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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1) I 사계절 꽃이 피더라고요 - 공공운수노조 울산지역본부 들국화분회 사무장 김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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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정리 배예주 조회 4,339회 2022-03-1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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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차별만사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서사에서 확인되듯, 투쟁의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계급의 주체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다시 가족 내로 회귀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과연 우리의 투쟁 과정들이 여성 노동자들의 가부장제 내 억압을 해소하는 과정이 되어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가부장제가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다소 거창하고도 어려운 작업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여성 노동자들을 인터뷰하고, 그 인터뷰 내용들을 성실하게 기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려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기록물을 바탕으로 여성들의 투쟁 경험과 그들의 생애 경험 사이의 연관성,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다름 아닌 여성 노동자 당사자의 목소리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도출해보려 합니다.

 

310, 한 여성 노동자의 목소리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이 목소리들을 통해 우리가 젠더차별 현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동지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310일부터 연재되는 인터뷰글은 축약본입니다. 원문의 형태는 축약본 연재가 끝난 후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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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꽃이 피는 줄 모르고 살았어요. 대학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건물 앞 나무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다.



가족을 떠나 신발공장으로

 

1964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어요. 9남매 중 일곱째고, 딸로 셋째예요. 아빠는 애들 공부시키기 힘들고 오빠가 줄줄이 있으니까 중학생이었던 제게 공부를 그만두게 했어요. 옛날 아빠들은 그랬어요. 남자는 공부를 시키고 여자는 공부를 안 시키고. 엄마는 딸들도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하셨지만, 아버지가 경제권을 갖고 계시니 그게 안 됐어요. 저는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멀리 돈 벌러 가게 됐어요.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으로 일하러 갔어요.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저는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해 밤 9, 10시까지도 잔업이 많았어요. 시키는 대로 옆은 안 쳐다보고 오로지 일만 했어요. 퇴근할 때는 일일이 몸수색을 했어요. 혹시 뭘 가져가나 해서죠. 기숙사에는 사감이 있어서 드나드는 것도 경비실에 다 보고하고 감시가 심했어요.

 

월급봉투를 받으면 아버지한테 그대로 보냈어요. 제 위 오빠가 고등학교에 다니고, 그 위의 오빠도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집에 돈을 다 보냈죠. 저는 기숙사에 있으니까 돈을 쓰지 않았어요. 그때는 다 그랬으니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죠. 몇 해 지나서 집에서 여동생도 부산으로 보냈어요. 같이 공장에 다니라고요.

 

결혼하고 아이 키우며 돈을 벌며

 

22살에 결혼을 했죠. 남편은 기술직이고, 일하는 시간이 길었어요. 바쁘면 저녁에도 일해주고, 10시까지도 해주고 그랬어요. 이직도 잦았어요. 자녀는 딸 하나, 아들 하나인데 남편 직장을 따라 여기저기 이사 다녔어요. 생활비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아이들 봐줄 사람이 없어서 직장에는 다닐 수 없었어요.

 

처음 한 부업은 쇼핑백 접기였어요. 쇼핑백 각을 딱 맞춰 접는 일이었어요. 두 번째는 밤 까기였는데, 기술이 없어서 겉껍질만 깠죠. 식당 일도 하고, 우유 배달도 했어요. 아이들이 초등학교 가면서 신문 삽지 일을 했어요.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삽지하고 새벽 5시에 내다 놓았어요. 통학로의 고속도로 쪽 횡단보도가 위험해서 아이들 데려다줘야 하니까 그 일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정작 같이 사는 남편은 이해를 못 했어요. 나보고 빨리 잔다고 뭐라 했죠.

 

삼시세끼 아내

 

남편은 아이들을 잘 돌보지 않았어요. 설거지 한번을 안 했어요. 남편이 따뜻한 밥을 좋아해서 끼니때마다 새로 밥을 해야 했어요. 남편 퇴근 시간 즈음에 동생이랑 이웃이 제게 저기, 니네 시어머니 오신다, 밥하러 가야겠다고 놀리기도 했어요. 이렇게 살아야 하나보다 싶었지만 한 번씩 화가 나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크고 남편과 다투기도 했어요. 한집에 살면서 말을 거의 안 했어요. 외로움도 느꼈어요.

 

약속을 안 지키는 엄마

 

아이들이 장난감 하나 사달라고 하면, ‘엄마 돈 있을 때 사줄게말했죠. 그러고는 아이를 그냥 끌고 데려왔어요. 그래도 애들이 말을 잘 듣고 따라왔어요. 나중에도 약속을 안 지켰고, 장난감 하나도 제대로 안 사줬어요. 그런데 주인집 아들내미는 시장 가면 내내 울면서 사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엄마는 사줬거든요. 우리 애들은 고집을 안 피웠어요. 오히려 미안했죠.

 

학원도 제대로 못 보냈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알아서 잘 자라준 것 같아요. 아이들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볼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아이들에게 미안해요.

 

사계절 꽃이 피는지 모르고 살았어요

 

IMF 때 남편이 실직해서 제가 아예 취업을 나갔어요. 1998년에 대학교 청소 일을 했고, 몇 년 뒤 한의원 탕제 일을 시작해서 10년간 했어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했죠. 사계절마다 꽃이 피는지 몰랐어요. 토요일도 오후 3시까지 일했어요. 퇴근하면 집안일 해야지요, 월요일이면 또 출근해서 토요일까지 일해야지요, 숨 쉴 틈 없이 일했어요.

 

나중에는 한의원이 잘 안됐거든요. 어느 날 부장이 퇴근하고 전화를 했어요. 너무 안 되니까 두 사람을 쓸 수가 없다고. 그렇게 10년 동안 해온 일을 그만두게 됐죠. 한의원 잘리고 나서는 혼자서 놀 줄도 몰랐어요. 일만 다니다가 갑자기 놀게 되니까요. 그러다가 아는 사람 식당 일도 거들다가 다시 대학교 청소 일을 하게 됐어요.

 

근로기준법의 기쁨

 

2013년 울산대학교 청소업체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학교 건물 내부 사무실, 강의실, 복도, 화장실이랑 건물 외부 등을 청소해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숨 쉴 틈 없이 일하다가 학교 청소 일을 하니까 진짜 좋은 거예요. 왜냐면 시간을 딱 정해놓고 일하고 딱 마치죠, 연차도 쓸 수가 있죠, 노동시간이 정말 좋은 거예요. 사회적 편견이 있어서 내가 어디 가서 청소한다고 먼저 말은 못 해도 노동법이 준수되니까 그게 진짜 좋은 거예요.

 

3천 원 때문에 시작한 노동조합

 

2016년에 아파서 입원한 직원이 두 분 있었어요. 보통 동료 병문안 갈 때 사비로 뭘 사가거나 했어요. 그러다가 업체 노동자들 전부가 앞으로는 한 달에 3천 원씩 내서 그 돈으로 병문안 갈 때 위로금을 주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직원들 전부 좋다, 시작하자고 의견이 모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회사 팀장이 개입했어요. ‘세월 가면 돈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안 된다고 일방적으로 못 하게 했어요. 얘기하는 과정에서 베름빡(바람벽)에 똥칠할 때까지 일 해먹으려고 하냐는 막말을 했죠. 사태가 시끄러운 과정에 이젠 사장이 직원들 다 모인 자리에서 너희들 나 때문에 벌어먹지 않냐. 그러니까 이건 안 된다. 내 말을 들어라고 강압적인 지시를 한 거예요. 그때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우리는 노동조합을 하자고 결심했어요. 노동조합을 시작했죠.

 

청소아줌마가 아닌 노동자

 

매년 학교, 업체가 구조조정을 해요. 노조가 싸우면서 얻은 게 많지는 않지만, 계속 투쟁해요. 원청에 가서 따졌어요. ‘우리 모두 주인인데, 왜 너희만 주인 행세를 하냐? 우리도 책임감을 가지고 일한다. 학교 공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일을 빼앗냐. 만약 노동조합이 없었으면 자기들 멋대로 했을 거예요. 청소아줌마라면서 상대나 했겠어요.

 

내가 조금 변했다

 

노동조합을 하면서 입이 트였어요. 할 말을 해요. ‘이건 아니다, 요건 안전하지 않다, 요건 요렇게 해 달라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전혀 못 했는데, 노동조합 하니까 얘기를 하게 되고, 얘기할 수 있는 것 자체만도 너무 좋은 거예요. 여태 나의 삶에 대해서 모든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노동자로, 여성으로 부당하다고 느끼거나 상처받은 것도 그때는 몰랐어요. 차별을 당했을 때 대처하지 못했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참으라고만 배웠어요. 예전에는 그런가보다 따라가는 거였다면 지금은 할 말을 하죠. 세상을 알게 되니까 자신감도 있고 당당함? 어딘가 모르게 내가 당당해지는 게 있어요. 동료에게도 말한 적이 있어요, 내가 조금 변했다고.

 

가족, 같은 맥락

 

살면서 딸이고, 아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부분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내 삶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동생에게 나는 동생이 있어서 참 좋다고 말했죠. 옛날엔 그 말을 못 했어요. 딸은 무슨 일 있을 때 의논하러 와요. 노조에서 논의하듯 방향을 잡는 대화를 나누러 오는 것 같아요. 아들 집에 청소해주러 갔었는데 몇 년 전부터 알아서 하라고 끊어버렸죠.

 

전에 남편이 이렇게 하자면, ‘그래, 네 뜻을 따라줄게했어요. 결정은 항상 남편이 했는데, 이제 바뀌었어요. 어느 날 남편이 뉴스를 보면서 노동자들이 회사한테 자꾸 돈을 더 달라니까 한국에서 공장을 하기 힘들어서 외국으로 나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말했죠. ‘회사는 노동자들 때문에 돈을 벌어서 부를 축적했다, 그러면 그만큼 돌려주라는 얘기다. 노동자가 힘들여 일했으니까 사장만 다 먹지 말라는데, 사장은 그렇게 안 하고 노조 때문에 안 돼서 외국에 간다고 뒤집어씌운다, 지들만 잘 살려고 쌓아놓고, 외국의 더 싼 인력을 많이 빼먹겠다는 거다고요.

 

노동조합이 삶에 많은 변화를 준다는 느낌이 들어요. 직장하고 가정하고 다른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같은 맥락이더라고요. 사계절 꽃이 피더라고요.

 

미투운동

 

미투운동이 한창일 때 현장에서 대화한 적이 있어요. 안희정 성폭력 때 근데 여성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게 있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나와서 아니라고 말했어요. 상대방 남자가 상사고 힘 있는 사람이 한 잘못이죠. 여성 노동자가 피해를 당하고,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겠어요. 혼자만 상처를 안고 있다가 드러냈을 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겠어요. 그런데 그걸 생각하지 않고 여성이 문제라고 하면 상처를 또 보태는 것밖에 안 돼요.

 

그런 일들이 종종 드러날 때 참 마음이 아팠어요. 힘 있는 남성 편에서 하는 얘기는 문제가 많다, 만약에 내 가족이라면 저렇게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죠. 그런데 아직도 사회가 크게 안 바뀐 것 같아요.

 

외쳐요, 찾아요

 

세상은 발전하고 편해졌는데 젊은 여성을 보면 우리보다 여유가 없어 보여요. 젊은 세대는 자식 공부시키고 먹고 입힌다고 가족과 마주 앉아 대화할 시간조차 없는 것 같아요. 그만큼 살기가 힘든 거죠. 평등, 평등 외치는데 직장은 불평등하죠. 가정에서부터도 불평등하지 않나 싶네요. 불평등을 없애야 해요. 가정을 바꾸는 것도 직장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다 이어지겠지요.

 

노동자에게 권리가 있잖아요. 이건 자기 자신만 위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만이 아닌 후세를 위해서도 노조를 하고, 노동자가 다 모여서 해야 하는 게 노조라고 생각해요. 또 노동조합이 그렇게 싸워야 하겠죠. 내가 뭔가를 해야지 바뀌겠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이 노조를 하면 좋겠어요. 같이 여성 노동자의 권리를 외쳐요. 같이 권리를 찾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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