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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획연재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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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8,077회 2018-09-17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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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일자리 구함” - 1930년대 세계대공황 시기의 모습. 인류의 진보를 위해 이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할 시기가 됐다.

 

성장하는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치명적인 모순을 잉태한다. 발전하는 생산력은 사회적 성격을 띠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갈수록 그것과 격렬하게 충돌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모순이다.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을 더 이상 제대로 담을 수 없게 되는데, 이것은 생산력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된다. 장기불황과 공황이 그 단적인 증거다.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 – 공황과 장기불황

 

공황을 살펴보자. 공황의 양상은 어떤 것인가? 수많은 생산설비와 노동력이 쉬는 것이다. 기계는 지금 당장이라도 굉음을 내면서 수많은 생산물을 토해낼 수 있지만, 가동되지 못한다. 수많은 원료가 썩거나 폐기처분되고, 기계는 녹슨다. 엄청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하기를 갈망하지만, 실업자로 떠밀려 생산에서 배제된다. 이것은 명백히 생산(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생산설비 등 생산수단이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노동자가 문제인 것도 아니다. 기계는 스위치만 누르면 바로 가동될 수 있는 상태고, 노동자의 노동능력도 아무 문제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엄청난 생산능력을 파괴하고 있는가? 바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다.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질은 자본-임노동 관계다. 즉 생산수단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이윤을 증대시키기 위해 무산자인 노동자들을 임금노예로 고용해 착취하는 방식으로 생산이 이뤄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관계에서 생산의 목적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가의 이윤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의 유지, 확대, 축소 여부가 결정된다.

 

공황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결국 공황은 다수 자본가들이 생산을 축소시킨 결과 발생한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생산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것이 자신의 이윤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대한 손실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2편과 3편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점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장기불황과 공황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사회의 생산(능)력 발전과 충돌하기 시작했다는 점, 따라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는 이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할 시기가 되었다는 점!”

 

사회적 생산력과 상품

 

이제까지 인류의 보편적 모순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 또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이다. 다만 이 충돌이 도달한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사회체제의 모순과는 구별된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등장하고 발전하며 보편화되는 생산력은 바로 ‘사회적’ 생산력이다. 사회적 생산력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생산이 개인적 필요와 욕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와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결과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이라는 점이 그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상품 교환은 있었지만, 생산물을 대표하는 것이 상품은 아니었다. 주요한 경제활동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예든 농노든, 이들이 수행한 노동의 대부분은 노예주나 봉건영주, 봉건지주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예주나 봉건지주가 덜 탐욕스럽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의 생산(능)력은 너무나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므로 빼앗길 만한 잉여노동 자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노예와 농노가 최소한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제외하면, 나머지 잉여노동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런데 상품으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주로 이 잉여노동시간에서 발생했다. 자신과 가족이 먹고 사는 데 직접 필요한 것들은 결코 상품으로 시장에 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와 농노의 잉여노동에서 발생한 잉여 생산물의 경우에도, 그것의 대부분은 노예주와 봉건영주, 봉건지주의 호의호식을 위해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하는 상품은 사회의 총생산물에서 작은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 즉 ‘교환 자체를 위해 생산하는 생산물’인 ‘상품’이 사회의 총생산물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역사적 발전에 의해 다른 전제조건들이 창출돼야 했다. 

 

기계제 대공업과 집단적 생산

 

우선 생산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해야 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생산하는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서는 잉여생산물이 큰 규모로 발생해야 했다. 그리고 이 잉여생산물은 착취자의 호화 소비 규모를 넘어설 정도로 충분해야 했다. 이렇게 생산능력이 발전해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이 충분하게 발생할 때 시장교환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다음으로 노동분업이 본격화해야 한다. 노동분업이란 각각의 생산자가 생산하는 생산물의 종류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산물은 자기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된다. 자연스레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필수적이게 되고, 그렇게 해서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한다. 

 

이러한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발전 및 노동분업의 본격화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기계제 대공업의 등장이다. 봉건사회 말기에 일어났던 노동분업은 도시 수공업과 농촌 소규모생산 사이의 분업이었다. 소농민들은 식량을 생산하고, 이것의 일부를 도시 수공업자들이 생산한 농업도구들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환이 확대됐지만, 그럼에도 상품으로 교환되는 생산물은 전체 생산물 중 작은 부분이었다.  

 

하지만 기계제 대공업이 도시에서 발전하면서, 이런 상황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생산물을 전적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했다. 그것과 연관된 다양한 새로운 산업부문의 등장(가령 철도)은 사회적 노동분업을 가속화했다. 자급자족적이고 소규모였던 농업생산의 비중은 급속히 줄어들고, 판매 자체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공업생산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다. 

 

그와 함께 생산방식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생산은 소농민이 자기 논과 밭에서 자기 소유의 농업도구를 가지고 가족과 함께 일하는 ‘소생산 방식’과는 질적으로 달라진다. 거대한 공장에서 수백, 수천, 수만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생산하는 집단적 생산방식이 진행된다. 또한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종류의 노동에 종사한다. ‘사업장 내 노동분업’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이것은 내가 생산한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된다. 가령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라면, 이 노동자는 ‘이 자동차는 수천, 수만 명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자동차 조립공장에 부품을 보내는 수십만 부품업체 노동자들, 자동차 차체와 부품에 들어가는 철강을 가공하고, 플라스틱과 오디오, 전선, 페인트를 제공하는 연관 산업의 수백만 노동자도 고려해야 한다. 심지어는 저 철강과 플라스틱의 원료를 공급하는 칠레의 철광석 노동자, 중동의 석유산업 노동자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이것이 진실이다. “이 자동차는 수천만, 수억 세계 노동자의 협력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생산은 집단적 방식으로 이뤄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전 세계적, 사회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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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상품은 사회적 공동노동으로 만들어진다.

 

대규모 시장 

 

한두 명, 기껏해야 몇 명에 의해 수공업적으로 이뤄지던 생산이 기계에 기반한 수백, 수천 노동자의 집단적 생산으로 대체됐다. 기계제 대공업을 통해 집단적 생산이 전면화함으로써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이 일어났다. 수공업 생산에 비한다면 기계제 대공업의 1인당 생산량은 비교 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증대했다. 그것은 ‘대규모 시장’을 요청했다. 우선 기계제 대공업은 엄청난 양의 원료를 필요로 했다. 또한 기계를 만들어내는 자본제 생산분야와 기계를 사용해 생활수단을 만들어내는 소비재 생산분야 사이에 거래가 필요했다. 엄청난 양의 최종생산물 또한 바로 그만큼의 판매처를 요청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장 없이는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기계제 대공업으로 아무리 많은 양을 생산하더라도, 결국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다면 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좁은 지역 사회를 넘어선 전국적 시장교환, 나아가서 세계 차원의 시장거래를 요구했다. 그것은 철도, 트럭, 선박 등을 활용한 신속하고 대규모적인 물류 운수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이것은 몇 십 년 동안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채 창고에 처박혀 있던 와트의 증기기관을 세상에 불러냈다. 이 증기기관을 장착한 철도가 굉음을 울리면서 대륙을 횡단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물류산업이 빠르게 확대되자 이것은 기계제 대공업에 반작용을 가해, 기계제 대공업은 더욱 강하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이렇게 생산과 물류, 시장이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맞물려 들어가면서, 대다수 생산물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빠르게 확립돼갔다. 그 본성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별 국가를 넘어 전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갔다. 생산은 국가적 성격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향해 확장했고, 이것은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세상에 토해냈다.

 

생산력의 사회적 성격의 발전, 이와 충돌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바닷물 한 방울에는 대양의 모든 성분이 포함돼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이 응축돼 있다. 

 

상품은 사회적 생산과 교환의 산물이다. 몇 가지 측면만 살펴도 그 점은 너무나 분명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선 상품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수단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상품은 ‘사회적 사용가치’ 즉 타인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생산된다. 다음으로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투입한 ‘사회적으로 평균적인 노동시간’에 의해 측정된다. 여기서는 ‘주관적 척도’가 아니라, ‘사회적 척도’에 의해 생산자의 노동의 가치가 측정된다. 개별 생산자가 10시간의 노동을 투입했더라도, 만약 이 상품 제작에 투입되는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이것은 평균적인 숙련도와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측정된다)이 9시간이라면, 이 상품은 9시간 어치의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보여주는 것은 노동(생산)의 성격이 ‘사회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물론 상품 생산이 존재하는 모든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노동’이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 생산물 중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낮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 노동은 아직 사회적 성격을 띠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원시공산제의 경우 집단적, 공동체적 노동이 이뤄지기는 했지만, 그것의 범위는 부족 수준의 아주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지 못했다. 게다가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아직 사적 소유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면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기계제 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생산 자체가 이미 ‘개별적 노동’이 아니라 ‘집단적 노동’의 성격을 띤다. 나아가서 생산은 개별 작업장의 수준을 넘어서서, 전 세계 차원의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 이뤄진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이처럼 노동(생산)에 ‘사회적 성격’을 깊이 각인했다.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러 생산력은 비로소 ‘사회적’ 단계에 도달했다. 이것의 표현이 바로 생산물의 대부분이 상품으로 존재하는 사회, 바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탄생이다. 

 

이처럼 생산력은 ‘사회적, 집단적, 세계적 생산력’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고, 또한 그 성격은 갈수록 더욱 강화되지만, 생산관계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우선 ‘소유관계’ 측면에서 보면, 생산은 노동자들의 전 세계적 협동노동을 통해 이뤄지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극소수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장악돼 있다. 이것은 ‘분배관계’를 규정한다. 자본주의 분배관계는 노동자들에게 임금이란 형태로 노동력의 가치만 준 뒤, 나머지 노동은 자본가들이 공짜로 가져가 이윤으로 착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배관계는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갈수록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부의 불평등은 커져만 간다. 결국 사회적 생산력과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분배관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다음으로 충돌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이 토해내는 막대한 생산물을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가 소화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한다. 생산과 소비 사이의 충돌, 바로 그것이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는 소비의 한계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하에서 노동자들이 분배받는 몫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상품 구매량은 빠른 속도로 확대되는 생산량을 결코 쫓아갈 수 없다. 이것은 결국 파국에 이른다. 시장은 팔리지 않는 상품들로 범람해, 불황과 공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멀쩡한 기계와 작업장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생산에 투입되지 못한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가동률을 낮춘다. 자본주의 생산력은 비틀거리고, 쪼그라들면서 후퇴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 분배관계가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을 만큼 웃자란 사회적 생산력은 결국 폐기처분된다. 생산력은 성장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좁은 테두리에 갇히거나 심지어는 파괴된다.

 

다음으로 ‘교환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생산이 이미 사회적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에도, 교환은 시장에서 상품교환을 매개하는 무정부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생산력과 교환관계는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다.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은 생산물 사이의 교환이 계획적으로 잘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한다. 그래야만 전 세계적으로 짜인 거대한 사회적 노동분업망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가령 전 세계적으로 자동차 필요량이 정확히 측정되고, 그에 맞춰 자동차산업 및 연관 산업의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교환관계는 그것을 전적으로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에 내맡겨 버린다. 그 결과 자본주의 생산은 무계획적 방식으로 집행된다. 자동차가 시장에서 얼마나 팔리게 될지, 그에 따라 전반적인 생산계획이 어떻게 짜여야 하는지를 전혀 가늠하지 못한 채 생산이 이뤄진다. 모든 것은 시장에서 교환이 일어난 다음에야, 확인된다. 시장에서 판매되지 않는 상품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한 뒤에야, 자본가들은 생산의 축소를 결정한다. 

 

이처럼 무계획적으로 생산이 이뤄짐으로써 발생하는 낭비는 불가피한 것인가? 시장에서의 상품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교환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생산계획을 짤 수 없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개별 작업장 수준에서는 이미 완전히 계획적인 생산이 이뤄지고 있다. 연간, 월간, 주간, 일간 생산계획표에 따라 생산은 착오 없이 잘 진행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차원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자본가도 자기 회사에서 생산한 상품이 사회적으로 잘 판매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수많은 자본가들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들의 생산을 세계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수단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아무리 뛰어난 자본가일지라도 미래의 시장 상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하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몇 년 후 세계시장에서 자동차가 포화될 거라고 예측하는 자본가는 어떤 전략을 세우는가? “누군가는 과잉생산의 결과 몰락할 것이 분명하다. 무정부적 과잉생산의 대가를 치르는 자는 내가 아니라 경쟁자여야 한다. 자동화, 기계화를 촉진하고 노동강도를 높여 더 값싸게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이 개별 자본가가 내리는 결론이다. 그 결과 예측의 효과는 사라지고, 대신 과잉생산에 따른 파국은 더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 개별 기업 수준의 계획화는 전체 사회 차원에서는 완전한 무계획성으로 둔갑해 버린다. 그것의 결과는 불황과 공황, 거대한 사회적 생산력 파괴와 낭비다.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잔인하게 착취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인류의 진보의 척도인 생산력을 훼손하고 파괴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제 완전히 낡아버린 반동체제다. 

 

종합해보자.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은 ‘성장하는 사회적 생산력’과 ‘낡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교환관계+분배관계)’ 사이의 충돌이다. 이 충돌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노동자계급은 발전하는 사회적 생산력에 걸맞게, 모든 생산수단을 노동자계급의 공동소유, 즉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적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해결한다. 그 결과 사회적 생산력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생산관계가 탄생해, 사회적 생산력을 더욱 고도한 단계로 이행시켜 인류를 진보로 이끌게 된다. 바로 그 사회적 생산관계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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