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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서평 I <불평등한 선진국> - 실패한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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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조회 4,389회 2022-02-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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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시절 기근(飢饉)의 대부분은 자연재해에 기인했다. 물론 잉여 식량을 비축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수탈도 민중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 원인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기후변동, 가뭄,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사회 전체의 식량 생산량이 급감했을 때 기근이 발생했다. 따라서 전근대에 살던 누군가를 식량 생산을 비롯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이 아찔할 정도로 증대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데려온 후, 이 시대에도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얘기하면 그 말을 믿지 않으려 들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다. 26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자선단체 푸드파운데이션 연구를 인용해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내로라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 영국에서 “(2022) 1월 한 달간 식량 불안을 경험한 사람이 전체 성인 인구 8.8%가량인 47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 성인 10명 중 1명이 끼니 걱정을 한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100만 명은 식량을 살 돈이 없어 1월에 최소 하루 이상 굶어야 했다.

 

<불평등한 선진국>

 

물론 영국만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국세청의 통합소득(근로·이자·배당·사업·연금·기타소득을 모두 합친 개인소득 합산액이다) 1000분위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위 10%와 하위 10%의 소득 격차가 더 벌어졌다. 2020년 통합소득 상위 10% 소득자 2458,194 명의 소득은 1인당 평균 13,673만 원으로, 201913,226만 원보다 447만 원 늘어난 금액이다. 하지만 통합소득 하위 10% 소득자의 연 평균 소득은 196만 원에 그쳐 2019207만 원보다 줄어들었다. 두 집단의 소득 격차는 66배다.

 

지난 1월 발간된 <불평등한 선진국>은 선진국이 됐다는 한국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 실태를 각종 통계수치로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조부모 세대는 세계 최빈국에, 부모 세대는 개발도상국에, 자녀 세대는 선진국에 살고 있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게 됐다.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고속 성장 속에서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절대적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격심해졌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4/4분기 기준으로, 소득 1분위(최하위) 가구는 월 856,685원을 버는 데 비해, 소득 10분위(최상위) 가구는 월 11,287,628원을 벌었다. 13배가 넘는다. 좀 더 세분화해서 보자면, 2019년 기준으로 통합소득 상위 0.1%24천 명은 연평균 15억 원을 벌어가며, 상위 1% 24만 명은 4, 상위 10% 240여만 명은 15천만 원을 번다. 이들 상위 1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36.57%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 1,200만 명의 평균 소득은 연 1,200만 원으로, 이들의 소득은 전체 소득의 16.45%에 불과하다.

 

빈부격차 심화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한 편이다. 소득이 중위소득(모든 가구를 소득 순으로 순위를 매겼을 때, 가운데를 차지한 가구의 소득)50% 이하인 빈곤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 한다.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7%, 2018~2019년 기준으로 OECD 37개국 가운데 네 번째로 높다. OECD 평균은 11.1%.

 

불평등 공화국 대한민국

 

<불평등한 선진국>은 대한민국의 불평등 실태를 개괄적으로 살펴본 이후, ‘대한민국 불평등의 근원, 노동’, ‘불평등의 중심, 청년’, ‘불평등으로 해체되는 대한민국, 가족 해체·노인 자살·지방 소멸’, ‘불평등이 향하는 곳, 소수자순으로 사회 각계각층이 처한 현실을 통계를 들어 날것 그대로 드러낸다. 책을 덮는 순간 드는 생각은 과연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 하나뿐이다.

 

사회 각 영역의 불평등은 씨줄 날줄로 연결돼 거대한 지옥도를 펼쳐낸다. 저자의 지적대로 불평등의 근원은 노동이다. 전체 노동자의 7.4%를 차지하는 대기업 정규직 초봉은 월 305만 원 수준이다. 반면 중소기업 정규직은 월 191만 원,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월 138만 원에 불과하다. (이 격차는 계속 커진다. 근속연수 1년마다 대기업의 시간당 임금 상승률은 3.2%이지만 중소기업은 2.8%에 그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은 청년들이 입시 경쟁, 취업 경쟁에 올인해야 하는 직접적 이유다. 한국고용정보원이 2009~2010년 상위 10개 대학 졸업자의 월 급여를 조사한 결과, 이들의 급여는 수도권 대학 및 지방대 졸업자들보다 약 6~70만 원가량 많았다. <1999~2008년 한국에서 대졸자 간 임금격차의 변화> 논문에 따르면, 소위 명문대 졸업자와 4년제 전체 졸업자 사이의 임금 격차는 19993.8%에서 200823.1%까지 늘어났다. 게다가 청년들이 모두 대졸자인 것은 아니다(현재 대학 진학률은 70% 정도다). 비정규직의 70.3%는 고졸 이하 학력으로 구성돼 있다. 2019년 고졸 청년(25~29)의 평균 월 임금은 262만 원으로, 대졸 청년(25~29)302만 원보다 40만 원가량 적었다.

 

물론 청년들의 입시 경쟁, 취업 경쟁은 다시 부모의 소득 수준과 맞물려 있다. 2019년 기준으로 가구소득 월 800만 원 이상인 집에서는 사교육비로 월 53.9만 원, 700만 원 이상인 집에서는 월 46.4만 원, 600만 원 이상인 집에서는 월 40.4만 원을 쓴다. 반면 가구소득 월 300만 원 미만인 가구에서는 월 17만 원, 200만 원 미만인 가구에서는 월 10.4만 원에 그친다. 인터넷 강의 정도나 보는 수준이다. 사교육 격차는 입시 성적과 직결된다. 2018년 분석 자료에 따르면 서울 시내 8개 의대 학생들의 55%는 상위 20% 소득 가구 출신이며, SKY는 그 비율이 전체의 46%(상위 20% 소득의 하한선은 월 소득 903만 원이다). 2021년 서울대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 입학 상위 고등학교 중 1~26위가 특목고와 자사고였다. 2019년 기준 외고의 평균 학비는 1년에 1,154만 원, 공립국제고는 평균 902만 원. 자사고는 평균 연 886만 원이었다.

 

이 책에서 가장 암울한 통계는 불평등으로 해체되는 대한민국, 가족 해체·노인 자살·지방 소멸대목에 수록돼 있다. 흔히들 2~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지적하지만, 절대적 수치에서 실제 자살자 수는 노인층에서 가장 많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20대는 19.2, 30대는 26.9명인 반면, 60대의 자살자 수는 10만 명당 46.2, 70대는 46.2, 80대 이상은 67.4 명에 이른다. 2017년 기준 66세 이상 노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은 무려 44.0%OECD 전체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대부분의 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20%를 넘지 않으며 미국조차 23.1%.

 

2020년 합계출산율이 0.84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급속한 노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방 소멸이다. 유소년(0~14) 인구 100명당 고령 인구 수를 노령화지수라고 한다. 2020년 한국의 노령화지수는 119.1명이다(선진국 평균은 172, 세계 평균은 82). 문제는 한국의 저출생 고령화가 지속되면서, 65세 이상 인구가 60%에 육박하고 0~14세 인구는 5%밖에 되지 않는 경북 군위군, 의성군 등의 모습이 바로 30년 후 대한민국 대부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노령화지수 전망치는  2036년에 315.9명, 2060년에는 546.1명에 이른다!

 

누군가의 생산적 활동이 없다면, 누구도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미 사회적 불평등은 여성, 이주 노동자, 장애인, 주거 취약계층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낳는 중이다. 심각해지는 저출생 고령화 양상이 앞으로 노인층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증대시키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불평등 심화는 세계적 현상

 

그런데 오늘날의 불평등 심화는 단지 일국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빠져든 위기의 한 단면임을 인식해야 한다. 뤼카 샨셀르, 토마 피케티 등이 참여하는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작년 12월 펴낸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World Inequality Report 2022’)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에서 1970년대 이후 상위 1%의 자산과 하위 50%의 자산 격차가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혁명으로 상징되는 거대한 노동자투쟁과 전후 호황을 거치며 축소됐던 빈부격차가 1970년대 경제위기 이후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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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격차도 마찬가지다. 2020년 전 세계 소득의 19.3%를 상위 1%, 전체의 52.2%를 상위 10%가 차지했다. 반면 하위 50%의 소득은 8.4%에 불과했다. 2019년에 비하면 상위 1%10%는 소득 점유율에서 변화가 없었지만, 하위 50%0.1%포인트 낮아졌다. 보고서는 “2020년 상위 10%의 평균 소득은 하위 50%보다 38배가 높았다이는 1910년 제국주의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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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오늘날 자본가 정치인들이 더 이상 공동체 전체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유다. 몇 주 앞으로 다가온 한국 대선판에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그들은 더 이상 거대 담론을 언급하지 않는다. 어떤 논리로도 오늘날의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불러온 격심한 불평등 실태를 방어할 수 없으며, 어떤 거짓말로도 자본주의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암울할 것이란 현실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계급 간 격차가 극명해진 자본주의의 현실이 자본가 정치인들조차 함부로 허튼소리를 내뱉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대신 진영 논리에 따른 상호 비방(똑같은 놈들끼리!),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만 정치판에 가득할 뿐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자본주의는 이론의 여지 없이, 명명백백하게 실패했다. 한편에서는 거대한 사회적 부를 쌓아 올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쟁에서 낙오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루 평균 36.1명씩 자살(2020년 한국 자살자 통계)하는 체제에 어찌 희망이 있겠는가. 누군가 지적한 대로, “이제 인류사회는 이 체제를 끝내자는 생각보다 이 체제를 유지하자는 생각이 더 위험하며, 이 체제를 끝내거나 바꾸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인류 전체의 존속이 위태로워지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2022. 1. 6. <한겨레>, “김명인 칼럼 : 신춘몽상 자본주의여 안녕”)

 

대증요법(對症療法)이 아니라 발본색원(拔本塞源)이 절실하다!

 

자본주의가 심화시키는 불평등, 갖가지 사회적 억압과 차별 앞에 여러 처방전이 등장한다. 그러나 질병의 근원은 놔둔 채 대증요법(對症療法)으로 진통제 몇 알 처방하고 말겠다는 돌팔이들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소득 상위 10% 중 최상위 1%를 제외한 차상위 9%가 전체 소득의 31.8%를 가져가니(상위 1%14.7%, 하위 50%16.0%를 가져간다), 대기업 정규직 상층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 저임금 노동자들의 소득을 높이자는 이른바 연대임금론 등이 대표적인 돌팔이 처방이다.

 

첫째, 2019<소득별 주요 구간 비중 추이>에 따르면, 상위 0.1%가 전체 배당소득의 47%, 상위 1%가 69.3%, 상위 10%93.1%를 가져간다. 이자소득 역시 상위 0.1%가 전체 이자소득의 17.43%, 상위 1%45.48%, 상위 10%91%를 가져간다. 임대소득도 상위 10%가 전체의 48%를 차지한다. 즉 고소득자일수록 근로소득이 아니라 이자와 배당, 임대소득이 소득에서 주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상위 0.1% 근로소득자가 전체 근로소득의 2.05%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된다.) 그렇다면 차상위 9%의 근로소득 일부를 줄인다 해서 그게 전체 소득 불평등 완화에 실질적 효과가 있을까?

 

둘째, 더욱 핵심적으로는 차상위 9%가 근로소득의 일부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자본가들의 이윤으로 귀속될 것이란 점이다. 차상위 9%가 내놓은 근로소득의 일부가 하위 50%의 근로소득으로 이전된다는 담보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한국처럼 기업별, 직종별 칸막이가 높고 초기업별 단체교섭조차 법제화되지 못한 사회에서 말이다.

 

돌팔이 대증요법 대신 질병의 근원을 도려내는 과감한 수술이 집도되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은 한 줌도 안 되는 자본가계급이 사회의 생산수단을 장악한 채 저들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계급과 전체 사회를 통제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 그 자체에 있다. 두드러지는 자산소득의 격차는 그 자체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가진 모순을 드러낸다. 사회의 권력을 움켜쥔 노동자계급이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민주적 계획경제 아래 이윤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위한 생산을 시작할 때, 그때야 비로소 자본주의가 낳은 불평등 문제의 실질적 해결이 가능하다.

 

노동자투쟁의 역사는 수차례에 걸쳐 단결한 노동자 대중이 자본가 대신 이 사회를 직접 운영할 역량이 있음을 보여줬다. 자본주의 체제의 객관적 위기가 갈수록 명약관화해지는 오늘날, 그리고 갖가지 통계 지표가 20세기 초반 혁명의 시대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오늘날, 노동자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철폐의 전망이 먼 미래에나 가능한 공상적 전망이라고 폄훼하는 것만큼이나 역사 앞에 오만한 태도는 없을 것이다.

 

촛불 항쟁의 성과를 독식했던 민주당 정권이 불과 5년 만에 몰락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체제의 물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본주의는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성장이 시급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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