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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 사회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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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조회 2,295회 2022-06-3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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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정의운동의 탈성장담론

 

자본주의 산업화가 불러온 기후재앙이 눈앞에 당도한 지금 기후정의운동의 정당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현재 기후정의운동에 참가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탈성장이란 의제가 의심할 여지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가치로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올해 3월 개최된 체제전환을 위한 기후정의포럼에서 발표된 체제전환을 위해 기후정의동맹을 건설하자는 발제문(한재각)의 한 대목을 보자.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분리해낼 수 없는 속성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무한히 이윤을 창출하고 축적하려는 철칙을 관철하기 위해 끝없이 경제 규모를 성장시켜 왔으며, 이에 필요한 값싼 노동과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노동자를, 여성을, 지구적 남반부의 민중들(이는 한 국가에서도 존재한다)을 그리고 비인간 동물을 포함한 지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파괴해왔다.” 탈성장이란 기후위기 대응의 자본주의적 흐름(대표적으로 녹색성장, 그린뉴딜 등)과 단절하고, 기후운동을 체제전환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재정립하기 위한 핵심 가치다.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무정부성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탈성장담론은 물론 긍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후정의운동의 주요 담론으로 등장한 탈성장은 과연 사회주의자가 전면적으로 수용할 만한 가치일까? 이 글의 목적은 바로 이 점을 살펴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사이토 고헤이가 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Degrowth)>란 책을 살펴보았다.

 

탈성장담론은 반드시 개량주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가?

 

압축적이고 효율적인 논의 진행을 위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보자.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나 요르고스 칼리스 등이 쓴 <디그로쓰> 모두, 실천적 대안으로써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 되찾기, 지역 공동체에서의 상호부조와 협력, 개인 소비 방식의 전환 등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개량주의 정책이다. 자본가들의 이윤 생산을 법적폭력적 수단으로 보장하는 자본가 국가권력의 문제를 간과한 채, 그저 소수의 깨어있는 행동을 점차 확산시켜 나가면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뒤엎을 수 있다는 몽상 말이다.

 

그렇다면 탈성장의 문제의식이 위와 같은 개량주의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은, ‘탈성장담론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탈성장담론 자체는 사회주의자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생태학적 가치이며, 사회주의자들은 탈성장담론의 연장선상에서도 개량주의자들과 다른 혁명적 실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까? 이 글의 결론은 전자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 지상주의?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사이토 고헤이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마르크스가 젊은 날에는 생산력 지상주의자이면서 유럽 중심주의자였다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도달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탈성장 코뮤니즘이란 정상(定常)형 경제에 근거한 지속 가능성과 평등이 자본주의에 저항할 거점이 되어 미래 사회의 기초가 된다고 보는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탈성장형 경제.

 

사이토 고헤이가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자본> 3권에서 사회적 물질대사자연적 물질대사상의 교란과 균열이라는 개념을 발굴해낸 것은 유명한 이론적 성과다. 그러나 이 점을 인정하더라도, 마르크스가 젊은 날에는 생산력 지상주의자였다가 만년에 여기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오독이다. 예컨대 사이토 고헤이는 만년의 마르크스가 러시아의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러시아는 코뮤니즘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명하게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러시아가 미르라는 농촌공동체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시종일관한 입장을 표명해 왔다. <공산당 선언>의 러시아어판 서문(1882)에서 그들은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노동자 혁명에 신호를 보내고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그때 러시아의 토지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이 말은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을 뛰어넘어 공산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엥겔스가 1875년에 쓴 <러시아의 사회상태>란 저작에서는 위 말의 의미가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돼 있다. 공동체를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개조로 이끄는 데 있어서 주도권은 그것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공업 프롤레타리아트들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 그와 연계된 사회적으로 지휘되는 생산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체, 그것은 러시아 공동체를 동일한 단계로 고양시키는 데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이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러시아의 농촌공동체가 빠른 속도로 분해되는 것에 주목한다. 1894년 쓰인 <러시아의 사회상태> 후기에서 엥겔스는, “(러시아가) 일단 자본주의 경제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면, 다른 세속적인 민족들과 완전히 똑같이 이 제도의 가차없는 법칙을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라고 쓴 마르크스의 편지를 인용한다. 마르크스가 생산력 지상주의’,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 비유럽권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뛰어넘어 코뮤니즘으로 이행할 가능성을 설파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말 그대로 견강부회(牽强附會)일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양면성

 

탈성장담론을 받아들이는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 모두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요르고스 칼리스의 경우 생산력 발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좀 더 명료하게 드러낸다. 예컨대 이기적 경쟁을 기반 삼은 단종상품 경제의 세계화가, 인류 역사 전 기간에 사회적 진화의 동력이었던 무수한 형태의 상호부조 활동을 계속 갉아먹었던 것으로 보인다.”라는 대목이 그렇다. 그에게 사회적 진화의 동력은 자본주의 이전 공동체 속에 존재했던 자율적인 상호부조 활동이며, 자본주의 산업화는 이를 훼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도 단순한 접근이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양면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가 식민지 조선에 철도를 부설한 목적은 대륙 진출을 통해 일본 독점자본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철도 부설이 조선의 전통적 상호부조 활동을 뿌리째 뒤엎었던 침략 행위였던 것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단 부설된 철도는 동시에 진보적 역할을 수행했는데, 1921년 레닌이 조선의 혁명가 이동휘에게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철도는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가능케 한 물질적 기반이기도 했다. (3.1 운동보다 불과 수십 년 앞섰던 1862년 임술농민봉기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삼남 지역만으로 제한됐던 것과 비교된다.)

 

즉 자본주의 생산력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 필요하다. 레닌은 헤겔 <논리학>을 읽으며 남긴 메모에서, “간단히 말해서 변증법이란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이며, 변증법적 부정이란 연관의 계기로서의 부정, 발전의 계기로서의 부정,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부정이라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산력 발전의 양면성을 주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자본주의 생산과정 속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혁명적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성숙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 안에 내재 된 긍정적인 것의 핵심이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생산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자본의 집중, 집적을 도모한다. 그런데 그 과정은 동시에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을 집결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집단적 생산에 필수적인 사회적 규율을 확립시키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노동자들에게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둘째,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소유관계가 제아무리 공동체적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거치지 않은 미발달된 생산력 수준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모색하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생산력의 발전 없이는 결여가 단지 궁핍만을 일반화할 뿐이고, 따라서 궁핍과 함께 필수품을 둘러싼 투쟁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 수 없()” 때문이다(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의 예견은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최초의 노동자국가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실증된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대로, “일반화된 결핍”, “소비재의 빈곤과 이에 따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소련 관료집단의 통치 기반이었던 것이다(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

 

이런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권리는 아직 불평등이 붙어있는 부르주아적 권리일 수밖에 없으며,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극복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생산력 성장이라는 경제적 토대가 필수적이라고 보았다(<고타 강령 초안 비판>).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 모두 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원리와 한참 동떨어져 있다. 위 두 가지 점을 아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들은 왜 돌봄 노동에 주목하는가?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 모두 돌봄 노동에 전략적 지위를 부여한다. 사이토 고헤이가 돌봄 노동을 중시하는 이유는 돌봄 노동이 기계화가 어려워서 인간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노동집약적산업이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은 사용가치 생산을 중시하는 노동이다. 특히 탈성장 코뮤니즘이 돌봄노동에 주목하는 것은 세계 각지에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하여 들고일어나는 이들이 바로 돌봄노동 종사자들이기 때문이다. ‘돌봄 계급의 반역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주 관리로 나아갈 가능성 역시 가진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한 부문으로서 돌봄 노동자가 조직되고, 투쟁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넘어서는 대안 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다. 특히 돌봄 노동이 주로 여성들에게 전가되는 현실에서,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은 여성과 남성의 성별 분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분할하려는 자본에 맞선 노동자계급 단결 투쟁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유독 돌봄 노동에만 전략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노동조건이 가장 열악하다는 존재 조건이, 그 자체로 가장 전투적인 실천이나 다른 노동자계급 부문을 선도할 역량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자본주의 이윤 생산의 중심이 돌봄 노동 부문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부 시장화된 고가(高價)의 돌봄서비스, 그리고 가정에서 무급으로 행해지는 돌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돌봄 임금노동의 보수는 국가와 지자체의 공적 재원으로 부담된다. 보육교사의 보육료, 요양보호사의 장기요양보험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노동조건은 자본가 정부가 얼마나 많은 재원을 지출하느냐로 결정되는데, 자본가 정부의 지출 규모는 자본주의 경제의 경기 순환이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즉 민간 자본의 이윤율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돌봄 노동에 주목하는 것일까? 요르고스 칼리스의 글에서 직접적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요르고스 칼리스 등은 <디그로쓰(Degrowth)>에서 기본 소득을 제안한다. “탈성장과 보조를 맞추는 다른 UBI(Universal Basic Income, 보편 기본 소득) 정책들은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하고, 환경 파괴 체제에서 벗어나는 대전환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의 조성을 촉구한다.” 자본주의가 등장시킨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자본주의의 착취 질서를 뒤엎을 거대한 혁명적 주체를 발견한다. 반면 요르고스 칼리스는 임금 노동자계급을 보면서 개인을 착취적 고용에서 해방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그것이 기본 소득이다. (물론 기본 소득이 어디에서 산출되는지에 대한 답은 없다.)

 

특히 기본 소득은 보편 돌봄 소득(UCI, Universal Care Income)’으로 구체화된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우리는 보편 돌봄 소득을 제안한다. 이것은 성별 분화가 심각한 무급 돌봄 활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 돌봄 소득론은 우리 자신, 우리의 친족과 다른 많은 이들을 돌보는 우리 모두의 역량과 활동에 우리 모두의 부를 투자하는 것으로 보편 소득을 이해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해 형평과 연대를 촉진하고자 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주장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요르고스 칼리스는 자신의 주장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차용된 것임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페미니스트들은 상업적 영역에 포섭되지 않은, 시장 밑에 숨어 있는 가정 내 돌봄, 의료 돌봄, 식료품 제공 돌봄, 어린이와 병약자와 노인을 위한 돌봄 같은 돌봄 노동을 포함하여, 노동과 관련이 있는 비판작업과 대중 조직화를 선도해왔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성인에게 풀타임 노동을 요구하며 노동을 쥐어짜는 경제 시스템 (바로 이것을 통해서 매일, 세대를 넘어 인간의 삶과 집단과 자연환경이 재생산되고 있다) 안에 기본 구조로서 존재하는, 여성들의 희생에 관한 우리의 인식을 증진시켜 왔다.”

 

자본주의의 생산 영역(또는 이윤 생산의 중심부)에서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임금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재생산 영역(또는 생산관계의 외부)에서 무급으로 돌봄에 종사하는 여성들, 지역 커뮤니티에서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자본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들이 변혁의 주체로 호명된다. 그래서 돌봄 노동에 전략적 지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즉 이들이 차용하는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같은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존속해왔다고 보는 페미니즘이며, 자본주의의 핵심을 임금노동 관계에서의 착취가 아니라 약탈로 보고 자급자족 경제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페미니즘이다.

 

마리아 미스가 1991년에 쓴 소비자해방이란 글에는 동일한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이 글에서 마리아 미스는 거대한 경제단위에서는 생태적 지속가능성, 자립, 여성과 어린이의 욕구를 우선시할 수 없다. 이것들은 훨씬 더 작고 분산된 단위를 필요로 한다. 그렇게 되면 생산과 소비가 조율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소비의 필요에 생산을 맞추는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결정을 내리는 데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소규모 경제단위는 공동체 내의 협동을 용이하게 하며, 자립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고, 상부상조와 호혜성 같은 덕목이 작용하도록 만들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마리아 미스가 이 글에서 주목한 소비자운동은 일본의 세이까쯔클럽이다. 세이까쯔클럽의 소비자 운동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이어주는 대안적 경로를 통해 자본의 이윤 생산을 종식시키겠다는 운동이다.

 

이런 식의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 이 글에서 길게 논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대목에서 시종일관 자신의 탈성장론은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탈성장론과는 다르다고 강조하는 사이토 고헤이가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얘기를 했다는 점만은 짚고 넘어가자. “억제 없는 소비에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자본의 전제아래에서는 자기 억제의 자유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다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행위라고.”

 

풀뿌리 협동조합으로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을까?

 

먼저 사회주의 사회의 민주적 노동자권력은 구소련 등의 관료적 지령경제와는 다른 민주적 계획경제를 운용하리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민주적 노동자권력은 국가 단위에서, 산업 단위에서, 지역 단위에서, 사업장 단위에서, 부서 단위에서 중층화된 민주적 의사결정 체계를 유기적으로 운영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재생에너지, 보건의료, 돌봄 기기, 유해위험작업에 투입할 로봇 등 꼭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집중적인 자원 투입을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도모하려 할 것이다. 반면 개인의 허영과 과시적 소비를 위할 뿐이며 생태환경에 부담을 주는 불필요 생산부문에 대해서는 탈성장을 넘어 아예 생산 축소와 폐지를 결정할 것이다. 나아가 노동자권력 내부에서는 우선적으로 충족돼야 하는 사회적 필요가 무엇인지, 인간의 필요 충족과 생태환경의 보존 사이에서 균형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 등등을 두고 다양한 견해와 사상이 맞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권력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앙집중적 차원에서도 행할 것이 분명하다. 노동자권력은 사업장 단위, 부서 단위, 지역 단위 등 풀뿌리 민주주의의 활성화를 전폭적으로 긍정하면서도, 이를 중앙집중적으로 모아내는 작업을 동시에 수행할 수밖에 없다. 현대의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은 국가적 차원에서, 더 나아가서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조정과 통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이토 고헤이나 요르고스 칼리스는 지역 협동조합을 통한 커먼(common, 공공재)’의 공동체적 소유를 주장한다. 물론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강령이다. 그러나 이들은 커먼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을,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우회한 채 시민들의 자발적인 상호부조와 협력을 통해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구체적으로 사이토 고헤이는 “‘커먼의 핵심은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자율적수평적으로 공동 관리하는 것이므로, 전력 부문을 국유화하는 대신 시민전력회사와 에너지협동조합으로 재생에너지를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력을 국유화해도 원자력발전처럼 닫힌 기술이 도입되면 여전히 안전성 등에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가 국가권력 장악의 필요성을 보는 곳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자본가 국가권력 외부 시민들의 협동조합이라는 대안을 발견한다. 사이토 고헤이는 명시적으로 “‘커먼을 관리할 때 반드시 국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흔히 지적되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두고 얘기해 보자.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넘쳐 생산되고, 어느 지역에서는 전력이 부족할 수 있다. 현대사회의 전력 수요를 원만하게 보장하기 위해 전력망을 촘촘히 연결해 전력의 효율적 생산, 저장, 교환을 도모하는 것이, 과연 일개 지역 협동조합 차원에서 실현 가능한 일인가? 어느 지역에서는 시민 협동조합이 전력을 생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옆 지역에서는 이윤에 눈먼 거대자본이 전력을 생산, 판매 중일 것이다. 게다가 자본가 국가권력은 자본의 이윤 생산을 보장하기 위해 폭력적 수단의 사용을 서슴지 않는다. 사실 자본의 이윤 보장을 위해 자본가 국가가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소규모로 운영되는 시민전력회사가 대공업적 방식으로 운영하는 거대 전력회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이토 고헤이와 요르고스 칼리스는 바르셀로나의 협동조합 운동과 사회연대경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바르셀로나는 전 세계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곳이다. 그러나 사회연대경제가 바르셀로나 전체 일자리 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 총생산액은 바르셀로나 전체 GDP7% 정도에 불과하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고작 저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한 채 상호부조적 커먼을 확장해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뛰어넘겠다는 생각, 현대적 생산력을 중앙집중적 방식으로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대신 소규모 공동체의 상호부조를 통해 소꿉장난 식으로 자급자족하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무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벼르고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소부르주아 사회주의라 부를 수밖에 없다.

 

탈성장담론의 한계

 

결론을 요약해보자. ‘탈성장담론은 자본주의 생산 발전의 양면성,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 발전이 미래 사회로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주객관적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 실천적 귀결은 임금 노동자계급이 갖는 전략적 중심성에서 이탈하는 것(반복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중앙집중화된 노동자 생산통제 대신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소비자운동을 비롯한 풀뿌리 상호부조 활동에 머무르는 것이다.

 

탈성장담론에서 가장 왼쪽에 있다고 자처할 사이토 고헤이가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토마 피케티의 사회주의를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는 게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이들에겐 자본의 이윤 생산을 폭력적 수단으로 수호하는 자본가 국가권력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

 

반면 사회주의자는 국가권력을 사멸시키고 공동체 성원 간의 진정한 상호부조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즉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다는 목적의식 아래 일상적 실천을 조직한다. 이런 의미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는 잠정적으로만 국가를 필요로 할 뿐이며, “우리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피억압계급의 잠정적인 독재가 계급을 폐지하는 데 필수적이듯이, 착취자에 대항하여 국가권력의 도구와 원천들과 수단들을 잠정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썼다(<국가와 혁명>).

 

눈앞의 현실이 된 기후재앙을 해결하기 위해서 자본의 이윤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탈성장론자들과 우리 사이에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혁명적 독재가 불가피하며, 이를 통해서만 사회의 근본적 개조가 가능하다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견해다. 이것이 그들과 우리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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