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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등학교 하교시간 늦춘다고 ‘돌봄 공백’ 막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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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6,282회 2018-09-07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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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기구 중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라는 게 있는 모양이다(이하 ‘저출산위원회’). 저출산 대책을 강구하던 이 위원회에서 지난 8월 28일 한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초등학교 1~4학년 하교시간을 오후 3시로 늦춘다는 방안이다. 

 

‘더 놀이학교’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이 계획은 오후 1시 전후로 하교한 뒤 발생하는 ‘돌봄 공백’을 메움으로써 장기적으로 출산과 자녀양육에 따르는 부담을 줄이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돌봄 공백을 해결하겠다는 ‘의도’를 탓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도 도처에서 벌써부터 반박과 항의가 제기된다.

 

노동자로서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교사들은 항의성명을 발표하거나 관련 토론회에서 저출산위원회의 계획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교시간이 늦춰질 경우 교사들의 노동시간이 길어지고 노동강도가 강화되리라는 점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과 과중한 행정업무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투여하기 어렵다. 그만큼 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육부는 인원 충원은커녕, 오히려 2030년까지 신규임용 인원을 줄이겠다는 ‘중장기 교원 수급계획’을 세워놓았다.

 

게다가 현재 학교 공간이 학생들에게 안전한 휴식과 창조적인 놀이 환경을 온전히 제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충분한 인원 충원과 환경 개선이 따르지 않은 채 하교시간만 늦출 경우,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교육의 질이 하락하는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다.

 

그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노동자들은

 

맞벌이로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들 입장에선, 학교가 자녀들을 몇 시간이라도 더 데리고 있어준다면 조금이라도 돌봄 공백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한계가 너무나 명백하다. 오후 1시에서 3시로 하교시간을 늦춘다 한들, 그 시간에 퇴근해서 자녀를 돌볼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교시간을 늦추는 만큼 학교 돌봄시간도 연장돼 저녁 7시까지 학생들이 학교에 머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이 의미를 가지려면, 노동자들이 (이동시간을 감안해) 저녁 6시면 칼 같이 퇴근할 수 있는 직장에 다녀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초등학생 자녀를 둔 노동자들이 모두 그런 직장을 구하기란 어렵다. 오히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임금삭감으로 이어져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최근 논란과 관련해 ‘실천교육교사모임’에서 전국 초등학생 1,0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초등 1~4학년 학생들이 매일 6교시를 하고 오후 3시에 집에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싫다’는 의견이 78.3%로 나왔다.(‘좋다’는 의견은 10.5%, ‘잘 모르겠다’는 11.2%)

 

‘어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란 주관식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에서 중요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짜증이 난다. 왜 우릴 학교라는 감옥에 가두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학교는 쉬는 시간도 답답합니다.”(8월 26일자 <오마이뉴스>)

 

쉬는 시간까지도 답답한 감옥이라는 말에서, 학생들에게 현재의 학교가 무엇으로 다가오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감옥에서 한두 시간이라도 빨리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저출산위원회가 얼마나 졸속적이고 일방적으로 계획을 밀어붙이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진실은, 하교시간이 3시가 아니라 1시로 유지되더라도, 감옥은 여전히 감옥이라는 점이다. 진짜 문제는 하교시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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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벗어나는 시간(사진_기호일보)

 

돌봄 공백?

 

모두 함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자. 호기심을 채우고 더 키워가며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무척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이건 뭐야?”라고 묻고 또 묻는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어울려 노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에 늦게 들어가 혼날지언정, 땀에 범벅이 되도록 같이 뛰어다니고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렇게 어린이들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사회성을 길러간다.

 

그런데 그렇게 자라나던 어느 순간부터 학교가 더 이상 그런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그 내막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즐거움은 점수와 등급을 매기는 절차에 조금씩 질식당한다. 거리낌 없이 질문하던 호기심은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변한다. 내일이 기다려지게 만들던 우정은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밟아야 한다는 경쟁심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학생들은 “쉬는 시간도 답답”해지고, 학교가 “감옥”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하교시간을 한두 시간 바꾸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진짜 문제는 시간상의 돌봄 공백이 발생한다는 게 아니라, 오늘날의 학교가 학생들을 건강한 사회적 인간으로 커나가도록 돕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옥

 

학교란 그 사회 전체의 성격을 반영하는 거울과도 같다. 군사독재 시절에 학교는 몽둥이를 든 교사의 폭력을 앞세워 군대식 집단규율에 복종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길들였다. 그렇게 학생들은 이후 공장과 사무실에서 병영식 노동통제에 순응하는 노동자가 될 예비훈련을 거쳤다.

 

군사독재가 종식된 뒤, 이제 학교는 생존경쟁이란 정당한 것이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며 학생들을 경쟁하는 원자로 전락시키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길들여진 학생들은 시험에 떨어져도, 취직에 실패해도, 쓸모없는 경쟁과 탈락을 강요하는 낡은 체제가 아니라 자신을 탓하며 체념한다. 이런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이후 정규직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며 동료 노동자가 (또는 자신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와 지금 그 모습은 다르지만, 명령과 규칙에 순종하고 의문을 품지 않으며 낡은 것에 도전하지 않는 인간형(자본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길러낸다는 목표에선 변함이 없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돌봄과 교육 과정에 ‘공백’이란 없다. 그것은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꽉 차 있다.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본의 노예로 육성된다. 다수의 학생들이 학교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교시간 아니라 사회를 바꿔야

 

감옥이라고 느껴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제대로 사회성을 길러가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일찍 학교수업을 마치는 게 해결책이 될 수도 없다. 학교 울타리 안이든 바깥이든,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경쟁이 학생들을 (그리고 우리 모두를)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초등학생이 입학하게 될 중학교, 고등학교가 그대로인데, 입시경쟁이 그대로인데, 취업과 직장에서의 생존경쟁이 그대로인데, 초등학생들의 하교시간을 늦추든 당기든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래서 우리는 초등학교 하교시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새로운 세대의 삶이 어린 시절부터 일그러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연대와 협동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막대한 이윤과 특권을 틀어쥐고 있는 지배계급이, 그들의 정부가, 그런 사회를 원할 리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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