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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4) I 도시락 싸는 아내, 누워 있는 남편 - SK브로드밴드 홈앤서비스 신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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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이영미 조회 4,446회 2022-03-3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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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동조합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면 그냥 흘러갈 것이 많았을 거예요. 노동조합 가입을 하면서 이러면 안 되고, 이게 힘든 거구나, 이런 건 당연한 게 아니구나, 하는 걸 느끼며 사는 66년생 신순남입니다. SK브로드밴드 홈앤서비스에서 일하고 있고요. 조금 있으면 정년인데, 정년이 늘어날까요? 

 

긴 연필, 계란후라이는 아들 차지

 

유복하진 않았지만, 밥을 굶어 배가 고픈 어린 시절을 보내진 않았어요. 3남매 중 장녀로 여동생, 남동생이 있어요.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막내로 태어난 아들은 우리 집안의 아주 귀한 몸이었어요. 아빠는 기대를 많이 했고, 엄마는 맹목적이었죠.

 

남동생의 연필은 언제나 길었고, 우리 자매는 남동생이 싫증 낸 연필을 썼어요. 남동생의 도시락에 계란후라이가 올려졌길래, 기대하고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밥만 딸랑 있었죠. 커서 엄마에게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면 언제 그랬냐며 정색을 하세요. 하지만 지금도 아들만 챙기는 엄마를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엄마 마음이 그러신가 보다 해요.

 

~기 아가씨 놀고 있으면

 

장애가 있어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집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동네 아줌마가 보고 일손이 부족하니까 와서 일하라고 엄마한테 얘길 한 거예요. 엄마는 그런 데 보내려니까 미안해하며 슬쩍 나한테 물어보더라고요. 내가 괜찮다고 해서 처음 일을 시작했어요. 아가방이라고 아기 옷 만드는 곳인데 일하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다 보조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는데 다른 데서 월급을 더 준다고 해서 옮겼어요. 시다를 하고 있었는데 미싱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껄쩍껄쩍 밟았더니 바늘이 움직이더라고요.

 

잠바 같은 옷에 코코(똑딱이 단추) 달고, 다음엔 주머니도 만들었죠. 그러다 남편 만나 결혼하면서 옷 하나 다 만들어보지 못하고 그만뒀어요.

 

용기가 없었어요

 

봉제공장엔 막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하고 온 아이들이 있었어요. 하루 반나절씩 계속 돌렸어요, 진짜 그렇게 돌렸어요. 야간도 엄청나게 시켰죠. 한번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시골에서 올라온 자매들이 살고 있던 봉제공장 기숙사를 간 적이 있어요. 무슨 판잣집 같은데, 계단을 올라가면 한 칸씩 나눠서 방을 만들어놨더라고요. 그 둘이 추운 곳에서 수그리고 사는 모습이 너무 속상해서 울었어요. 나는 퇴근하면 되는데, 물량을 못 빼는 날이면 기숙사에 있는 애들을 중간중간 불러내서 일을 시켰죠. 그리곤 아이스크림 하나씩 던져주는 게 다였어요. 식당도 있었는데 쥐가 나오는 곳에서 밥을 먹고 그랬어요. 말도 함부로 하고.

 

어느 날 회사 경리가 이런저런 이야길 하면서 같이 공부 좀 해보자 그러더라고요. 여자 세 명이 같이 작은 방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어디선가 대학생들이 오기도 했죠. 그때 공산당 책도 처음으로 봤어요. 박노해 시인 시집도 읽고 백두산도 읽고, 노동 관련된 노래도 그때 많이 배웠어요.

 

80년대에 투쟁이 많았잖아요. 투쟁도 같이 따라다니면서 대학로에 간 적이 있어요. 그때 막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하는데 난 너무 무서웠어요. 뒤에 있다가 경찰에 쫓겨 옥상으로 도망갔죠. 그러고 나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오다가 경찰한테 들켜서 끌려갔어요. 경찰이 쌍욕을 해대고, 막 못되게 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 안 했어요.

 

지금 노동조합 하는 건 그때 그 분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도 당당하게 할 수 있구나! 이런 의식이 생긴 거죠.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해야지 하는 용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조금 발을 들이다가 말았던 거죠. 너무 무서웠으니까요.

 

무방비 상태로 한 임신

 

봉제공장을 오래 다니진 못했어요. 다니다 88년에 남편을 만나 연애를 좀 하다가 아이를 갖고 바로 그만뒀어요. 혼전 임신이어서 엄마한테 엄청나게 혼나고, 여동생도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동네 창피하다며 핀잔을 줬어요. 내가 철이 없기도 했고, 핑계일 수 있지만 우리 때는 피임 그런 교육이 전혀 없었어요. 그냥 무방비로 놓여버려서 나도 창피하더라고요. 임신하니까 속도 안 좋고, 미싱 바늘이 왔다 갔다 해서 더 이상 못하겠더라고요. 바로 그만뒀죠. 결혼하기 전에는 먹고사는 걱정은 안 했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힘들었죠. 돈이 없으니 창동에 살다가 미아리 살다가, 은평으로 이사를 했죠.

 

입에서 단맛이 날 거다

 

결혼하고 집에만 있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 엄마가 하나로(통신) 오픈하니까 한번 가보라고 해서 가서 면접을 봤죠. 그때는 노동조합이 없었어요. 사무실 한쪽 벽면에 인터넷 가입 경쟁시키려고 상담사마다 실적표를 만들어놓고 뒤처진 사람들은 불러서 야단도 쳤죠. 상담사를 뽑을 때는 외모를 보고 채용하기도 하고, 저녁에 따로 부르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나는 그저 장애인임에도 나를 써주는 것에 감사했어요. 그리고 10년 동안 살림만 하다 사회생활을 한 게 처음이어서 좋았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사촌 언니가 애 키우면서 일 다니면 입에서 단맛이 날 거다 그랬는데 진짜 그러더라고요. 일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냥 눕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잖아요. 애가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니까 신경 쓸 것도 많이 생기고. 남편도 늦게 오니까 다 내 몫이었죠.

 

아이 학교에서 엄마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새벽에 급식 식자재 검토하는 일을 자처했어요. 연차도 쓸 수 없으니, 새벽에 학교 갔다가 출근하는 거죠. 아빠가 해도 되는데 왜 다 엄마 몫인지 모르겠어요. 한 번은 일하고 있는데 아들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요. 아이가 넘어져 많이 다쳤다고요.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하다 조장 언니가 말해줘서 겨우 한 시간 일찍 갔네요. 눈물은 나오고 진짜 이렇게 돈을 벌어야 하나 그랬어요. 그래도 박차고 나올 수 없으니까 그냥 버티고 앉아 있었던 거죠.

 

몰래 한 노동조합

 

노동조합이 생겨 신랑 몰래 가입했어요. 왜냐면 반대할 게 뻔하니까. 같이 일하던 내근직 중에서도 나 혼자 가입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내근직들이 저하고 밥도 같이 안 먹었어요.

 

근데 우리가 파업하면서 저녁 문화제 참석하고, 막걸리 한잔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집에 가면 12시잖아요.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어요. 그랬더니 당장 그만두라고 요새 노동조합은 무슨 황제라는 얘길 하는 거예요. 현대자동차 노조도 우리보다 더 받는데, 더 받으려고 한다고요. 내가 그랬죠. 아니다, 그들이 그만큼 받기 위해서 얼마큼 희생과 투쟁을 해서 된 건지 아느냐고. 그렇게 (투쟁)하지 않고서 난 이만큼밖에 못 받는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죠


하여튼 엄청나게 싸웠어요. 싸우고 나왔다가 들어가려니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결국 찜질방에서 잤죠. 이후에도 계속 싸워서 내가 남편한테 너무 안 맞으니까 나가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돈을 달라고 해서 입금해 주니 직장 근처에 오피스텔을 빌려 나가더라고요. 근데 나가서도 맨날 전화해서 어디냐? 뭐하냐? 물었어요. 결국, 한 달을 못 버티고 들어오더라고요. 둘이 그랬네요, 진짜.

 

내가 버틴 이유

 

나는 여기에서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자는 나 혼자만 가입한 상태이니) 내가 힘들어서 만약에 탈퇴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 저들이 나를 볼 때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포기할 줄 알았어라고 하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끝까지 버틴 거죠. 그리고 봉제공장 다닐 때도 그렇고 하나로 다닐 때도 그렇고 노동조합이 없었어요. 그러니 연차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아이가 아픈데도 그냥 일해야 했고. 그래서 실제 이직률도 굉장히 높았어요. 근데 노동조합이 딱 생긴다고 하니까 그래 한번에 싹 바꿔보자는 것보다 하나씩이라도 조금씩 바꿔보자는 생각이었어요.

 

도시락 싸는 아내, 누워 있는 남편

 

남편이 하는 말이 자기가 돈도 벌어다 주니까 살림 잘하고, 퇴근시간 맞춰서 밥 차려주고 그러면 일등 부인이라고 해요. 여자가 늦게까지 술 먹고 돌아다닌다고 싫어하죠. 근데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많이 싸워요. 부단히 그런 남편의 생각을 깨보려고 노력하는데 아직도 쉽지 않아요. 남편이 잘나갈 때는 그만두라는 소리를 엄청 많이 했어요. 내가 벌면 얼마나 버냐고. 벌어서 치장하고 차비로 하고 고생하니 차라리 집에 있으면서 자기가 벌어다 준 돈 알뜰하게 쓰면 그게 더 이익일 수도 있다고 해요. 그러면 나는 왜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냐고, 나도 나름대로 전문직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왜 그걸 쉽게 말하냐고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자유로워지긴 했어요.

 

남편이 최근에 코로나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아파트 경비로 일하고 있어요. 주간 이틀, 야간 이틀, 휴무 식으로 돌아가죠. 남편이 주간에 나갈 때는 새벽에 일어나 누룽지라도 끓여주고, 도시락을 싸주죠. 남편 출근시키고 간단한 집안일 하고 서둘러 출근하죠. 내가 쉬는 날도 어김없이 남편 근무시간에 맞게 일어나서 새벽밥하고, 도시락 싸고 다시 자든지 해요


하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죠. 남편이 쉬고 내가 출근하는 날 남편은 일어나지 않아요. 가든지 말든지. 되게 웃긴 게 뭐냐면 내가 일이 늦게 끝나 집에 늦게 들어가도 남편이 밥을 안 먹고 기다려요. 그러면 난 또 부리나케 콩나물국이라도 끓여서 밥상을 차리죠. 그럼 치워주기라도 하면 좋은데 자기 컵 하나 안 씻고 그냥 식탁에 올려둬요.

 

쉽지 않지만

 

여전히 현장에서 바뀌지 않은 부분도 많아요. 동료들끼리 밥을 먹으면서 자리에도 없는 여성 조합원을 남성 조합원에게 어떠냐고 묻는다든지, 얼굴평을 하는 일도 있어요. 남자하고 여자하고 하는 일이 다르다 보니 서로의 직무에 대한 이해도 낮아서 서로 날이 서는 일도 있고요. 남녀 직군 간 기본급 동일적용 부분은 그나마 조금씩 좁혀지고 있긴 해요. 보건휴가 유급 적용은 매년 임단협 요구로 올라가고 있는데 아직도 해결되진 않았어요. 그래도 지금은 아프면 언제든지 연차를 쓸 수 있어요.

 

아직 해야 할 게 많지만 조금씩 바꿔가야죠. 진짜 쉽지 않지만 싸워가야죠. 나 역시 평소에 무심히 여자니까 이래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고, 남성 조합원들의 여성 차별적인 대화에 같이 끼곤 했으니까요.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으로 서 있는 기준이 은연중에 드러나곤 한 거죠. 요즘 우리 여자들이 똑똑해진 거 같아요. 우리처럼은 안 했으면 좋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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