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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6) I 투쟁은 온전한 나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 –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경인지회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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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이혜정후원회원 조회 3,221회 2022-04-2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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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 여섯 번째 인터뷰 기사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경인지회의 강지영(가명, 40대 초반) 동지다. 강지영 동지는 이 인터뷰에서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남편과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투쟁과 파업을 거치며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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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의해 봉쇄되었던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원주 농성장. 당시 농성장을 오가던 조합원들은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조합원들을 만나기 위해 경찰을 피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만 했다. [사진 :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지부]



여성 억압을 학습해왔던 어린 시절

 

저희는 아들이 없는 집이에요. 딸만 셋인 집의 첫째 딸로 태어나 자랐어요. 할머니가 엄마와 우리 자매들을 많이 괴롭히셨어요. 막내에게는 유독 심했죠. 고추 하나 달고 나오지 못했다고요. 엄마에게도 늘 구박하셨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하고 웃으며 넘어가시곤 했어요. 하루는 엄마도 참다 못해 할머니에게 한마디 하셨는데, 할머니가 엄마에게 소리 지르시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요. “대도 못 잇는 것이!”

 

하루는 엄마가 안 보여서 엄마를 찾았는데 뒷마당에서 울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엄마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내가 아들 낳아서 엄마 하나 줄게.” 어린 내 눈에도 엄마의 삶이 고되어 보였나 봐요.

 

시골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지어서 종일 집을 비웠어요. 그러다 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제가 밥을 해서 동생들 챙겨 먹이고 했어요. 엄마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하게 된 거죠. 엄마가 되도록 우리 저녁을 챙겨주려고 부리나케 집으로 오긴 했지만 못 오시는 날이 많았어요. 동생들은 배고프다 하고, 어떻게 해요. 밥도 하고 계란 후라이도 해서 간장밥 해서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했죠. 어느 날 엄마가 나한테 속상하다면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꼬맹이가, 너도 애긴데, 동생들 챙긴다고 밥 해 가지고 먹이고 있어?”

 

사춘기 때는 집에 일찍 안 들어가고 일부러 막차 타고 들어가고, 아빠한테도 대들고 그랬죠. 할머니가 엄마를 괴롭히는데, 아빠는 엄마에게만 참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결혼하고 정말로 아들만 둘을 낳은 거예요. 첫째 임신하고 병원에서 아들이래요. 세상에 둘째도 아들이래요. 엄마 원 다 풀어드렸다고 그랬죠. 시골집 내려가면 동네 사람들 다 와서 아들 둘 낳은 딸내미가 왔다고 구경 와요. 그래서 요즘은 엄마한테 그래요. 사위까지 아들 셋 다 엄마가 데리고 가라고. 지금도 옛날 이야기하면 울다가 웃다가 그래요.

 

너는 내 와이프니까 너는 안 돼

 

우리 남편은 저의 귀가 시간을 통제해요. 10시를 넘기면 큰일이 나요. “다음번에는 너 못 나가라는 이야기가 나오죠. 원주에서 파업할 때 23일 농성 갈 때도 여자가 어디서 외박을 하느냐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서 며칠을 설득했어요. 반드시 내가 가야만 하는 이유를요. 그러면 남편은 다른 사람 많은데 왜 하필 네가 가야 하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해요. 그래도 그렇게 마찰과 설득을 거듭해 이제는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주말에 이렇게 나올 수 있는 거예요.

 

뉴스에 보도된 늦은 시간 귀가하다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의 사례를 들먹이면서 늦은 귀가는 안 된다는 식이에요. “너는 내 와이프니까 너는 안 돼라는 거죠. 본인은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해요.

 

저는 사실 결혼을 일찍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 자랐어요. 큰 애가 벌써 고3이에요. 저는 아이들 때문에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남편 때문에 나가질 못해요.

 

20대 초반에 남편과 결혼했거든요.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요. 남편이 처음 연애한 사람이었어요. 손에 물 안 묻히게 해준다고 해서 홀딱 넘어갔어요, 남편은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라서 그런지 여자는 일하지 말고 집에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요. 제가 일을 하면 자기가 너무 자존심이 상한대요. 저는 일을 너무 하고 싶었거든요. 둘째가 초등학교 들어간 뒤에야 남편을 설득해서 결혼 후 처음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됐어요. 그리고 조금씩 일하는 시간을 늘려서 지금 건보 고객센터에서까지 일하게 되었죠. 아주 오래 남편을 설득해야 했어요.

 

투쟁계획이 잡히면 남편 설득할 계획부터 짜야 해요

 

저는 결혼과 출산을 일찍 한 편이라 아이들이 이제 다 성장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육아에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적은 편이죠. 파업 때 로비 점거나 행진을 하게 될 경우 제가 다 참여하게 됐어요. 남편은 제가 앞장서서 투쟁하는 게 불만이었어요. 투쟁 일정 며칠 전부터 말을 안 하는 방식으로 저에게 불만을 표출해요. 남편의 주장은 노동조합에 활동할 사람이 너밖에 없느냐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결국 콜센터 때려치워!”로 끝나게 되거든요.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서 지지는 못 해줄망정 이런 식으로 이래라저래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바로잡으려고 이 활동을 하는 것인데 내 결정을 왜 존중해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어요. 그러다 싸우게 됐죠. 늘 그렇게 싸우게 돼요. 저는 남편과의 충돌을 만들지 않으려 굉장히 애쓰는 편이에요. 갈등 상황이 너무 고통스럽거든요. 그래서 충돌 직전까지 남편을 꾸준히 설득하려고 애써요. 그래도 안 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상황이 싫어서 남편이 원치 않는 것을 하지 않으려다 보니 활동이 위축되는 거예요.

 

남편들에게 직장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 쉽게 돌아오는 대답이 그럼 때려치워거든요. 그런데 부인들은 남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왜 남자들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너무 답답해요. 남편은 제가 살림만 하기를 바라는데, 저는 저 스스로도 경제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일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노동조합 활동도 마찬가지이구요.

 

남편 몰래 가입한 노동조합이라 파업 때 외박이 불가피한 투쟁이 잡힌 경우는 못 가게 했어요. 그래도 계속 설득을 한 결과 지금은 어느 정도는 가능하게는 되었어요. 그래서 투쟁 계획이 나왔다, 그러면 그때부터 밑작업을 해야 하는 거예요. 며칠 동안 계획을 잡고 설득하는 거죠.

 

남편 이야기는 이거예요. 너는 엄마고 내 아내인데 노동조합에 정신이 팔려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 제가 가정을 깨고 있다는 거예요. 제가 안 하는 게 뭐가 있어요? 아이들 다 키워놓았고 투쟁갈 때는 집안일 다 해놓고 나가요. 그냥 제가 집에 있기만을 바라는 거죠. 저는 지금 제 이름을 찾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제 자리를 찾아 나가는 지금이 정말 좋아요. 그런데 그걸 하지 못하게 하니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폭언을 들으면 볼륨을 낮추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에요

 

저희는 고객들로부터 수많은 종류의 폭력을 경험하는데요. 남자 상담사가 받으면 그렇지 않은데, 여자 상담사가 받으면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고, 정말 하대하거든요. 상대가 욕을 퍼붓는데도 전화를 쉽게 끊을 수가 없어요.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된다고 상담사가 대응을 하게 될 경우 우리에게 남는 건 관리자의 호된 평가뿐이에요. 왜 적절하게 호응어(쿠션어)를 쓰지 않느냐는 거죠. 심지어 저희는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쿠션어 리스트를 적어서 모니터 앞에 붙여줘요. 그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점수가 깎이죠. 고객의 말 한마디에 점수가 오락가락하니까 친절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강요받는 거죠.

 

그나마 성희롱이 발생할 때는 바로 경고를 누를 수가 있어요. 1차 경고를 누르면 처벌 조항 안내멘트가 나가요. 그런데 욕설은 바로 경고를 누를 수가 없고, 한 번은 푸시업을 해야 해요. ‘그렇게 욕설하시면 더 이상 상담을 해드릴 수가 없다고 직접 안내를 해야 하는 거죠. 저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욕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 욕을 들으면서 단 한 번이라도 대응하면 관리자들이 그걸 들으면서 평가를 해요. 대개가 상담사가 쿠션어를 적절하게 쓰지 않아서 고객이 화났다고 해석하죠.

 

게다가 고객이 아무리 우리를 모욕해도 욕설이 들어가지 않으면 경고도 누를 수 없어요. 우리의 권리를 보호해 줄 장치가 전혀 없어요. 그러니 그냥 계속 참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는 상대가 폭언을 하면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면서 볼륨을 낮춰요. 소리라도 작게 들으려고요. 콜을 팀장이 듣는 것도 싫고, 그 콜을 듣고 나를 평가하는 것도 싫어서 경고를 누르지 않거든요. 해결하는 과정이 너무 폭력적이잖아요. 소리라도 작게 들어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방법을 써요.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으니까 내가 나를 지켜야 하는 거죠. 이렇게 개인이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노동조합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어요. 저는 우리가 투쟁을 이어 나가면 일터의 폭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누군가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내 이름은 강지영

 

어제는 오랜만에 집회 끝나고 동지들과 함께 회식도 하고 노래방도 갔었어요. 노래방이 9시까지밖에 안 하잖아요. 얼마나 아쉽던지. 그나마 어제는 집회가 일찍 끝나서 가능한 회식이었어요. 우리 가정주부들은 늦은 시간 하는 회식에는 참여할 수가 없는데, 어제 같은 날은 기회잖아요. 동지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즐겁게 웃고 하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거든요.

 

저는 투쟁 가방이 있어요. 원주 갈 때도 그렇고 나가면 일주일 정도 걸릴 때가 많으니까 항상 투쟁키트를 챙겨놓거든요. 투쟁갈 때는 그걸 딱 챙겨 들고 가는 거죠. 우리 원주에서 투쟁할 때 경인지회 동지들 중에 원주까지 출퇴근하면서 오가는 동지들이 있었어요. 그 동지들은 아이가 어리거나 해서 외박을 할 수가 없으니까 몇 사람이 모여서 원주를 오갔어요. 퇴근하면서 자가용으로 원주까지 와서 얼굴 보고 가거나 쉬는 날에는 아이들 밥 챙겨 먹이고 몇 시간을 운전해서 오는 거죠. 세상에, 얼마나 고마워요. 어디서 이런 동지들을 만나겠어요. 투쟁이 제게 선물해 준 아주 소중한 부분들이에요.

 

저는 노동조합 활동하고, 파업투쟁 거치면서 많이 변했어요. 남편의 영향으로 여자는 이래야 해”, “엄마는 이래야 해라는 알게 모르게 각인된 기준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나는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내이기도 하지만 강지영이기도 하거든요. 내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인 거죠. 앞으로도 누구누구의 엄마나 아내가 아닌 강지영으로 살아가고 싶어요. 가정 내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투쟁해나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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