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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2) I 딸, 엄마, 며느리에서 당당한 노동자로 - 자동차 공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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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이영미 조회 4,776회 2022-03-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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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지도 못할 거 왜 낳았어?” 

 

오빠 셋에 언니 둘, 그리고 여동생까지 34녀 중 여섯째예요. 집은 가난했고 오빠와 언니들도 일찌감치 고향을 떠났어요. 아버지는 선생님이셨는데 늑막염으로 몸이 안 좋아 집에 있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품앗이를 다니며 생계를 꾸렸어요. 그래서 내가 집안일을 다 할 수밖에 없었죠. 내가 키가 작은데도 똥지게도 지고 밭에 거름도 주고, 나무도 하고. 콩 뽑고, 산에 심은 벼도 베고 다 했어요.

 

초등학교 다니면서 납부금이 없어서 못 가기도 했어요. 한번은 선생님이 애들 앞에서 망신을 준 거예요. 학교 간다고 나와서 다리 밑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있거나, 논에 쌓아놓은 볏짚에 들어가 있다가 애들 끝나는 시간에 집에 오기도 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1년 쉬고 중학교 가고, 졸업하고 또 1년 쉬었다 야간고등학교에 가고, 그렇게 학교를 다녔네요.

 

중학교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 합격하고도 못 가고 엄마랑 밭을 매다 합격한 친구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속상해서 엄마한테 소리를 질렀어요. “가르치지도 못할 거 왜 낳았어?” 사실 엄마도 나를 원래 안 낳으려고 했는데 수술할 돈이 없어서 낳았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엄마한테 했던 모진 말이 커서도 맘에 걸려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때의 이야기를 했어요.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어렵게 중학교 졸업을 하고 공주여고에 합격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 갔어요. 서울에서 야간고등학교라도 다니려고 올라왔다가 대전에 있는 충남방적에 들어갔어요. 엄청나게 큰 공장이었고, 일하면서 야간고등학교도 다닐 수 있었죠. 기계 수리하고 관리하는 사람만 남자고 거의 내 또래거나 저보다 어린 여자였어요.

 

하루 할당량을 다해야 퇴근을 할 수 있었고 강제로 잔업을 시키면 무조건 해야 했어요. 또 일이 끝나면 청소하라고 잡아두기도 했고요. 잠자고 학교 가야 하는데도 말이에요.

 

야간학교를 다니며 수학여행을 갔었어요. 즐겁게 놀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공장 건물이 보이니까 다들 우는 거예요. 일하면서 학교 다니느라 고생하는 거 생각하니까 다들 울었겠지요. 그래도 거기 다니면서 여동생 고등학교까지 등록금을 보탰어요. 봉급날 되면 엄마가 돈을 가지러 왔죠.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노동조합하면 취직하기 힘들대요

 

공장 다니면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빠들 권유에 서울로 왔어요. 오빠들이 그동안 힘들었으니 우선 좀 쉬라고 하는데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서 그런지 6일이 지나니 쉴 수가 없었어요. 일자리를 찾다 다시 들어간 곳이 부천의 대경전자였어요. 소사극장에 걸린 회사광고에 내가 일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죠.

 

당시엔 길거리 다니면 맨날 최루탄 터트리고 엄청 심했어요. 금성전자인가에서 먼저 데모가 일어나고 우리 공장으로 다른 노조원들이 쳐들어왔어요. 공장에 진을 치고 한여름에 되게 오랫동안 데모를 했어요. 일도 못 하게 했죠. 노조가 없었는데 그렇게 하면서 갑자기 노조가 생기고 다들 가입을 했어요. 내가 가입을 안 하니까 집까지 찾아오기도 했어요. 가입하면 다른 데 취직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가입을 안 했죠.

 

돈도 벌어야 하고, 아이도 챙겨야 하고

 

남편은 가난했지만 유머감각이 있고 생활력이 강해 보여 결혼했어요. 가정에 보탬이 되려고 계속 일을 해야 했어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집에서 부업을 했고, 애를 안고 다니면서 보험회사도 다녔어요. 남편이 못 다니게 하려고 애를 데리고 다니라고 했거든요. 애도 안아야지, 쇼핑백도 들어야지, 땀은 삐질삐질 나고 화장하고 가면 엉망이 되고 그랬죠. 좀 지나서 남편이 허락하고 나서야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다닐 수 있었죠. 그 후 작은 전자회사를 다닌 것도 집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어서 다닌 거예요. 마트도 다녔었고요. 홈플러스에 다닐 때는 없었던 노조가 그만두니 생겼더라고요. 만약 내가 있을 때라면 같은 여자들이고 해서 나도 신나게 했을 거예요.

 

태양초, 태풍, 그리고 임종

 

시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병 간호를 하기 위해 일을 그만뒀어요. 치매까지 있었거든요. 1년이 지나고 병원에서 퇴원을 하라 하고, 요양원에는 안 가시겠다고 해서 집으로 모셨어요. 기저귀를 채워놔도 자꾸 만져서 여기저기 발라놓기도 하시고 했죠. 어릴 적 할머니 생각도 나고 부모님은 잘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렇게 잘 모신다고 모셨는데 7~8년이 된 거죠. 사람이 마비가 오면 각목처럼 몸이 뻣뻣해서 살이 안 쪄도 무거워져서 엄청 힘들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배냇똥을 싸시더라구요. 근데 하필 그때 김장때 쓸 태양초를 만든다고 고추 40kg을 샀네요. 엄청 심한 태풍도 온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배냇똥을 보시면 치우고, 실에 고추를 꿰고, 그리고 창문 유리에 태풍 막는다고 신문지 붙이고.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고) 태풍이 온 마지막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쉽게 쓰고, 쉽게 자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시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아봤어요. 큰 회사를 다녀야 한다는 생각도 있어 지금 공장에 지원했죠. 처음에 갔을 때 아웃소싱이란 걸 이해 못했어요. 정직원이 안 된다고 해서 물었더니 그냥 안 된다고 하길래 일단 들어가 보자고 하고 들어온 거죠.

 

어느 정도 지나니 내가 하던 검사업무가 다른 곳으로 빠지면서 그만두라고 했어요. 우리 좀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딱 잘라 안 된다고 하더라구요. 계속 다니려면 조립라인으로 가서 하라고 해서 3명은 그만두고 나만 남았어요.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남자들이 하던 일도 안 해본 게 없어서(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못 가고 여름엔 물 먹을 시간도 없어요. 산더미처럼 쌓인 물량은 퇴근시간까지 끝낼 수가 없었어요. 근데 야간에 남자직원들이 일 끝났다고 불을 다 꺼버리고 퇴근을 하기도 했어요. 깜깜한 곳에서 남은 범퍼를 적재하고 작업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달렸죠. 마스크를 쓰고 작업복을 입고 일해도 집에 와서 씻으면 몸속까지 새카맣게 변해 닦아도 닦이지도 않아요. 계속 문질러대니까 빨갛게 부어오른 걸 보고 어떤 사람이 화상을 입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온몸이 아파서 퇴근하고 한의원을 다녔어요. 관절이 다 튀어나오고 염증이 생기고, 손이 퉁퉁 부어서 주먹이 안 쥐어지더라구요. 손톱도 다 빠지고.

 

근데 더 힘든 건 젊은 남자직원들이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거였어요. 자기네들 불편하다고 욕지거리도 하고. 내가 나가야 남자를 뽑을 수 있다고 했죠. 이사가 전화해서 협박도 하고, 손목이 아파서 다른 공정으로 옮겨 달라고 했더니 자기는 남녀평등이라는 얘길 하더라구요. 직장은 할 수 있는 일만 하려면 직원들 전체 싸인을 받아오라고도 했지요. 되게 웃기더라구요.

 

나를 내보내려고 힘든 공정에 보내고, 엄청 괴롭힌 거죠. 전 이사는 나를 짤라야 자기가 산다고 생각했는데(계속 싸우니까) 결국 못 짜르고 자신이 짤렸어요. 회사에선 불법파견소송을 감안해서 일부러 여자들만 일하는 공정을 없앤 거 같아요.

 

함께해주는 이들이 있기에

 

이전에는 노동조합에 한 번 가입하면 다른 직장에 취직하기 힘들 거라는 소리에 선택할 수 없었어요.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절실했으니까요. 이번에는 가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니면 나가야 했으니까요. 엄청 고민했죠. 나와 같은 여자들이 많아서 한꺼번에 가입하고 해야지 힘이 되는데, 우리는 남자들도 다 가입한 게 아니고 소수고, 여자는 나 혼자고, 나이도 있고 해서 현장순회 같은 거 할 때도 쉽지 않더라구요.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나보고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자기는 짤릴까봐 가입 못 한다면서. 그래도 주변에서 많이 함께해줘서 그렇지, 아니면 나왔을 거예요. 노동조합 가입하고 산재신청도 하고, 직장 내 괴롭힘으로 고발도 했어요. 남자에게 맞춰진 작업대 개선투쟁도 벌였고요. (소수지만) 남자 조합원들이 같이 싸워주면서 엄청 힘이 됐어요.

 

노조 가입 안 하면 짤려요

 

처음엔 피해 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에라 이판사판이라 생각하면서 해요. 조회시간에 당당하게 내 주장을 해요. 그러니까 걔네들도 포기했나봐요. 지네들이 뭐라 한다고 우리가 파업 안 할 거 아니니까요. 이제 관리자들이 앞에서만큼은 공손하게 해요. 개선해야 할 것 말하면 듣는 시늉도 하고요.

 

출퇴근 시간 선전전하며 서 있을 때 주저하기도 하지만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식사시간에 식당에서 유인물 배포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 권리를 위해서 싸우는 거죠 뭐. 다른 여성노동자들이 가입하면 짤릴 거라고 해서 오히려 가입 안 하면 짤릴 거라고 얘기하기도 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같이 노조 가입해서 한꺼번에 해야 회사에서 무서워하는데 바보 같아요.

 

엄마 모습이 속상한 딸

 

일하고 퇴근해서 집안일 하는 게 너무 힘들어 그대로 뻗어요. 그래도 시장 보고, 식사를 마련하죠. 남편은 나보고 (직장을 다녀도)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아들한테 해주라고 해요. 술 먹고 온 다음 날에는 꼭 국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죠. 처음엔 술국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코로나 때문에 힘든데 왜 데모를 하나 그러기에 내가 비정규직이다’, ‘해고자들이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성질을 냈어요. 나중엔 TV에 노동자 집회 뉴스가 나오면 저기 갔다 왔냐고 묻더라고요. 우리 공장이 나오면 나 찾아봤다고, 본 거 같다고 하고요. 괜히 잡혀 가면 안 되니까 앞에 나가서 하지 말라고 해요.

 

우리 딸은 스스로 아르바이트 해가며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했어요. 모녀지간이 바뀐 것처럼 엄마를 챙겨요. 얼마 전에 자신은 비혼은 아닌데 결혼해서 행복하라는 법도 없고 애들을 경제적인 거 감당하면서 어떻게 키우냐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힘들게 일하는 걸 속상해하면서 나중에 엄마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 주겠다고 해요.

 

나도 몰랐지만 뭉쳐야 해요

 

젊었을 때는 어디라도 쑤시고 들어가서 일했는데 지금은 갱년기도 오고 몸도 안 좋고 하니까 자신감이 떨어져요. 먼지를 뒤집어 쓰고 비를 맞으면서 일해야 하니까 자존감도 떨어진 것 같고요. 내가 다시 취업을 하려고 보면 몇 세 이상 나오잖아요. 가고 싶고, 실력이 있어도 나이 제한에 딱 걸리니까 갈 수가 없어요. 급여도 적고. 그렇게 살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흘렀고 지나고 보니 열심히 살았지만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거 같아요.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재밌는 삶, 다른 사람도 생각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현재만 보지 말고 미래를 위해서 뭉쳐야 해요. 그냥 개인으로는 바뀌지가 않더라구요. 지금도 여성 노동자들은 더 일할 자리가 없으니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짤릴까봐 불안해서 노동조합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근데 나도 몰랐던 것처럼 아직은 많은 사람들도 잘 몰라서 뭉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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