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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획연재③ ‘변증법’ - 세계는 변화한다, 자본주의도 반드시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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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6,349회 2018-07-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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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계급이 지배를 유지하는 결정적인 수단 중 하나는 기존 체제를 결코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체제로 사람들이 여기게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지배계급은 다양한 세뇌, 교육 장치를 가동했고, 그런 생각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이론과 사상을 발전시켜왔다. 

 

동양의 봉건체제는 유교와 같은 사상을 보급함으로써, ‘충’의 사상 즉 임금과 백성으로 신분이 나뉘는 것을 영원히 정당하고 윤리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는 ‘변하지 않는 신의 섭리’를 앞세우면서, 대중이 능동적 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차단해왔다. 

 

그 점에서 자본가계급은 결코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활력을 거세하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는 영원불멸하다는 관념을 대중 속에 불어넣는 작업에 집요하게 매달려 왔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고, 이것은 변하지 않는 본성이므로, 자본주의는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고 교육해 왔다. 시장 상품경제 속에서 힘없고 고립된 개인들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한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믿게 만들어 왔다. 

 

그렇지만 자본가계급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가령 과학과 기술의 변화발전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가계급도 인정하며, 오히려 앞으로의 변화발전 속도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자체는 자본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발전에 대해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자본주의 또한 영원불멸하지 않고 혁명적으로 타도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가계급도 어느 정도의 사회변화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변화는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더 이상 임금과 백성으로, 영주와 봉건 농노로, 노예주와 노예로의 분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자본가계급은 자본주의에 도달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해서만, 혁명적 변화를 인정한다. 자본주의에 이르면, 영원불변한 고정성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런 위선과 사기에 맞서, 마르크스는 “모든 사물은 변화하며,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변증법 사상을 대변했다. 그리고 이 변증법 사상을 유물론과 결합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식화했다. 나아가서 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에 적용해, 자본주의의 붕괴의 불가피성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 탄생의 역사적 필연성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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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영원히 고정된 것은 없으며 절대적이거나 신성한 것도 없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이기적 본성’ – 완전한 허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노예제와 봉건제는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과 위배되는 경제체제였지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이기적 본성에 조응하면서, 이 본성을 활용해 경쟁의 활력을 높여 사회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체제이므로 영원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추적해보면,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자본주의 사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 지속됐던 원시공산제 사회에서는 이기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령 지금까지도 극소수 부족으로 남아서 원시공산제 사회의 흔적을 유지해오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 모히칸 족의 사전에는 원래 ‘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우리’라는 단어만 존재한다. 공동체적 소속감이 개인을 압도했고, 사적 소유권이 성립하지 않았던 상황을 반영한 결과였다. 물론 이처럼 ‘개인’이라는 의식 자체가 없었던 모히칸 족의 모습은 자본주의보다 낙후한 과거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와 함께, ‘나’라는 의식이 탄생한 것은 분명 인류의 거대한 역사적 진보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의 논의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변하지 않는 이기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 안에 이기성이 들어오게 된 것은 사회의 오랜 역사적 변화 발전의 결과물, 특히 자본주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홍수나 화재 같은 재난 상태에서 발휘되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타인을 구하려는 숭고한 연대성도 우리는 자주 접하고 있다. 

 

인간의 속성은 끊임없이 변한다. 이 속성은 주어진 사회체제에 의해 일차적으로 좌우되며, 이 사회체제 속에서 새로운 변화의 요소가 성장하면 그에 발맞춰 인간의 속성에도 혁명적 변화가 시작된다. 이미 그 변화는 자본주의 심장부에서 시작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단결 속에서 말이다. 길어지는 불황과 수시로 위협을 가하는 공황 앞에서, 무한대의 이기적 경쟁을 찬미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인류에게 더 이상 유용한 선택인지에 대한 커져가는 질문 속에서 말이다. 

 

헤겔 넘어서기 

 

변화 발전을 자본주의까지만 인정하는 자본가계급의 모습과 동일한 것이 철학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헤겔 철학이다. 헤겔은 법을 포함해 인류의 정신적, 사상적 발자취를 탐구했다. 당연히 인류 사회의 변화는 이 정신적 영역에도 각인돼 있었다. 헤겔은 이 변화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했고, 그 결과 변증법을 정식화할 수 있었다. 사물의 변화 발전의 법칙을 일반화해서 정식화한 양질 전화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대립물의 통일의 법칙은 헤겔에 의해 정식화됐다. 이런 정식화가 가능했던 것은 헤겔이 살았던 시대가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봉건제가 저물고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있는 급격한 전환의 초입부였고, 프랑스혁명의 시대였으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철학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기였다. 이처럼 변화를 도외시할 수 없는 격변기 상황이 헤겔 철학을 잉태했다. 

 

하지만 헤겔 철학은 대단히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 헤겔 철학은 세계의 끊임없는 혁명적 변화에 대한 인정을 핵심으로 하는 변증법에 내재한 혁명적 측면을 드러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헤겔 철학은 이러한 혁명적 변화를 오직 헤겔 철학에 도달하는 역사적 과정에서만 적용하고 인정했다. 헤겔 철학, 그리고 이 철학에 근거한 당시 독일 절대왕정의 법률에 도달하면, 변화발전은 끝나고 이제 ‘완성’ 즉 변하지 않는 고정성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청년 헤겔학파에 속했던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의 이중성 가운데 전자의 혁명적 측면에 주목했고, 후자의 보수성에 맞서 싸웠다.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결론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다. 도착지는 어디였는가?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헤겔 이전의 사상, 법과 마찬가지로, 헤겔의 사상과 그에 기초한 당시 독일의 절대왕정 체제의 법도 ‘일시적’이며, 영원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넘어서야 하는’ 대상임을 밝혀냈다. 마르크스는 당시 독일의 법, 즉 절대왕정 체제에 맞선 투사가 됐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는 이제 막 역사의 무대에 올라오고 있던 신흥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으로까지 변증법을 확장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잉태한 모순, 즉 변화의 씨앗을 과학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진보적인 신흥 체제에서 낡은 반동적 체제로 전환하고 있으며, 이런 전환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가 수립되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이어질 것임을 과학적으로 논증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자본론>이다. 

  

변증법과 유물론을 결합하다

 

헤겔이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것은 <법철학>을 통해서였다. 법의 역사적 변화과정을 따라, 헤겔은 자신이 발견한 변증법을 가장 완전무결한 형태로, 구체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스승 헤겔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다. 헤겔의 변증법은 뒤집어진 변증법이었고, 그 때문에 여러 지점에서 불완전하고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헤겔은 ‘절대정신(이념)’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으로부터 법, 정치체제, 경제적 토대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사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사회의 진정한 모습은 그 반대였다.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 상부 구조를 탄생시키고, 이 정치적 상부 구조 속에 법과 사상, 철학이 자리 잡는다. 바로 이것이 유물론적 접근이다. 현실이 운동하므로 그것의 그림자도 운동한다. 그런데 헤겔은 현실의 운동에 주목하는 대신, 그림자의 운동에 주목했고, 그림자의 운동으로부터 거꾸로 현실의 운동을 끌어냈다. 이처럼 헤겔 철학은 존재와 의식, 실체와 그것의 그림자가 전도된 관념론이었다. 하지만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운동하기에 그 토대 위에 놓인 정치적 상부구조인 그림자 또한 그것을 따라 운동할 수밖에 없다. 헤겔은 현실과 그림자, 토대와 상부구조를 혼동했지만, 끊임없이 운동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그림자(법, 철학)를 검토했기에 그림자의 운동에 반영된 현실의 운동 법칙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이 그림자의 운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식화한 사물의 운동의 법칙 즉 변증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머리와 발이 거꾸로 서 있는 헤겔 철학을 완전히 뒤집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헤겔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스승 포이어바흐 철학의 한계 또한 극복했다. 포이어바흐는 물질적 토대로부터 의식을 설명했지만, 그가 토대로 했던 물질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 그리고 이 경제적 토대에서 이뤄지는 생산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이로부터 분리, 고립된 개별 인간이었다. 그는 이런 ‘개별 인간’이 놓여 있는 토대로부터 여러 의식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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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왼쪽)과 포이어바흐(오른쪽)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상정했던 그러한 ‘개별 인간’은 현실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주어진 경제적 관계 속에서 타인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그 속에서 작동한다. 모든 개별 인간의 윤리, 취향, 취미, 생각 등을 그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타인들,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접근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남겨진 ‘개인’이라는 것은 완전히 허상일 수밖에 없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심성’ 그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가 분석한 추상적 개인이 사실은 일정한 사회 형태에 속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그래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왜곡될 수밖에 없었고, 인간의 생각과 의식을 제대로 설명하는 도구가 될 수 없었다. 당연히 헤겔 철학을 넘어설 수도 없었다. 특히 사회에 살고 있는 억압당하는 노동인민에게 현실적 탈출구를 제공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과 변증법이 서로 분리돼 대립함으로써 발생하는 모순과 부조화, 한계를 둘을 결합시킴으로써 해결했다. (비록 정치적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을 가할지라도)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 상부 구조를 탄생시키고, 이 정치적 상부 구조 속에서 법과 사상, 철학이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분석의 결론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를 역사적,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제대로 전개될 수 있었다. 관념론자였던 헤겔이 그것을 시도한 무대가 법철학이었다면, 유물론자인 마르크스가 그것을 시도한 무대는 자본주의 경제 분석이었다. 바로 <자본론>이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탄생했고, 자신을 매장할 무덤을 만들고 있는지, 그리고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로부터 어떻게 자본주의 정치체제와 법, 이론들이 탄생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다룬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자본론>에 가장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서술돼 있다. 

 

형식논리학 vs 변증법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바로 스냅 사진과 동영상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달리는 마라톤 주자를 떠올려 보자. 이렇게 달리고 있는 주자의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식의 설명 외에는 불가능하다. 운동하고 있는 그의 위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라톤 주자를 스냅 사진으로 찍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스냅 사진 속의 마라톤 주자는 ‘정지’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콕 집어서 그의 위치를 정확히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라톤 주자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태, 즉 운동하는 상태라면 이 스냅 사진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동영상만이 끊임없이 운동하는 마라톤 주자의 실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철학에서 형식논리학은 이 ‘스냅 사진’에, 변증법은 ‘동영상’에 비유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변화 속에서, 운동 속에서 포착하고자 한다면, 변증법이 필요하다. 형식논리학은 이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며, 사물을 고정불변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형식논리학을 대표하는 두 명제는 ‘동일률’과 ‘모순률’이다. 동일률의 예를 들면, “나는 나다”, “의자는 의자다” 등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A=A라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것을 두고서 “나는 내가 아니다”, “의자는 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 두 의견은 모순되기에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A=A가 아니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순률이다. 

 

그러나 스냅 사진처럼, 어느 한 순간의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긴 역사적인 운동 과정, 변화 과정을 찍고자 한다면, 동일률과 모순률은 단박에 한계를 드러낸다. 17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나와 60살 환갑의 나는 과연 같을까? 아니면 이 사이에는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 서로 다른 나일까? 육체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가치관, 세계관, 취향 등의 측면에서 두 ‘나’는 과연 같을까? 부모님에게 용돈을 타 쓰는 17살 나와 손주에게 용돈을 주는 60살의 나는 과연 같을까? 

 

시간의 길이를 더 늘려보자. 오늘 내가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 의자는 200년 후에도 의자일까? 아마 200년 후에 이 의자는 썩거나 쓸모가 없어 쓰레기장으로 보내진 뒤, 땔감으로 사라졌을 수 있다. 더 이상 의자가 아니라 숯으로 변했을지 모른다. 

 

결국 형식논리학은 운동하고 변화하는 사물을 어느 특정 시점에서 고정된 것으로 취급했을 때만 유효하다. 반면 사물의 운동과 변화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변증법을 채택해야 한다. 변증법은 동일한 사물에 대해, 변화와 운동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와 다르다.” “나는 살아 있지만, 동시에 나는 죽어가고 있다” “오늘의 의자는 미래에는 의자가 아닐 것이다.” “의자는 의자임과 동시에, 썩고 유행에 뒤처져 숯으로 변하고 있다.” 등등. 

  

지배계급은 왜 형식논리학에 집착하는가? 그리고 왜 변증법을 거부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변증법은 오늘의 사물이 내일에는 바뀔 수 있음을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늘의 자본주의 착취 체제가 영원불멸하기를 꿈꾸며 “이대로!”를 외치는 자본가계급은, 아직 충분히 각성하지 못했고 자본주의를 타도할 생각을 하지 않는 노동자계급의 현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노동자계급이 현재의 상태에 절망해, 미래의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기를 간절히 희망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에게 변증법은 희망과 용기, 확신을 불어넣는다. “파업에 나서 변화하고 있는 ‘어제의 동료’는 ‘내일의 동료’와는 다를 것이다.” 바로 이런 변증법적 정신에 입각해, 선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파업을 준비한다. “파업 투쟁에 나서고 있는 ‘오늘의 동료’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야 한다는 점을 자각하는 ‘내일의 동료’로 변화할 것이며, 언젠가 노동자혁명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런 변증법적 정신에 입각해,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속에서 활동한다. 반면 자본가계급은 ‘절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철학으로 노동자의 정신을 물들이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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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변화한다. 물론 그 변화의 결론도 미리 예정돼 있지 않다. 

 

하지만 자본가계급의 실천은 자신이 유포하는 고정불변의 철학을 거역한다. 그들은 4차 산업혁명의 파도처럼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일하고, 기술을 혁신하며, 결코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들은 아무리 강력한 노동조합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의 민주노조는 내일의 어용노조로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민주노조 파괴에 전력을 다한다. 

 

상황은 분명하다.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한, 자본가계급은 변증법까지도 활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익을 거역하는 한, 자본가계급은 변증법을 거부하고 매장시키려 분투한다. 

 

모든 사물은 연관돼 있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를 포착할 수 있는지 여부의 문제는 결코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실천을 통해 진리, 즉 그의 사유의 현실성과 위력 및 현실성을 증명해야만 한다.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에 대한 논쟁은 ㅡ 이 사유가 실천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면 ㅡ 순전히 공리공론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일이다.”(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젊은이들이, 노동자들이 변증법 철학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투쟁의 소중한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미래의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는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변증법은 사물들의 전체적 연관 속에서 개별적 사물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준다. 변증법의 핵심인 운동과 변화는 고립돼 일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물들이 맺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운동과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운동과 변화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재구성해낸다. 따라서 사물의 운동을 인식하려면 우선 사물의 전체적 연관에 주목하라고 변증법은 가르친다. 

 

가령 지금껏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은 전체 세계 자본주의, 즉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접근해야만 옳게 이해할 수 있고, 미래의 전망을 예측할 수 있으며, 한국 노동자계급의 전략 전술을 수립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두 제국주의 진영인 미 제국주의와 중국 제국주의 사이의 갈등, 대립, 그리고 이것들의 심화 발전 속에서 남북문제를 바라볼 때만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세계 노동자계급 혁명이 필요하다는 점, 그리고 이것을 향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남북 노동자계급 단결을 위한 당면의 요구를 내건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조합주의를 넘어서는 데서도 변증법은 사고의 방법을 제시한다. 사물의 전체적 연관을 고민한다면,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을 덮치는 노동개악과 정부의 억압에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업장의 경계를 뛰어넘어 모든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전체로서 볼 때 어느 개별 자본도 지속적인 승리를 구가할 수 없는 무한대의 경쟁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이므로, 자본의 위기가 덮칠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이에 따라 구조조정, 파산위협 등에 맞선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은 개별 노동조합 차원에서는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전체 노동자의 연대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게 된다.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다. 변변한 정규직 일자리가 없어 고통을 겪는다면, 그 고통의 이유를 따져봐야 한다. 사물의 전체적 연관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이런 고통은 전적으로 본인의 불행, 혹은 능력과 노력 부족 탓으로 돌리게 된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연관을 따져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왜 일자리가 부족한가? 더 낮은 임금과 더 높은 노동강도를 강요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자본가들의 이해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본가들이 작업장의 대부분을 소유하면서, 일자리를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을 더 확대한다면, 이런 고통이 자신만을 덮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수많은 청년들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혼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지만, 이런 사회적 역량을 단결시켜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한다면 비참한 운명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에 도달할 수 있다. 

 

양질 전화의 법칙, 대립물의 투쟁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다음으로 변증법은 사물이 맺는 무한한 연관성 속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일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도구를, 운동의 주요 법칙들을 통해 제시한다. 그 법칙들은 양질 전화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대립물의 투쟁의 법칙인데, 이것들은 사물이 하나의 단계에서 다른 하나의 단계로 질적으로 이행하는 것을 분석하고 설명하며 예측할 수 있는 인식의 주요 도구들이다. 

 

가령 이것을 소위 보수냐 진보냐 하는 대립구도에 적용해보자. 보수파 지배계급의 철학은 고정불변을 찬미하면서 변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반면 개혁파 지배계급의 철학은 변화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의 한계 내에서의 점진적 변화, 그것도 자본주의 착취체제의 안정과 고도화를 향한 변화를 추구할 뿐이다. 개량주의자들은 변화를 앞세운다.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점진적인 양적 변화만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러한 양적 변화가 어느 시점에서는 질적 변화라는 혁명적인 변화로 이어지며, 또한 반드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부정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변화를 인정한다는 것은 혁명적 변화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사물의 변화의 정점이자, 질적으로 도약하는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변화는 바로 혁명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 혁명적 변화를 반영하는 법칙이 바로 “양적인 변화가 어느 지점에서 질적인 변화로 이행한다”는 ‘양질 전화의 법칙’이다. 인간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이에서 소년, 소년에서 청년, 청년에서 장년으로, 장년에서 노년으로 질적인 변화를 겪으며, 종국에는 죽음으로써 살아 있던 생명체에서 무생명체로 질적으로 변화한다.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또한 이런 ‘양질 전화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극소수 사람들에게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런 문제의식은 노동자투쟁의 확산 속에서 점차 다수 대중에게 퍼져나간다. 노동자들의 단결의 확대와 투쟁력의 성장에 따라, 이런 문제의식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대안을 향한 갈망과 확신으로 성장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전면화한다.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의 양적 축적이 어느 단계에 이르러, 사회구성원의 압도적 다수인 노동자계급에 의한 혁명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질적 도약이다. 

 

‘대립물의 투쟁’ 또한 이러한 혁명적 변화를 설명해주는 소중한 도구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산 것과 죽은 것이라는 대립물의 투쟁 속에 놓이게 된다. 우리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일부는 죽어가고, 일부 세포는 새롭게 탄생한다. 새롭게 탄생하는 세포의 수가 죽어가는 세포 수를 능가할 때, 인간은 자라나고 성장한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면, 인간은 점차 늙게 된다. 산 것과 죽은 것이라는 대립물의 투쟁에서 어느 시점이 되면, 죽어가는 세포가 새롭게 탄생하는 세포를 압도하게 되고, 인간은 죽음이라는 질적 변화와 만나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 또한 이러한 대립물의 투쟁 속에 놓여 있다. 바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이다. 자본주의를 탄생시키면서 신흥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자본가계급은 부단한 자본축적 속에서 노동자계급을 끊임없이 배출해낸다. 두 계급 사이에서는 임금과 고용, 노동조건을 둘러싼 부단한 투쟁이 일어난다. 초기에는 자본가계급의 힘이 노동자계급의 힘을 압도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수적으로 압도적 다수가 되고, 사회적 생산의 대부분을 담지하며 전 세계적으로 단결해나가는 노동자계급의 힘도 성장한다. 어느 시점에 자본가계급의 힘과 노동자계급의 힘은 팽팽한 힘의 균형 상태, 즉 이중권력 상태로 이행한다. 혁명과 반혁명의 치열한 대립 끝에 힘의 우위를 점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를 지배하는 새로운 계급으로 떠오른다. 자본가계급은 소멸한다. 

 

모든 지배계급은 자신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르는 시점까지는 이러한 ‘대립물의 투쟁’을 인정한다. 가령 프랑스에서 자본가계급은 봉건체제에 맞선 자신의 투쟁의 역사를 찬미해 왔고, 혁명기념일까지 제정했다. 그러나 이 대립물의 투쟁이 이제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내려는 단계까지 이르게 되자, 이렇게 부르짖는다. “이제 계급투쟁(대립물의 투쟁)을 멈추자. 계급투쟁은 야만적이다. 계급협조를 통해 평화의 세상을 열자!”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선언한다. “계급투쟁(대립물의 투쟁)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다!”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이러한 혁명적 변화가 질적인 발전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질적인 발전이 이뤄지는 역사적 과정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자본가계급을 극복하고 세상의 주인공으로 도약한 노동자계급은 단순히 새로운 지배계급을 만들어낸 것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자본가계급을 부정하고 사회의 전면에 등장한 노동자계급은 2차 부정으로 나아간다.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공동체사회)로 전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자신을 포함한 계급 일반을 제거해버린다. 우선 생산수단을 전체 사회구성원의 공동 소유로 전환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은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구별을 없애버린다. 모두가 (공동의) 유산자이면서도, 동시에 모두가 (누구도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산자다. 다음으로 이렇게 누군가 누구를 착취할 이유도, 착취할 근거도, 착취할 힘도 없게 만듦으로써 타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했던 모든 국가 기구들이 존재 근거를 잃게 된다. 오직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의식적 공동체’만 남게 된다. 자본주의의 부정을 통한 사회주의의 건설, 사회주의의 부정을 통한 공산주의의 건설이라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인류 사회는 계급 사회에서 무계급 사회라는 질적 발전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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