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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안희정 1심 무죄판결 - 사회를 후퇴시키려는 반동적 판결에 침묵할 것인가 규탄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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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5,609회 2018-08-3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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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뉴시스

 

8월 18일 열린 안희정 무죄판결 규탄집회엔 주최 측 추산 2만여 명이 모였다. 점점 늘어난 참가자들은 폴리스라인을 밀어내고 도로를 채우며 집회를 이어갔다. 1시간 반가량 행진하는 동안엔 구호가 끊이지 않았다. 시위를 하는 동안에도 폴리스라인을 유지하려는 경찰과 더 넓게 행진하려는 일부 참가자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안희정 무죄판결에 화가 난 집회 참가자들은 사법부가 유죄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 노조 조합원들까지 함께 하면서 그간의 ‘혜화역 집회’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여성차별에 항의하는 노동자들과 침묵하는 노동자들

 

우리는 행진대열 중간 중간에서 방송차량을 이끌고 가는 몇몇 낯익은 노동조합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민주노총에서 조직적으로 방송차량을 동원해 시위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행진을 마친 후 이 동지들에게 수고하셨다는 인사를 건네자, 이 동지들은 “수고는요, 진작 이렇게 함께 했어야 했는데요”라고 답했다.

 

집회 연단에 오른 민주노총 발언자는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일터에서 여성들에게 강요해왔던 성적 역할을 거부하고”, “노동자로 평등하게 서기 위해”, “성희롱 성폭력을 없애고 채용, 배치, 전환, 승진 차별을 바꿔야 한다”, “여성 노동자가 먼저 나가자”고 외쳤다.

 

이런 모습들만 본다면, 노동자운동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이 투쟁에 합류한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노동자계급 다수의 정서가 이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안희정 무죄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더라도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별로 불편할 게 없다고 느끼는 노동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투쟁이 그다지 지지할 만한 게 못된다고 여기는 시선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 피해자가 모종의 의도로 안희정에게 접근했다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자 미투를 가장한 복수에 나선 것에 불과하다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다.

 

각각의 의견에 따라 일부 노동자는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하며 사법부를 규탄하는 반면, 일부 노동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법부를 규탄하는 행동에 거리를 두거나 등을 돌린다. 이렇게 이 사건은 이미 노동자들에게 입장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사건이 됐다. 

 

가해자 변호사 노릇을 한 사법부

 

3월 5일 피해자인 김지은씨의 폭로가 이뤄진 후, 안희정은 비교적 빠르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엔 비서실을 통해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3월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안희정은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며 “모두 다 제 잘못”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안희정은 다시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휴대폰도 파기해 버렸다. 안희정의 측근들은 인터넷에 피해자를 비방하는 악성 댓글을 달다가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재판에 불려온 안희정 측 증인들은 피해자를 ‘이상하고 위험한 여자’로 몰아갔다. 

 

안희정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안희정이 말을 바꾼 이유를 추궁하지도 않았고, 휴대폰을 파기한 이유도 따지지 않았다. 안희정 측 증인의 증언은 적극적으로 수용한 반면, 이를 반박하는 피해자 측 증언은 일관되게 무시했다. 피해자의 거부의사를 무시한 채 수 차례나 힘으로 누르며 성폭행을 했는데도 재판부는 안희정이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규정했으며, “(안희정이 가져오라고 지시한) 담배를 피고인의 방문 앞에 두고 텔레그램으로 방문 앞에 뒀다고 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간음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성폭행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였다.

 

“피해자답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성폭력이 가해지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의사표시를 하지 않았다거나, 안희정의 완력에 멍이 들 정도로 저항하지 않았다거나,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에도 ‘정상적’으로 근무를 했다거나, 안희정을 존중하는 듯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 등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김지은씨가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선정적인 보도로 수익을 높이는 언론사들은 적극적으로 이 사건을 고용주와의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이 아니라 남녀 간의 치정극 같은 걸로 몰아갔다. 

 

김지은씨에게 ‘피해자답지 않음’이란 혐의를 씌우는, 인터넷과 종이신문을 도배한 그런 기사들은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잠시만 차분하게 문제를 들여다보자. 그간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례들이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 K씨는 ‘정규직 전환’을 빌미로 2년 동안이나 지속적인 성추행을 당하고 7차례 계약과 해지를 반복하다 결국 해고 통보를 받은 뒤 목숨을 끊었다. 한국산업기술시험원에서 일하던 또 다른 여성 노동자도 2년간 성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했다. 한 농협 간부는 13년에 걸쳐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20~30대 여성 노동자들을 성추행하다 뒤늦게 고발당했다. 모 출판사에선 정규직 전환을 앞둔 여성 노동자가 상무에게 성추행을 당했는데, 사내에서 고발이 이뤄진 건 거의 1년이 지난 후였다. 한림대 성심병원에선 간호사들이 해마다 사내 장기자랑이란 명목으로 선정적인 옷을 입고 춤을 춰야 했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언론에 보도된 건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이런 사례들엔 공통점이 있다. 피해를 입은 여성 노동자 상당수가 그 자리에서 강하게 저항하고 즉각 폭로하기보다는, 김지은씨가 그랬던 것처럼 참고 넘어가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또한 김지은씨와 마찬가지로 다음 날이면 ‘정상적’으로 그 직장에 출근해 하던 일을 계속한다. 자기에게 닥친 일이 별 일 아니며 차라리 빨리 잊어버리는 게 낫다는 회피심리가 작동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더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 그래서 타인이 보기엔 진짜로 별 일 없었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역시 김지은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위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하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또는 그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곤욕을 치러본 사람이라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노동자로서 회사에 고용돼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 따라서 그 일자리가 곧 생명줄이기도 하다는 삶의 조건, 조금이라도 덜 불안하게 살려면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는 현실이 여성 노동자에게 그런(‘피해자답지 않은’) 태도를 강요한다.

 

게다가 이는 여성 노동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인 것도 아니다. 8월 17일자 <민중의 소리>에 기고한 한 노무사가 자신이 맡았던 사건을 소개했다. 내용은 이렇다.

 

“회사에서 노동자 1명을 몰아내기 위해 지속적 퇴사 압력을 가하다 직급과 어울리지 않는 업무를 배정한 사례가 있다. 그 노동자는 양적, 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배치 전환된 업무를 수행하기 싫어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잘 조율해서 다시 정상적 업무에 복귀하겠다. 그 노동자는 이러한 마음에서 이메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수차례 남겨 두었다. ‘변경된 업무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의 변경된 업무를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말이다. 이러한 의사표시 몇 개로 상황이 변해 버렸다. 어느새 상황은 강제로 당한 인사이동이 아닌 해당 노동자의 동의 아래 실시된 정당한 인사명령으로 변해 있었다.”(“노동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노동자 역할 연기의 중요성”, 8월 17일자 <민중의 소리>)

 

이 사건은 성폭력 사건이 아니다. 저 ‘노동자 1명’의 자리엔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 이 노동자는 단지 자기에게 닥친 상황이 빨리 해결되고 더 나아지기를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는 이상하게 흘러갔다. 명백히 피해자인데도 피해자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고, 어느 순간 피해자가 아니게 돼 버린 것이다.

 

그다음을 상상해 보자. 안희정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재판부라면 이런 사건에 대해 “회사가 위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라고 할 것이다. 사장은 “합의에 의한 업무 변경이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을 변호할 것이다. 

 

노동자들이 늘 겪어온 일

 

이것이 단지 상상일 뿐인가? 지금껏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배치 전환됐을 때, 일터에서 쫓겨났을 때,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법의 선처를 호소했을 때, 늘 노동자들이 보고 듣고 겪은 일이지 않은가? 바로 그 권력의 구조, 즉 자본가들, 자본주의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에게 봉사하는 사법부 같은 권력기구가 공모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이지 않은가? 

 

실제로 안희정 무죄판결을 내린 조병구 판사는 2010년 전교조 시국선언 재판에서 전교조 노동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렇게 저들은 모든 고통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겨왔고, 저항해 봤자 소용없다는 패배감을 학습시켜왔고, 주는 대로 받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게 노동자한테도 좋을 거라는 환상을 강요해왔다. 그렇게 노동자의 삶을 집어삼켜온 반동적인 권력의 구조가 이번에는 김지은씨를 먹잇감으로 삼은 것이다.

 

당연하게도 지배체제는 안희정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사법부의 태도와 모든 노동자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 사이의 공통점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지금 벌어진 사건이 자본가들의 권력,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처지와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사법부를 비롯한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언론은 필사적으로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다. 김지은씨의 평소 품행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연기를 피우며 ‘꽃뱀’ 낙인을 찍는 게 그 귀결점이다.

 

8월 18일 안희정 무죄판결 규탄집회에서 피해자의 편지가 낭독됐다. 김지은씨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거절을 분명히 표시했습니다. 저는 그날 직장에서 잘릴 것 같아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날 일을 망치지 않으려고 티내지 않고 업무를 했습니다. … 저는 그날 안희정의 범죄들을 잊기 위해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노동자이자, 평범한 시민일 뿐입니다. … 여러분들이 권력자와 상사에게 받는 그 위력과 폭력, 제가 당한 것과 같습니다. 판사님들은 ‘성폭력만은 다르다’고 하십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노동자계급의 자격

 

안희정에 대한 무죄판결을, 피해자의 ‘정조’ 운운한 사법부를, 이 사건을 단순한 치정극으로 몰아간 언론사들을 용납해선 안 되는 이유를 김지은씨의 편지가 보여준다. 

 

안희정 무죄판결이 그대로 확정된다면, 그런 사법부가 조금도 도전받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있다면, 바로 그 사법부가 또 다시 무수한 노동자를 수렁에 빠뜨릴 것이다.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잘릴 것 같은” 두려움에 짓눌린 채, 저항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체념에 더 깊게 빠져들 것이다. 사법부를 비롯한 권력기구들은 한층 더 의기양양하게 노동자의 말을 묵살하고, 노동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작태를 즐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정치적 사건을 단순한 불륜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저들의 ‘꽃뱀’ 캠페인에 놀아나는 게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지배자들의 지위와 권력을 사법부의 힘으로 보호하려는 반동적인 재판 결과에 침묵해선 안 된다. 사법부를 규탄해야 하고, 쓰레기 같은 언론을 규탄해야 하고,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국가권력 전체를 규탄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기 위해 가해지는 일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차별과 억압을 규탄해야 한다.

 

여성이 어떤 처우를 받는가는 곧 그 사회가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노동자운동이 이 사안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입장을 밝히고 개입하며 투쟁을 밀어가는 만큼, 노동자들은 사회를 후퇴시키려는 반동적 계급에 맞서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인 계급으로서 역사적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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