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정치

노동기본권도 할인이 되나요?

페이지 정보

오민규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조회 5,803회 2018-10-15 21:59

본문

   

2178b6f8f1326c7921f4c349c1fa6c11_1539608298_9169.jpeg
“이봐, 내가 원조라구!” 그리고 그 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우리는 기억한다.

 

 

“노동기본권을 국제기준 수준으로 보장하기 위해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시작하자.” 

 

문재인 정부의 얘기일까? 원조는 따로 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6년 4월, 김영삼 정부가 ‘신(新)노사관계 구상’을 선언하고 대통령 직속으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약칭 노개위)’를 설치할 때 했던 얘기다. 문재인은 김영삼의 어법을 토씨 하나까지 똑같이 베끼고 있다.

 

문재인은 김영삼의 방식을 따라 노사정대표자회의 산하에 ‘노사관계 제도·관행개선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ILO 핵심협약 비준 등 노동법을 국제기준으로 맞춘다는 표면적인 목표도 똑같고, 놀랍게도 ‘노개위’라는 약칭까지 똑같다.

 

10월 12일, 이 위원회에 노사정 합의를 위한 ‘공익위원 안’이 제출됐다. 제출된 안에 따르면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협력을 약속함과 함께, 단결권과 단체행동 및 쟁의행위 관련 11가지 입법과제가 정리돼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어처구니없는 문구로 가득 차 있다.


현찰 없이 어음만 가득한 이른바 ‘공익위원 안’


공익위원 안은 ILO 핵심협약, 그 중에서도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제87호 및 제98호 협약 비준에 적극 협력한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우선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 ‘단결권에 관한 입법사항’ 6가지를 먼저 살펴보자.

 

▴ 교원·공무원 단결권(6항)은 ‘원칙적으로 국제노동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보장’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여기에 왜 ‘원칙적으로’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것일까? 그렇다. 특수한 상황과 현실에서는 보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 현행 노조설립신고제도(4항)에 대해서는 ‘행정관청 개입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수준이 최소화일까? 모호하기 짝이 없다. ILO 협약에 따르면 노조설립은 온전히 노동자 자율에 맡기라는 것이다. 즉, 행정관청 개입을 모조리 배제하라는 것인데, ‘최소화’라니?

 

▴ 전임자임금지급 금지제도(5항)는 국제기준에 부합하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자고 한다. ILO가 규정한 국제기준은 무엇인가. 전임자 임금지급은 오로지 노사자율에 맡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체 한국의 무슨 특수한 현실을 고려하라는 건가!

 

▴ 해고자, 실업자 노조가입 제한(2항)은 관련 조항 삭제를 추진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 조항은 이미 대법원에서 용도폐기가 확정된 것으로, 그동안 정부가 판례에 맞게 행정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 것이다. 국제기준 들먹이기 전에 판례에 맞게 재정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 노동조합 임원자격(3항)은 노조 규약에 맡기되 기업별노조의 경우 재직자로 한정하자고 한다. 노조 가입자격, 임원자격에 대한 ILO의 원칙은 100년 동안 한결같다. 노동조합 규약과 자율에 맡기라는 것. 그런데 여전히 ‘노사관계 현실 고려’ 운운하며 법·제도로 제한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 특수고용 노동자의 단결권(1항)에 대해서는 고용형태 다변화, 법원 판례 변화를 고려해 ‘합리적 방안을 마련한다’고 되어 있다. 이 사항은 민주노총이 ILO 협약 비준과 노조법 개정 과제 중 가장 중시하는 사항인데, ‘법을 개정한다’는 약속조차 담지 않은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들어온 ‘합리적 방안 마련’이란 얘기로 또다시 속이려 하는 것이다!

 

6개의 항목 모두 ‘원칙적으로’ 국제기준 수준으로 보장하되 ‘우리나라 특수한 현실’, ‘법원의 판례 변화’, ‘노사관계 현실’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법을 개정한다는 식의 문구로 정리돼 있다. 문장 곳곳에 온전한 단결권 보장이 되지 않도록 발목을 잡아놓은 것이다.

 

부도어음에다 악성부채까지 떠안으라고?

 

‘공익위원 안’의 전문에 결사의 자유에 대한 ILO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했다면, 당연히 입법안 역시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만 정리돼야 한다. 하지만 11개 입법과제에는 87호, 98호와 아무 관계도 없는 자본가들의 소원수리 사항 다수가 포함됐다.

 

▴ 단체교섭 대상, 단체협약 유효기간, 교섭창구단일화제도(7항) 전반을 ‘합리적으로 개선’한다? 임금, 노동조건만 ‘단체교섭 대상’으로 제한하고, 단협 유효기간을 최장 ‘3년’으로 늘리자는 것이 자본가의 소원 아니었던가! 노동자 요구인 창구단일화제도만 살짝 끼워 넣기로 들어갔을 뿐이다.

 

▴ 쟁의행위 수단·방법·절차, 대체근로, 필수유지업무제도(8항) 역시 ‘합리적으로 개선’하자는데 그 이유가 ‘쟁의행위 대등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란다. ILO 협약의 목표는 ‘노사관계 대등성 확보’에 있지 쟁의행위 대등성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 결국 이 문구는 노동조합 쟁의만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쟁의행위를 폭넓게 인정하고 보호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부당노동행위제도(9항)를 ‘형평성과 실효성의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개선’한다는데, 이 역시 자본가의 부당노동행위만이 아니라 노동조합 부당노동행위를 추가하겠다는 음흉한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 ‘노사관계 범죄화 방지’를 위해 ‘노조법상 형벌규정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잔다. 있는 법도 지키지 않는 자본가들에게 아예 형사상 면책특권까지 보장하잔 말인가!

 

▴ 간접고용근로자의 노동권(11항)은 특수고용 단결권과 똑같이 ‘제도개선 방안을 모색’한다고 한다. 이것 역시 법 개정에 당장 나서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간접고용, 특수고용 등 한국 비정규직의 60~70%를 차지하는 이들의 단결권 보장을 먼 미래로 돌려놓고서, 어찌 국제노동기준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

 

10월 12일 제출된 공익위원 안이 관철된다면 ILO 협약이 규율하고 있는 결사의 자유는 질식과 호흡곤란에 빠지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 것이다. 저 위원회에 민주노총도 참여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참사’조차 막지 못했을까? 그건 ‘결사의 자유’ 즉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을 노사정이 모인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사업장 별로 노사 간에 임금교섭이 벌어진다. 노동조합은 100을 요구하는데 자본가는 10을 제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보통은 10과 100 사이 어디에선가 ‘타협’이 이뤄져 임금투쟁이 종료된다.

 

그러나 노동기본권과 단결권은 이런 종류의 ‘타협’이 불가능하다. 이를테면 노동자 측은 특수고용의 온전한 단결권을 요구하지만, 자본가들은 절대로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특수고용 단결권은 60%만 보장하자’는 식의 타협이 가능한가? ‘간접고용은 노동 3권 중에서 2권만 보장하자’는 협상안이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교원, 공무원에게 제한적으로 노동 2권만 보장함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매년 ILO에서 단골 지적대상이 되지 않았던가!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은 100%가 보장돼야 의미를 갖는 것이지, 60%나 2/3만 보장한다면 의미가 없다. 노사정 모두 한발씩 양보? 임금협상과 달리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에서 그런 논의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노리는 함정

 

22년 전 김영삼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는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을 ‘협상 테이블’에 올려서 민주노총을 끌어들이려 한다. 국제노동기준 수준으로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유혹해 노사정 협상장으로 끌어들인 뒤, 노동자 요구만 의제로 올리면 자본가들이 반발하니 일단 자본가 요구도 의제에 올려 논의는 하도록 하자고 속삭인다. 이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가, 그리고 과거 김영삼 정부가 파놓은 함정이다.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정리해고와 변형근로시간제, 무노동 무임금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제도가 날치기 통과됐다. 김영삼이 약속했던 국제노동기준 준수, 대표적으로 복수노조 허용도, 제3자 개입금지 폐지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직 자본가들이 원했던 것만 관철되고 말았다.

 

22년 뒤인 지금, 민주노총은 또다시 첫 단추부터 잘못 꿰고 말았다. 정부를 상대로 단결권과 노동기본권 쟁취를 향한 계급적 단결과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이 권리를 노사정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에 동의해주고 만 것이다. 협상할 수 없는 기본권, 할인해줄 수 없는 단결권을 의제로 올려 협상을 진행하다니?

 

단결권과 노동기본권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순간, 현찰은 없고 부도어음만 가득한 공익위원들의 제시안은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ILO 협약이 가리키고 있는 가장 중요한 단결권, 노동기본권은 ‘먼 미래의 일’로 유예된다. 단결권,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단결투쟁을 나중의 일로 유예한 대가다.

 

 

 

<가자! 노동해방> 텔레그램 채널을 구독하시면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소식을 스마트폰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텔레그램 검색창에서 가자! 노동해방 또는 t.me/nht2018을 검색해 채널에 들어오시면 됩니다. 페이스북 페이지(노동해방투쟁연대)도 있습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노동해방투쟁연대

텔레그램 채널 가자! 노동해방 또는 t.me/nht2018

유튜브 채널 노해투

이메일 nohaetu@jinbo.net

■ 출력해서 보실 분은 상단에 첨부한 PDF 파일을 누르세요.

■ 기사가 도움이 됐나요?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온라인 정치신문 <가자! 노동해방>을 후원해 주세요!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058-254774 이청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목록

Total 963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로그인
노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