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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획연재④ 자본주의란 무엇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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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6,244회 2018-08-1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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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집중 탐구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생산양식이 어떻게 발생해 소멸해가게 되는지, 그리고 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경제적 생산양식이 무엇인지를 다룬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경제학설의 내용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과학적인 대답이다. 

 

출발점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고통스럽고 불안정한 삶에 내몰려 있다. 이것은 결혼과 출산마저 기피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의 뿌리는 무엇일까? 바로 먹고사는 문제, 즉 안정적이고 충분한 생활임금을 주는 일자리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다. 즉 경제문제다. 마르크스 사상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의 출발점은 ‘생산’이다. 인간과 사회의 변하지 않는 제1의 필요는 다름 아니라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것을 만드는 것을 우리는 생산이라 부른다. 생산의 방식은 늘 변해 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하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무언가 생산이 이뤄진 뒤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아무것도 생산되지 않는다면, 분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변화 발전하는 방향은 생산에 우선 맞춰진다. 분배가 어떻게 이뤄지든, 그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사회가 생산하는 것이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의 크기는 결국 ‘생산능력’(생산력)에 좌우된다. 인류의 역사적 발전법칙은 바로 이 생산력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력은 진공상태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생산은 생산과정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맺는 사회적, 집단적 관계 속에서 이뤄진다. 이런 관계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 생산물 사이의 교환관계, 생산물에 대한 분배관계 등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을 ‘생산관계’라고 불렀다. 생산관계라는 형식 속에서 생산(능)력이 살아 숨 쉬는데, 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 바로 ‘생산양식’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고정돼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한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생산력의 변화 발전이 일정한 수준, 단계에 도달하면, 이 생산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와 충돌한다. 내용(생산력)의 변화 발전은 기존의 고정된 형식(생산관계)과 충돌한다. 이것은 빠르게 성장하는 아이의 몸(생산력)과 그 아이가 입고 있는 옷(생산관계)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가 성장(변화 발전)하면, 그동안 아이의 몸에 딱 맞았던 옷이 아이의 몸을 조이기 시작한다. 결국 아이가 제대로 성장하려면, 작은 헌 옷을 버리고 큰 새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옷 때문에 아이는 고통 받게 되며, 언젠가 아이의 몸은 헌 옷을 찢게 될 것이다. 물론 후자의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현명한 부모라면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아이의 성장 속도에 맞게 더 큰 새 옷을 입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과정, 즉 생산력의 발전과정은 그것과는 달리 대단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산력의 성장단계에 발맞춰 기존의 생산관계를 새로운 생산관계로 대체하는 것을 결연하게 막아야 하는 반동세력, 즉 인류의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아야 하는 반동세력 때문이다. 바로 기존의 생산관계 속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왔던 낡은 지배계급이다. 낡은 반동 지배계급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사회에 자리 잡아 인류의 생산(능)력이 더욱 높은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것에 저항한다. 이 저항을 분쇄해 새로운 생산관계를 창조함으로써 인류의 진보에 길을 터주고 촉진하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혁명’이다. 인류사회는 생산력의 성장에 족쇄를 채우는 낡은 생산관계를 버리고, 생산력 발전에 조응하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채택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왔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규정한, 인류사회의 혁명적 변화발전의 뿌리였다. 

 

생산력

 

옷, 쌀, 자동차, 배, TV, 컴퓨터, 신문, 약, 학교 등 의식주를 비롯한 생존수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조건을 갖춰야 한다. 

 

① 토지, 원료, 기계, 도구, 공장 ─ 즉 생산수단이라고 부르는 것.

② 노동력 ─ 생산수단에 자신의 힘과 기술을 사용해 유용한 것을 생산하는 노동자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생산력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두 요소다. 이 두 조건이 결합해야 비로소 생산이 이뤄진다. 생산수단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다. 자동차공장을 예로 들면, 아무리 우수한 작업도구와 잘 정비된 조립라인이 있더라도 노동자가 조립노동에 나서지 않으면, 즉 노동(능)력이 결합되지 않으면 자동차를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은 노동자가 일을 멈추는 파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그 반대도 사실이다. 아무리 노동력이 준비돼 있더라도, 작업장과 기계, 도구 같은 생산수단과 결합하지 못하면 자동차를 만들 수 없다. 이것은 해고돼 생산수단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노동자들이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것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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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과 노동자가 결합하지 않으면 단 한 대의 자동차도 만들어질 수 없다.(사진_연합뉴스)

 


가장 단순하게 접근하면, 생산이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 그래서 유용한 가치를 가진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모든 사회에 공통된다. 각각의 사회를 구분하는 것은 우선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질적 차이다. 돌도끼나 낫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와 거대한 컨베이어벨트나 자동선반 같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사회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된다. 원시인의 노동력과 잘 숙련돼 있고 여러 고급기술과 기계를 사용하는 현대 노동자의 노동력 사이에는 거대한 질적 차이가 있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구성되는 생산(능)력의 질적 차이로부터 각각의 사회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더 진보한 사회과 덜 발전한 사회를 나누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력의 질적 차이다. 

 

소유관계

 

다음으로 각각의 사회를 구별하는 것은 생산관계의 상이성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하는 것은 특정한 생산관계 하에서 이뤄진다. 소유관계, 교환관계, 분배관계를 포괄하는 이 생산관계에서 일차적 규정력을 발휘하는 것이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관계’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유산자계급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단지 노동(능)력만 갖고 있는 무산자계급이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하에서는 생산에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유산자계급인 자본가계급은 다른 사람들을 임금노동자로 고용해서 자신을 위해 일을 시킬 권리를 얻는다. 반대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무산자들인 노동자계급은 노동력 제공을 조건으로 해서만 비로소 생산수단과 결합할 기회 즉 취업의 기회를 얻는다. 

 

이렇게 생산수단은 자본가계급이 소유하고, 노동력은 노동자계급이 소유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에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가 바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다. 이것은 생산과정에 자신을 각인한다.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이뤄지는 생산과정은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가진 것은 단지 몸뚱이(즉 노동력만 가진 무산자)인 노동자를 마음대로 부려먹고 착취하는 과정이 된다. 그 결과 생산과정(노동과정)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결합해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서 잉여가치(이윤)를 창출하는 잔인한 착취의 과정이게 된다. 개별 소농민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스스로 일하는 과정은 단순히 일(생산)하는 과정일 뿐이지만, 노동자가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과정은 생산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착취하는 과정이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착취당하는 과정이다.

 

교환과정과 분배관계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과해 만들어진 생산물은 이제 자본주의적 교환과정 및 분배과정으로 들어간다. 자본주의 (상품)교환관계에서는 평등한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은 동등한 화폐가격으로 서로 교환된다. 200만 원짜리 카오디오 1대는 200만 원에 팔린다. 200만 원을 손에 쥔 사장은 이걸로 200만 원 어치 부품, 재료를 다른 사장들로부터 구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배관계는 어떤가? 시장에서 판매된 생산물(상품)은 자본가계급 수중에 화폐로 돌아간다. 이 화폐는 어떻게 분배되는가? 일부는 부품이나 원료, 설비, 도구 등을 다시 구입하는 데 들어간다. 그 뒤 남은 돈으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가 일어난다. 자본가는 노동력 공급자인 노동자와 계약을 맺은 돈을 임금으로 지급한다.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가 자본가의 이윤이 된다. 이렇게 노동력에 해당하는 가치(임금)와 이걸 제외하고 남은 자본가의 이익(이윤)이 자본주의 분배관계의 핵심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치를 임금으로 분배받고,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전체 노동의 가치 중 이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 가치를 이윤으로 챙긴다. 

 

이런 분배관계의 결과는 무엇인가? 임금은 노동자 가족이 한 달 벌어 먹고사는 데 급급한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약간 남은 돈은 질병이나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모아두어야 한다. 결국 노동자들은 임금노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없다. 작업장, 기계 등 생산수단을 구입해 유산자가 되는 길은 봉쇄돼 있다. 한 달에 백만 원도 저축하기 힘든 노동자들이 어찌 수백억, 수천억, 수조 원의 생산수단의 소유자가 될 수 있겠는가? 반면 기존의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에 더해, 자본가들은 새롭게 확보한 이윤으로 추가 투자를 함으로써 갈수록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눈덩이처럼 커진, 거대한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길은 완전히 닫힌다. 그래서 자본주의 소유관계는 더욱 확고해진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더욱 완전하게 자본주의 착취관계에 빨려 들어간다. 이것은 분배에서의 불평등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렇게 소유관계 → 분배관계 → 소유관계 → 분배관계로 이어지는 확대순환의 고리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더욱 탄탄해진다.

 

잉여가치(착취)의 본질

 

잉여가치(이윤)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어느 지점에서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일어나고, 그 결과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창출하게 되는가? 교환과정은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의 상품이 동일한 교환가치를 가진 다른 상품과 화폐를 매개로 교환될 뿐이다. 

 

그렇다면 분배과정인가?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경우 분배는 계약에 의해 정당하게 이뤄진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와 맺은 임금계약에 따라서 임금을 분배받는다. 이 임금계약서는 계약한 임금을 정상 지급한다면, 나머지 수익금을 사장이 가져가는 것에 아무런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임금계약은 내용적으로는 부당한 것이다. 동등한 두 주체가 맺는 계약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맺은 불평등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입사하는 노동자는 사장에게 ‘내가 일해서 창출한 가치만큼 전액을 임금으로 지급하라’고 요구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장은 단번에 입사를 거부할 것이다. 계약은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몸뚱이, 즉 노동(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는 노동자는 생산을 해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결합해야만 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사장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계약서를 내민다. “네가 노동을 통해 얼마만큼의 가치를 창출하느냐는 임금계약에서 결코 중요하지 않다. 나는 네가 노동을 통해 창출한 가치 전체를 줄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면 나에게는 이익(이윤)이 남지 않는다. 나는 오직 네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임금만을 줄 것이고, 나머지는 내가 가져갈 생각이다. 이것에 동의하면 임금계약서에 사인해라. 그렇지 않으면 취업을 포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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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공고를 바라보는 구직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실업자로 떠돌지 않으려면, 노동자는 이런 불평등한 계약서에 사인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부당한 착취적 분배관계가 평등한 자유계약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부당한 분배관계가 작동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생산의 두 요소 중, 생산수단을 전적으로 극소수 사장들이 독점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바로 생산수단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가, 즉 소유관계에 있다. 

 

개별 노동자 수준에서 접근한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집단적 임금계약을 맺더라도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이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수행한 전체 노동의 가치를 임금으로 달라고 강제하기 어렵다. 단지 착취의 강도를 낮춰, 잉여가치를 줄이는 대신 노동자가 가져가는 임금 비율을 높일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잉여가치를 크게 줄여버리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이유가 사라진 자본가들은 차라리 회사 문을 닫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체제는 그것을 구조적으로 강요한다. 잉여가치를 충분히 뽑아내지 못해서 자본투자를 줄이는 자본가는 언젠가 경쟁에서 밀려 몰락할 것이고, 이것은 그 자본가와 계약을 맺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실업이라는 거대한 재앙을 선물한다. 

 

이것은 모든 노동조합에 대한 근본적 압력이 된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대개의 노동조합 투쟁은 착취 자체를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정상적인 임금이라도 강제하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철폐를 향해 단호하게 진격하지 않는 노동조합이라는 한계 내에서 그렇다. 노동자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착취를 철폐하려는 노동조합이라면, 자본주의 경쟁압력을 뛰어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총단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 결론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모든 생산수단을 생산자 자신이 집단적으로 공동 소유하는 사회주의로 대체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망이 모든 노동조합이 추구해야 할 미래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에게 임금투쟁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임금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정상임금이라도 강제할 수 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 힘, 단결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임금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임금투쟁의 연장선에 있는 노동시간 단축투쟁, 노동강도 완화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를 향한 학습, 토론, 조직화를 이룰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유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 – 노동자 착취과정

 

내용적으로 볼 때 부당한 임금계약이 이뤄졌더라도, 그 자체로 잉여가치가 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빼앗을 것이 있어야 한다. 잉여가치 또한 생산과정에서만 창조된다. 유산자와 무산자로의 분할이라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에서 출발한 ‘부당한 계약’은 작업장에서 이뤄지는 생산과정에서 비로소 집행된다. 모든 가치가 창조되는 생산과정에서 자본가들은 임금,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에 해당하는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시간(이것을 마르크스는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불렀다)을 넘어서는 추가 노동을 하도록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이 추가노동에 대해서 자본가들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자신이 챙긴다. 이것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다. 이처럼 노동자들이 공짜로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치는 추가노동시간을 마르크스는 ‘잉여노동시간’이라 불렀다. 

 

가령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창출하는 시간이 주 20시간이라고 하자. 그런데 노동계약서에 주 40시간이 명시돼 있다면, 나머지 주 20시간의 노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서 노동자들은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노동하는가? 바로 자본가들을 위해서다. 이 공짜노동이 잉여가치를 낳는데, 이것이 모든 자본가계급의 이윤의 원천이다. 자본가들 사이에서 여러 복잡한 과정을 거치더라도, 이렇게 생산과정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가 모든 자본가들이 나눠가지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에서 생산과정은 유용한 가치가 창출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정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가 자행되는 무자비한 착취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모든 생산물은 그것에 투입된 사회적 평균노동시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가치의 어머니는 바로 노동이다.”라는 ‘가치법칙’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였던 리카도가 그것을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리카도는 잉여가치 즉 착취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 왜냐하면 그는 자본가계급의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잉여가치 앞에서 도망쳐버렸다.

 

반면 마르크스는 리카도의 가치법칙을 계급적 편견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최초로 발견했다. 이것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최고의 공헌이었다. 착취가 왜 발생하는지, 즉 왜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자본가들은 갈수록 부자가 되는지에 대해서, 나아가서 가만히 놔두면 자본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왕국을 건설할 수밖에 없는지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법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 불황기와 공황기에 노동자들은 실업과 더 낮아지는 임금에 신음한다. 반면 자본주의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잠시 어느 정도 안정된 일자리와 임금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노동자들은 엄청난 잉여가치를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쳐 노동자들을 칭칭 감고 있는 임금노예의 사슬의 길이를 빠르게 늘려야 한다. 잉여가치(이윤)가 빠르게 추가 투자됨으로써 자본가들은 더 거대한 생산수단을 자신의 수중에 축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의 깊이 파인 골은 더욱 깊어지고, 노동자들은 헤어날 수 없는 더욱 깊은 착취의 수렁으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벗어날 길은 딱 하나다! 노동자계급 전체에 의한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즉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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