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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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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로 조회 7,043회 2018-06-0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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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일 신촌의 한 극장에서 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감상했다. 영화를 본 뒤 필자는 함께 간 청년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스크린에 등장했다. 책으로만 읽어 왔던 그를 영화 속 모습으로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원적 비판을 가했던 철학자이자 혁명가다. 올해는 그의 탄생 200주년이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과 생애를 다룬 기사와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르크스의 부활을 알리는 걸까? 왜 이 시대는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잊지 못하고 계속해서 소환하는 걸까. 낡아버린 자본주의가 아직도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의 사상도 여전히 유효한 게 아닐까. 극장에 모인 청년들은 궁금증을 한가득 안고 있었다. 이 젊은이들은 마르크스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치열하게 투쟁했는지, 또 지금에 와서도 왜 끊임없이 읽히는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극장으로 모였다.

 

거인들의 문제의식의 출발점

 

마르크스를 알기 위해 그의 젊은 시절 경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는 정확히 그 시점을 첫 장면으로 묘사한다. 스크린은 1840년대 유럽의 어느 숲 속을 비추며 시작한다.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가난한 농민들이 보인다. 그들은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말을 탄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다가온다. 애써 모은 나무를 내팽개치고 도망가지만, 농민들은 결국 잔인하게 도살당한다. 수백 년 동안 땔감을 주우면서 삶을 이어오던 가난한 농민들은 왜 이렇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일까.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새롭게 제정된 법 때문에, 숲에서 땔감을 줍는 일이 절도죄가 된 것이다. 잔인한 처벌은 계속 반복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민들은 땔감 줍는 일을 “범죄로 생각하지 않았다.” 조상 대대로 그 땅에서 농작물을 심고 땔감을 모으던 그들이었고, 그들에게 이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였기 때문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지주를 비판했다. 그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농민들의 삶의 권리가 법의 이름으로 쓰인 사적소유권과 충돌하고 있는 모순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라인신문>에 기고하며 문제의식을 키워나갔다.

 

그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엥겔스도 마찬가지였다. 엥겔스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맨체스터 방적공장의 대리인으로 일했다. 비록 부르주아의 신분임에도 아버지가 비인간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에 분노했고, 그들의 비참한 처지에 연민을 느꼈다. 자본가의 자식이라는 위치가 그를 끊임없이 갈등하게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기 계급을 배반하고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란 책을 써서 억압받는 자들을 옹호했다.

 

엥겔스는 그 책에서 “여러분을 여러분의 집에서 보고 싶었고, 여러분의 일상생활을 관찰하고 싶었고, 여러분의 상황과 비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여러분을 억압하는 이들의 사회적, 정치적 권력에 대항하는 여러분의 투쟁을 목격하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목격한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기 삶의 방향을 세워냈다. 과거를 살았던 위대한 혁명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저마다의 경험을 통해 계급사회의 폭력을 인식한 것이다.

 

영화 속의 과거, 우리의 오늘

 

영화는 과거를 다룬다. 혁명가들의 가슴 떨리는 삶도 200년 가까이 지난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들의 문제의식도 단지 ‘옛날 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할 청년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부유층과 빈곤층, 유산자와 무산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계급적 대립이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형태가 과거와는 다를지라도.

 

땔감을 줍던 평범한 이들이 사적소유라는 이름 아래 죽어가는 걸 목격했던 마르크스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체제의 모순을 잔인하게 경험한다. 영화를 본 한 청년은 자신에게 큰 문제의식을 던져준 사건이 세월호였다고 말했다. 

 

“정말 큰 충격이었어요. 당시 사태를 두고 유병언이 잘못했다고 그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거나, 해경과 국가의 잘못이라는 주장이 있었죠. 근데 저는 그 이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래된 배는 쓰지 말아야 하는데, 해운업계의 요구가 작동해서 법이 바뀌었고 더 쓰도록 한 거잖아요. 구조적인 문제가 작동했기에 벌어진 사건인 거죠. 그걸 계기로 저는 더 공부하게 됐고 사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과 체제의 모순에 대해서도 알게 됐어요.” 

 

청년세대 모두가 잊지 못할 세월호의 침몰을, 그날을 아픈 기억으로 가슴 깊게 묻고 있던 이 청년은 당시의 문제가 이윤논리로 점철된 체제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청년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를 이렇게 얘기했다. 

 

“저는 직접적인 경험은 아니었지만 <레미제라블>이라는 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느꼈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빵을 훔쳐서 감옥에 가는 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법을 어겼으니 잘못했네’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은 주인공이 처한 상황과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도록 도와줬어요. 마치 나뭇가지를 줍는 가난한 사람들이 지주들에게 폭력을 당했듯, 무언가 불합리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된 거에요.” 

 

또 어떤 청년은 가난 속에서 사회의 모순을 느꼈다고 얘기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항상 저녁 6시쯤에 집에 들어오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9시가 돼서야 집에 오세요. 일하는 시간은 3시간이 늘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는데도 집안 형편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요. 열심히 살지만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하다는 게 사회의 모순이 아닐까요.”

 

젊은 청년들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삶에서 겪은 고민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 영화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우리가 겪고 있는 모순의 뿌리가 무엇인지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말문을 틔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불평등과 빈곤, 경제공황이라는 사회적 위기 속에서 도망칠 곳 없이 묶여 있는 청년들은 끊임없이 그 모순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계급적 억압과 착취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키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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