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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분리주의적 여성운동을 넘어설 수 있는 ‘불편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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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홍 조회 7,323회 2018-06-2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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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여성들의 모임 ‘불편한 용기’가 주최한 5월 19일 1차 집회엔 12,000명이 모였다. 500명 정도 모일 거라 예상했던 경찰은 당황하며 허둥댔다. 6월 9일 2차 집회엔 앞선 집회의 두 배 가까운 22,000명이 모였다. 주최 측인 ‘불편한 용기’는 다음달 7일 3만 명 규모의 집회를 예고했다. 이들 집회를 보며 여러분은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가? 혹은 두려운가? 아니면 해방감과 자부심을 느끼는가?

 

사진_뉴스1 

 

5월 19일과 6월 9일 진행된 혜화역 여성집회는 즉각적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집회가 열린다는 사실 자체는 논란이 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생물학적 여성만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는 특별한 지침이 있다. 실제로 집회에 남성들의 참여는 금지됐다. 기자들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성을 겨냥한 날선 감정이 담긴 피켓도 등장했다.

 

이들의 저항을 ‘남성혐오’ 행위라고 낙인찍으며 공격하는 의견에서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의견에 이르기까지, 관점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노동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 자기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 집회 참가자들의 상당수가 직장에 다니는 노동자이거나 예비 노동자일 것이며, 성차별의 문제는 노동자 단결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당한 분노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는 역사적으로 응축된 정당한 분노다. 일자리를 얻는 데에서, 업무를 맡는 데에서,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를 받는 데에서, 모든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서 여성들은 차별과 억압을 경험한다. 

 

혜화역 집회에서 삭발식에 참여한 여성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길을 걸을 때, 화장실 갈 때, 생활할 때 두려움이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말에 투영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은 정당한 분노를 낳는다. 이 분노에 공감하는 것이 우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노의 정체에 대해 한 걸음 더 파고들어야 한다. ‘여성억압’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커피전문점 이디야에서 일하던 어떤 여성은 이번 혜화역 집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일터에서 쫓겨났다. 이것은 여성억압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하지만 우리의 물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해고는 단지 그가 ‘생물학적 여성’이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여성 노동자’였기 때문인가?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만약 그 여성이 사장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여성의 권리를 요구하더라도 잘릴 위험이 없는 여성, 즉 고용주의 위치에 있는 여성은 이런 해고의 두려움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서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 있는 곳이 다를 때

 

삭발식에 참여한 여성의 외침을 떠올려보자. 퇴근하고 밤늦게 귀가하는 여성 노동자는 길을 걸을 때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부유한 여성 자본가는 애초에 그런 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 지하철역, 주점, 노래방 건물 등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여성 노동자는 화장실 갈 때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부유한 여성 자본가는 애초에 그런 화장실에 갈 일이 없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지 못한 여성 노동자들은 모든 일상 속에서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하지만 부유한 여성 자본가는 일상적인 생활의 조건과 구조 자체가 다르다.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즉 계급)으로 나뉘는 걸 부정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에 공감하되, 어느 계급 여성들과 나란히 설 것인가라는 문제를 회피할 순 없다. 이 문제를 회피할 때 남는 건 결국 ‘생물학적 여성’인가 아닌가 뿐이다. 이런 관점은 의도와 무관하게 ‘생물학적 남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분리주의적 여성운동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생물학적 남성’ 역시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즉 계급)으로 나뉜다. 여성 노동자들이 온갖 불안과 고통의 굴레에 속박돼 있는 것처럼, 남성 노동자들 역시 해고, 경쟁, 산재 등의 위협을 결코 떨쳐낼 수 없다. 지배계급 남성들은 지배계급 여성들과 함께 노동자를 성별에 따라 분할하고 경쟁심과 적대감을 부추긴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지배체제를 겨냥한 도전으로 발돋움하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우기 위해서다. 분할하고 지배하라! 이것은 오늘날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에게도 변함없는 금과옥조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중요한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 한쪽에는 자신이 어떤 사회계급인가라는 물음을 지워버린 채 생물학적 여성과 생물학적 남성으로 나뉘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관점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생물학적 차이를 넘어선 노동자의 단결에서 여성억압 분쇄의 열쇠를 찾으려는 관점이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단결의 길을 찾기 위해

 

이 사회가 계급사회라는 진실을 은폐할 생각이 없다면, 따라서 저항에 나선 여성들의 시위가 자본가들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부속물로 활용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별을 넘어선 노동자 단결과 공동의 투쟁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투쟁에 나선 여성 노동자들이 ‘생물학적 여성’만을 결집하는 운동을 넘어, 남성 노동자와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하는 ‘불편한 용기’를 갖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참조를 위해 비교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2000년 전후로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이 등장한 이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는 항상 중요한 화두였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무관심하거나, 부담감을 느끼거나, 최악의 경우엔 사측의 구사대로 동원되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을 거듭 경험하면서,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정규직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다는 (분리주의적) 감정을 갖게 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물론 이런 분열은 결과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고, 반대로 오직 자본가들의 힘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과연 그게 가능한가?

 

여전히 현실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간에 분열의 골은 깊지만, 이 분열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도 중단되지 않고 있다. 은연중에 현실에 안주하며 알량한 기득권을 붙잡고 있으려는 그간의 정규직 노동자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들이 있다. 편협한 이해관계를 넘어 정규직 노동자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해야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성장하며 새로운 노동자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노동조합에 속해 있는 조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갖지 못한 미조직 노동자들과 손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의 숫자는 아직 적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조직과 미조직, 대공장과 중소하청 등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모든 장벽을 넘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한 운동을 건설하려는 노동자들이 분명히 있다. 이들과 함께 분투하면서 지금껏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쓰라린 감정을 안겨줬던 운동과는 다른 종류의 노동자 단결운동을 현실에서 만들어낼 때, 비로소 그간의 분열과 낙담을 대대적으로 씻어내는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혜화역 집회가 우리 사회에 던진 물음에 노동자운동이 응답하는 방식도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걸 현실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한, 혜화역에 모였던 여성들은 지금 당장 붙잡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분리주의적’일지라도 말이다. 

 

이들과 의미 있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운동 자신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단결이라는 깃발을 들고 지금까지의 편협한 틀을 깨부수는 새로운 운동을 조직하는 데 있다. 모든 여성 노동자가 겪고 있는 고통과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임금차별, 해고, 성추행, 성폭력에 맞선 투쟁에 노동자운동이 전면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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