 같은 몇몇 반식민지 나라에선 낙태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와 여성 다수의 실질적 조건 사이의 모순이 깊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러한 경제적 현실은 국가와 제도가 공모한 끊임없는 성차별적 폭력과 뒤섞인다. 

 

그러나 권리가 확장되면서 수백만 여성이 눈을 떴으며, 더 나은 삶을 향한 열망도 커졌다. 여성을 속박하는 가혹한 현실이 분노의 감정에 불을 붙였다.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를 거친 뒤, 경제위기와 그것의 모든 사회적 결과는 “법 앞의 평등이 곧 실제 삶에서의 평등을 뜻하진 않는다”는 점을 점점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3월 8일의 거대한 시위는 하룻밤 사이에 나타난 게 아니다. 그에 앞서 최근 전 세계에서 행동이 조직됐다. 아르헨티나에선 여성 살해에 맞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국가가 재정을 투입하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엄청나게 큰 ‘더 이상 죽이지 마라’ 시위가 있었다. 성별 임금격차에 맞서 아이슬란드와 프랑스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폴란드에선 수십만 명의 여성들이 장대비 속에서 시위를 벌여 더 이상 낙태를 범죄화하지 못하게 했다. 미국에선 트럼프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투쟁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광범한 지지를 끌어내고 있다. 이는 이러한 투쟁이 단지 여성의 권리를 위한 요구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과 정부가 그들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 노동자에게 위기의 대가를 지불하도록 강제하는 긴축과 재정삭감, 그리고 불안정한 노동조건을 향한 수백만 노동자와 학생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는 증거다. 노동자와 학생의 단결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데 필수적인 동맹의 씨앗이다. 

 

투쟁 없이 쟁취 없다

 

이런 여성운동의 새로운 물결은 수십 년간 이어진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주도권과 단절하면서 그 성격에서 국제적이고 더 급진적이다. 지난 시절에는, 자본가 민주주의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이미 쟁취한 권리를 오직 소수의 여성들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해방의 지표로 여기는 게 상식처럼 받아들여졌다.

 

탈정치화된, 그리고 탈정치화시키는 이런 프레임에 따르면, 여성해방은 단순히 기존 정치체제 내에서 점진적으로 권리를 얻는 문제에 그친다. 일단 이런 권리가 법으로 만들어지면, 각각의 여성들은 그녀가 살아가겠다고 ‘선택’한 삶에 대해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이런 개량주의 논리는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과 사회 경제 체제에 맞선 투쟁을 분리시킨다는 결함이 있다. 개량주의 페미니즘은, 성차별을 이용해 자신을 유지하고 이익을 끌어내는 자본주의 구조에 의문을 갖지 않은 채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에서의 권리를 위해 싸움으로서, 여성의 종속을 낳고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이 체제를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승인한다. 

 

이런 ‘페미니즘’은 이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가 사회체제 안에서 제한적이고, 유동적이며, 일시적인 방식으로 다뤄진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권리 대부분이 제국주의 나라들의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지 않은 시점에 확보됐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번영이 이뤄질 때 자본가정부는 한 손으로 뭔가를 내준다. 위기가 닥칠 때 그들은 다른 손으로 그걸 거둬간다.

 

의회에 기웃거리는 방식으로 여성의 요구를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순 없다. 그런 방식은 운동의 여러 부문에서 출세주의자를 위한 길을 열어줄 뿐이다. 오히려 여전히 묵살되고 있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 같은) 기본적인 권리와, 기생적인 자본가계급에 의한 착취체제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이 운동은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다른 피억압자들의 사회운동에서처럼, 자유주의적 논의는 페미니즘을 전혀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변형시켰고, 그 결과 우익들까지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운동에서 사회에 대한 더 깊이 있는 비판정신을 걷어냈고, 우익 여성들에게 문을 열어줬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가 ‘보수적 페미니즘’의 대표로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어떤 수렁에 빠져 있는지 보여준다. 지배계급 일부는 여성, 소수 민족 및 성 소수자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럼없이 주장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선거에서 자신을 드러낸 방식이 바로 이런 것이었고, 이는 제국주의 페미니즘 또는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의 명백한 사례다.

 

하지만 클린턴은 선거에서 다수 여성에게 유리천장을 깨고 오늘날 여성혐오의 전형인 공화당 후보에 맞설 효과적인 대안으로 자신에게 투표하라고 설득하지 못했다. 클린턴의 기업 페미니즘(상류층 백인 여성 중심의 자본주의적 페미니즘)은 수백만의 임금노동자, 실업자, 흑인, 이주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 앞에서 완전히 실패했다.

 

지금 민주당은 선거에서 패배한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재등장한 여성운동을 이용하려고 한다. 미국에서 국제 여성의 날 파업을 조직하려 했던 많은 여성들이 이 거대한 운동을 자기 자산으로 삼으려는 민주당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민주당은 거대한 선거 패배 이후에 자신을 재건하기를 희망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여성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요소를 제어하려 시도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신자유주의 페미니즘

 

가장 주요한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미국은 IMF와 세계은행을 이용해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 그에 상응하는 여성에 대한 보건, 교육, 사회복지 정책을 부과함으로써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수출했다. 이들 국제기구들이 수많은 반식민지 나라 정부를 향해 여성 관련 부처를 만들라고 요구했다. 심지어 그들은 성차별적 폭력을 종식시킬 법의 제정을 재촉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여성이 처해 있는 불안정한 처지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본주의 국가가 발을 뺄 수 있게 해줬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멕시코에 있다. 성차별적 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수많은 법이 통과됐는데도, 멕시코 국가는 여성, 특히 국경에 있는 노동자들과 미국으로 넘어가려는 중앙아메리카 이주민들에 대한 폭력에 지속적으로 연루되고 있다.

 

또한 미국은 국제적인 비영리단체 활동과 미국 대학들의 학술작업 수출을 통해 자유주의 페미니즘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쟈코뱅>의 엘러 매허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이 성장하면서 맞서야 할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좌파 페미니즘 세계에선 자명한 것이 됐다. 이보다 덜 자주 언급되는 건 이 기업 페미니즘의 성격과 기원이다.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부흥하게 된 핵심 촉매제는 1980년대 이래 좌파적 정치대안이 서서히 질식해 갔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트럼프에 대항할 능력이 없다는 약점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클린턴의 패배가 야기한 논란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미 평등에 도달했다는 신화에 맞서는 최근의 전 세계 여성운동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점점 더 의문이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 부유층 여성들만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99%의 페미니즘’을 세워내자는 호소는 다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으로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유착관계를 주목하는 방향으로 의식이 바뀌고 있다는 징후다.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려면 자본주의에 맞서야 한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여성운동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의욕적으로 되살리려는 흐름이 있다는 건 새로운 여성운동 내부에서 반자본주의 세력을 강화시켜 줄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와 유사하게 아르헨티나, 칠레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여성운동 집회에서, 그들의 선언문과 그들의 투쟁에서 반자본주의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반자본주의에 관한 논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에 대항해서 어떤 전략과 정치강령을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유익한 논쟁의 문을 열어 줬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해방을 향한 투쟁을 위해 맺어야 할 동맹에 대해,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그런 과제에 착수할 수 있도록 어떻게 결집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상상해보면서 우리는 누가 정치의 주체인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의 압도 다수를 이루는 노동자계급의 절반인 여성 노동자들을 빼놓는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수자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한 줌 자본가들의 권리에 적대적이다. 더욱이,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 속에서 노동자계급(남성과 여성 모두)이 해방의 깃발을 휘날리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란 단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은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여성들은 투표권을 쟁취할 수 있었고,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싸웠다. 볼셰비키는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도움으로써 그때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여성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소련에 존재했던 수많은 권리는 지금도 많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쟁취되지 못한 것들이다.

 

그 이후로 노동자계급과 여성 간의 이러한 동맹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지배계급이, 노동자계급을 노사협조주의에 빠뜨린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이, 국가기구로 넘어간 사회운동가들이, 비영리단체들의 탈정치적 분열이 그렇게 만들었다.

 

진정한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을 재건하는 데서 핵심 과제는 노동자계급과 여성운동의 역사적인 동맹을 다시 세워내는 것이다. 상품 생산과 유통, 서비스산업과 통신산업을 실제로 멈췄을 때, 그 때 비로소 더욱더 불안정하고 주변부로 내몰린 사람들, 예컨대 개별 가정에 유폐된 주부들, 성매매 여성들, 그리고 이 수치스러운 체제에서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메아리치게 할 수 있다. 이런 동맹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가 그것을 건설해야 한다.

 

이 동맹을 만드는 건 노동자계급 내의 성차별을 못 본 체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부 좌파는 노동자들의 편견(언론이나 학교처럼 지배계급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는 기구들을 이용해 조장한 이데올로기)에 맞서기를 회피한다. 또한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서기를 거부한다. 여성 억압이란 문제는 단지 자본주의적 착취의 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근거를 대면서 말이다. 동시에, 이런 종류의 계급 환원론은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들과 심지어 좌파 투사들까지도 성차별의 재생산 문제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선언한다. 펩시코 공장과 라탐항공의 사례처럼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의 최전선에 선다면, 이는 노동자계급 내의 성차별에 맞선 투쟁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의 성차별에 맞선 투쟁에서도 더 나은 조건을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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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에 앞장선 아르헨티나 펩시코 공장 여성 노동자들

 

 

또한 계급 환원론에 맞선다고 해서, 성차별에 대한 개인주의적 관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또 다른 극단으로 몰아가선 안 된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언어적 괴롭힘과, 여성에 대한 국가권력의 공격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노동대중 속에서 문화적 투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와 지배계급에 맞서 싸워야 할 문제를 혼동하지 않는다.)

 

여성운동이 1970년대의 경험처럼 끝나버리지 않기 위해 취해야 할 경로에 관한 논쟁이 있어왔다. 전 세계에서 나타난 여성들의 대규모 운동은 이런 논쟁에 새로운 시의적절함을 부여한다. 과거의 운동은 모순된 방식으로 부분적인 승리와 권리의 확장을 낳았다. 그 이면에서 이 운동은 길들여졌고, 자본가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사상은 파묻혀 버렸다. 최근의 운동이 다음과 같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의 목표는 우익의 공격에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걸 넘어설 수 없는가? 아니면 승리하기 위한 전략을 마침내 세워낼 것인가?

 

이 기사의 필자들이 속해 있는 국제 여성조직 ‘빵과 장미’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볼리비아, 칠레, 우루과이, 멕시코, 베네수엘라, 스페인, 프랑스, 독일에서 활동한다. 그 조직은 사회주의 관점으로 작업장, 학교, 대학에서 이러한 새로운 여성운동을 세워내며 활발하게 운동에 개입하고 있다. 우리는 이 여성운동이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런 동맹이 갖고 있는 혁명적 잠재력의 사례를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한다.(관련 기사: 현실 속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아르헨티나 <빵과 장미>의 경험에서 배운다)

 

우리의 견해, 전략, 강령은 이전 세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배운 축적된 교훈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대중의 정치운동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을 믿는다. 오직 그 속에서만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위한 투쟁은 다수 대중을 착취하며 비참하게 만드는 이 체제에 대한 맹렬한 규탄과 연결될 수 있다. 오직 이 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운동만이 진정으로 해방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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