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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번역 I <99% 페미니즘 선언> 서평 : 전략에 대한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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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양준석 조회 17,915회 2021-11-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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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다트리, 셀레스테 무리쇼   I   2019820 


(안드레아 다트리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지도부로 활동하며 여성운동 단체 빵과 장미건설을 주도했다. <빵과 장미: 자본주의 아래서 젠더와 계급>을 저술했는데, 이 책은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미국에서 발행됐다. 셀레스테 무리쇼는 아르헨티나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빵과 장미에서 지도부로 활동한다. 문화와 젠더를 주로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018년 벽두, 미국에 기반을 둔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99%를 위한 페미니즘의 건설을 호소했다. 2011년 월가점령운동에서 영감을 얻은 이 개념은 낸시 프레이저, 친지아 아루짜, 티티 바타차리야가 작성한 선언으로 구체화돼, 201938일 발표됐다. (한국에서는 <99% 페미니즘 선언>이라는 책자로 20203월 번역·출판됐다. - 옮긴이)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과 저자들이 제안하는 반자본주의 전망에 대해 몇 가지 우리의 의견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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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페미니즘선언이 미국에서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7년 미국은 페미니즘 운동 부활의 진원지 가운데 하나였다. 120일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이를 거부하는 여성행진에 수백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필자 주 -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여성 살해, 성적 학대, 가해자의 형사면책, 피해자에 대한 비난 같은 남성 폭력으로 촉발된 거대한 여성 시위가 터져 나왔다.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의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2015), 이탈리아의 단 한 명도 잃을 수 없다’(2016), 스페인의 나는 너를 믿는다’(2018) 시위를 들 수 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대규모 캠페인이 전개됐는데, 이를테면 미국의 미투’(2017)나 프랑스의 그 놈을 고발하라’(2017)가 있다. 동시에 다른 운동들도 활발히 펼쳐졌는데, 폴란드의 낙태권 제한 반대 시위(2016), 아이슬랜드의 임금격차 항의 시위(2018), 아르헨티나의 낙태권 요구 시위(2018) 등이 무수히 많은 여성들의 행동을 불러 일으켰다.)

 

페미니즘의 전망과 전략에 대한 토론이 계속 활성화돼 온 연장선에서 이 선언이 나왔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저자들이 지적하듯이, 페미니즘 운동은 갈림길에 서 있다.

 

이 선언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헤게모니에 의문이 제기되는 시점에 나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수십 년 동안 젠더 평등에 관한 담론을 독점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대다수 여성의 실존을 규정하는 임금노동 착취나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문제 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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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페미니즘선언은 우리 시대의 여러 숨길 수 없는 징후를 반영하는데,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하나는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이 새롭게 힘을 얻은 것이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여성들의 시위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점 더 확대되는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우리가 보기에, (특히 여성들이 갖는) 불만의 근원에는 하나의 모순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부문들은 법 앞의 평등을 어느 정도 획득했다. 그리고 이것은 광범한 대중들 사이에서 희망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는 일상에서의 지속적인 불평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불평등은 점점 악화되고, 다수가 새로이 불법으로 내몰리는 상황과 결합된다. 이것은 특히 거대 도시들에서 성장한 세대를 짜증나게 하는데, 그들은 권리들이 확장되고 이른바 젠더 평등과 다양성 존중을 추구한다는 정책들이 시행되는 가운데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신자유주의 수십 년을 거치는 동안 축적된 끝에, 2008년 새로운 경제위기가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제위기는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만큼 극심하지는 않았지만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사회적 위기의 여러 요소가 발전하고 정치체제 자체의 부당함이 점점 더 드러나 왔다. 새로운 페미니즘 물결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장의 요구들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불만을 표현하면서 전진해 왔다.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주의

 

체제 전반의 위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는 의문이 제기됐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소수가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는 반면 훨씬 더 많은 인류가 비참한 삶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2011(“우리는 정치인과 은행가에게 지배당하는 상품이 아니다”라고 했던) 스페인의 ‘515일 운동’,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99%이고 너희는 1%라고 했던) 미국의 월가점령운동은 자신의 부모보다 삶이 악화될 거라는 사실에 맞닥뜨려야 했던 세대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2015년부터는 여성들의 거대한 운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점점 더 많은 활동적 소수가 젠더 불평등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세계적 불평등과 분리되어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정의돼 있지 않다. 스스로를 반자본주의라고 여기는 여러 형태의 페미니즘은 여전히 전체 시스템을 끝장내자는 제안 없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가장 나쁜 측면만을 겨냥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다수 여성의 문제와 요구에 응답할 능력이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자본가 민주주의 안에서 권력을 쥐는 지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다시 말해 착취를 관리하는 지위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선전함으로써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공모하고 있다.

 

이러한 출발점으로부터 선언은 이렇게 말한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이 오늘날 고려할 만한 선택으로 대두된 것은 일정 부분 정치 엘리트를 향한 신뢰가 전 세계적으로 무너진 덕이다.”(한국어판 22옮긴이. 이하 쪽수만 표기) 저자들은 힐러리 클린턴이 구현했던 페미니즘에 대해 왼쪽에서부터 도전할 것을 제안한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쇠퇴가 만든 진공 속에서 우리는 다른 페미니즘을 구축할 기회를 갖는다.”(23. 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우리는 나중에 진공이라는 단어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의 운동이 99%를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하는지”(24)를 설명하면서 정의로운 사회에 도달할 때까지 옮겨야 하는 걸음을 표시”(24)하려고 한다.

 

일치와 불일치: 선언이 말하지 않는 것

 

우리는 선언이 여러 장에 걸쳐 테제 형태로 제시한 많은 개념에 동의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선언의 규정에 동의한다. 젠더 폭력의 뿌리에 대한 선언의 규정에, 처벌 위주 해결방식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여 동의한다. 자본주의 아래서 섹슈얼리티의 정상화와 단속에 대한,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해방할 필요에 대한 선언의 규정에 동의한다.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폭력이 자본주의의 출발을 특징짓는다면서 선언이 이를 규탄하는 것에 동의한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파괴로 이끌고 있다는 선언의 규정에 동의한다. 우리는 선언이 반제국주의·생태사회주의·국제주의 페미니즘을 호소하는 것에 동의한다.

 

선언이 국제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수십 년 동안 반자본주의·사회주의·혁명주의 페미니즘 경향을 건설해 왔던 우리에겐 의미심장한 일이다. 우리는 전문가 집단이 이끄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헤게모니에 도전해 왔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해방을 위한 투쟁 대신, 법적 평등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길, 다시 말해 자본가 민주주의 안에서 권리를 확장함으로써 소수 여성들이 능력주의적 (개인적) 성취를 실현하는 길을 제시했다. 또한 우리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도 소수로서 맞서야 했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해체특권 돌아보기같은 말을 앞세우면서 마치 (개인적인) 자기인식 운동으로 특정 집단이 겪는 구조적·체계적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응답했다.

 

이번 선언이 세계적으로 매우 강력한 반향을 얻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선언의 중심에는 여성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구조적으로 억압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오직 급진적이고 집단적인 사회변혁을 통해서만 여성억압을 끝장낼 수 있다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변혁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가? 급진적 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선언은 이렇게 제안한다. “99%를 위한 페미니즘은 현재와 미래의 운동들을 광범위한 전 지구적 혁명으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한다.”(163)

 

그것이 전부다. 선언은 이 주제에 대해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들이 사회 운동들의 힘에 무한한 믿음을 갖고 있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저자들은 (선언에서 언급하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와의 대결을 준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 운동들을 포섭하고 동화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사회적 변화란 국가를 운영함으로써 또는 의회에서 활동함으로써 (즉 개량을 성취함으로써) 이뤄진다고 개념화한다. 다른 이들은 사회 문제들을 절대화하면서 정치투쟁을 무시한다. 불행하게도 급진적·변혁적 사회 운동들이 정치영역에서의 투쟁을 거부하는 것은 언제나 반동적·개량적 부문들이 이 공간을 독점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99%를 위한 페미니즘이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어떤 준비 과제들을 완료할 필요가 있는가? 저자들은 테제 11에서 대답한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그 운동들 가운데 좌파, 반자본주의 경향들과 동맹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99%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 길은 지금 자본이 제시하는 주요한 정치적 대안 두 가지를 정면으로 타격한다. 우리는 반동적인 포퓰리즘뿐 아니라 진보적인 신자유주의 역시 거부한다.”(159, 강조는 필자의 것)

 

저자들과 달리, 우리는 정치에서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반동적인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다른 정치적 대안들도 있으며, 이들 또한 자본가 민주주의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언은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의 시리자나 스페인의 포데모스 같은 좌익 포퓰리즘 또는 신개량주의 정당들이다. (시리자는 집권하자마자 그리스 민중에 맞서 트로이카와 유럽연합의 긴축 프로그램을 집행했다. 포데모스는 분노한 자들의 희망에서 1978년 체제의 일부로 스스로 전환한 뒤, 사회민주주의 계열 사회노동당에게 연립정부를 형성하자고 구걸하고 있다.)

 

사례는 이들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트럼프 같은 우익 포퓰리즘이나 다시 등장한 진보적인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제3의 대안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변종의 형태를 취하며) 시험을 거치고 있다. 스스로를 차악또는 좌익 포퓰리즘으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선언의 저자들은 테제 4에서 묻는다: “이윤 제조자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을 사유재산 축적을 위한 또 다른 기회로 바꿀 것인가? 그들은 심지어 젠더 위계를 재조직해 내면서 페미니스트 반란의 중요한 흐름들을 포섭해 낼 것인가? 아니면 자본에 맞선 대중의 반란이 마침내 폭주 기관차에 몸을 실은 인류가 비상 제동기를 거는 행위가 될 것인가?”(70)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그 답은 사건들의 단순한 전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세력들의 투쟁, 즉 운동들의 투쟁과 계급투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가계급의 전통적인 대표자들 모두가 정당성을 상실해 가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차악또는 자본가 민주주의의 가장 온화한 얼굴로 내세우는 모든 세력들의 가면을 벗기기 위해 오늘 우리가 수행하는 정치투쟁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배계급들이 진짜 반란, 자본에 맞선 대중의 반란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페미니스트 반란의 중요한 흐름들을 포섭하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널리 경고하는 것은 혁명가들에게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선언이 이러한 정치 영역에 대해 어떤 분명한 진술도 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들 가운데 두 사람은 버니 샌더스에게 투표할 생각이라고 (거의 열광적인 수준으로) 공개 선언했다. 부의 재분배와 사회주의를 말하는 버니 샌더스는 피에 굶주린 민주당의 경선 후보로 뛰고 있다. 미 제국주의의 성격이 내부로부터변화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정확히 반대다. 자본주의 체제는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들조차 통합시켜 내는, 그럼으로써 그들이 대표하는 운동들을 동화시켜 내는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왔다.

 

덧붙여, 선언의 저자들이 잘 알고 있듯이, 좌익 포퓰리즘이 선거 공간에서 우익으로부터 빼앗고 싶어 하는 “99%”는 동질의 사람들이 아니다. 반대로 “99%”는 하나의 추상적인 구조물로서, 한편에서는 중간 수준의 자본 소유자들을, 다른 한편에서는 크고 작은 자본가들에게 역사적으로 착취당해 온 이들을 포괄한다. “99%”에는 엘리트 경영자들도 포괄되는데, 그들은 엄청나게 많은 소득 덕분에 재산을 축적하고, 매우 높은 수준의 소비를 감당하며, 형편없는 임금을 받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유모·기사·요리사로 부리며 착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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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자본가들과 반식민지 자본가들은 대체로 거대하게 집중된 금융자본가들의 하위 파트너이다. 그들도 가끔 금융자본의 희생자가 되긴 한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이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해관계와 노동자계급 여성의 이해관계를 ‘1%’에 맞선 정치적 전망을 중심으로 화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수와 다르게, 정치에서의 더하기는 때때로 빼기로 귀결될 수 있다. 이것은 샌더스의 선거 캠페인에서만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마크리 대통령이 이끄는 우파 정부에 맞서 바티칸(교황청)의 후원 아래 대부분의 진보·중도좌파·중도우파 야당들이 모두를 위한 전선으로 단결했다. 미국과 아르헨티나 두 경우 모두, 이러한 단결은,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페미니즘 운동을 소 자본가들에게, 자본가 정당들에게(심지어 제국주의 당이거나 종교적인 당일지라도!) 복종시키려는, 다시 말해 페미니즘 운동을 여성의 이해관계에 맞서 또는 그에 상관없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정당들에게 복종시키려는 시도다. (필자 주 - 우리가 아르헨티나 사례를 언급한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여성의 결집이 가장 거대하게 일어난 곳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선언의 저자들도 고무적인 사례로 인용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누가 우리의 동맹이고 누가 우리의 적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의 당면 과제라고 믿는다.

 

여성 파업: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 사이의 다리?

 

“99%”라는 은유의 기반은 신자유주의 공세가 퍼부어진 수십 년 동안 착취당하는 계급들과 억압당하는 부문들이 원자화하고 파편화한 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복고가 임금생활자 계급의 외면만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임금노동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엄청나게 확장됐다는 점을 말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은 이 거대한 계급의 대략 47%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여성은 여전히 개별 가구에서 수행되는 무급 재생산 노동을 주로 책임지고 있다. 정말로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경제활동 연령 여성의 54%에 해당하는) 13억 명의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만적인 노조관료들의 향수 속에나 남아 있는 백인·남성 노동자계급이라는 이미지를 극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노동자계급의 전통적인 투쟁수단인 파업이라는 단어를 채택하는 것은 (절대적인 숫자에서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다수를 대표하는 노동자계급 구성에서의 이러한 변화들이 표현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대다수 페미니스트 조직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파업이라는 슬로건은 (여러 계급이 섞여 있고, 여전히 주로 도시의 운동이며, 소 자본가의 계몽된 부분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페미니즘이 훨씬 더 많은 부문의 여성 노동자들과 새로운 대화를 열어나가는 도구이다.

 

파업이라는 슬로건은 또한 여성들이 노동조합의 관료적인 지도부들에게 도전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조합원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요구에 대한 구체적인 지지를 실천하라고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면서 말이다. 종종 여성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듣게 하려고 노동조합 바깥에서 결집해야 하기도 하며, 때로는 심지어 노동조합에 참여할 권리 자체를 갖고 있지 못하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선언에서 언급된 파업의 재발명”(테제 1)이란 게 페미니스트들의 모든 행동이 그게 무엇이든 간에 파업으로 불릴 수 있다는 걸 뜻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노동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관념을 넓힘으로써 범위를 확장”(34)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확장된 개념의 노동의 중단을 호소하는 걸 뜻할 수도 없다고 본다. 저자들은 여성 파업 행동주의는 노동의 범주를 임금 노동에만 두는 것을 거부하고 가사노동, 섹스, 미소 또한 철회한다”(34)면서 가사노동의 중단과 섹스와 미소의 중단을 혼란스럽게 뒤섞는다. 로나 핀레이슨은 이러한 유형의 파업이 갖는 한계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임금을 지불받는 노동의 중단은 영원히 상실된 이윤의 형태로 자본가들에게 타격을 가한다. 무급 재생산 노동의 중단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만일 노동이 어린이나 나이 든 가족처럼 취약한 이들에 대한 돌봄 노동의 형태를 취한다면, 중단은 가능한 선택일 수 없다. 만일 노동이 빨래나 청소처럼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닌 경우라면, 여성이 나중에 그 일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이가 하게 될 것이다. 또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집이 점점 지저분해질 것이다. 기껏해야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부끄러워하면서 여성이 하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자본가들은 고통당하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신경도 쓰지 않는다.”

 

반대로 파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여성 임금생활자들이 고용주들·국가·노조관료들과 대결하는 데서 충분히 지원받을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쓰여야 한다. 특히 선언이 묘사하고 있듯이, “임금과 노동시간만이 아니라 성적 괴롭힘과 성폭행, 재생산 정의를 가로막는 장벽, 파업권 제한 등에도 집중”(34)할 때 말이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노조관료들의 분열 책동에 맞서 단결하기 위해 노동조합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 특히 (제조업과 서비스를 포함하여) 여성이 집중된 부문들에서 말이다. 그러나 선언은 노동자계급, 파업, 반자본주의, 계급투쟁을 말하면서도 노조관료는 언급하지 않는다. 위험하게도 선언은 노동조합 일반을 관료적 지도부의 부문주의적·경제주의적·퇴행적 정책들과 동일시한다.

 

노동자계급의 조직들을 그 관료들의 손아귀에서 되찾아 전체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민주적 조직으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하나의 준비 과제다. 그래서 정주노동자들과 이주노동자들 사이의 분열, 서로 다른 젠더를 가진 이들 사이의 분열, 직접고용 노동자들과 간접고용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강화하는 대신 그에 맞서 싸우는 조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또한 노동조합에 참여할 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를 포괄하는 조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러한 전망을 가질 때, 노동자운동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기관들은 (사실상 한 세기 이상 끊어져 있었던) 노동자계급과 페미니스트 운동을 연결하는 다리를 재건하면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파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언은 파업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자고 제안하면서도 그것을 실제로 가능하게 할 전략은 부정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계급투쟁에 기반을 둔 반자본주의·혁명주의·사회주의 전략을 위하여

 

선언은 사회적 재생산 이론의 개념 틀에 입각해 작성됐음을, 저자들은 첫 번째 테제에서부터 분명히 보여 준다. ‘자본주의는 잉여가치 추출에 기초한다는 주장이 불완전하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가 숨기려 작당한 진실, 즉 이윤 창출을 위한 임금 노동은 (대부분) 무임금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사람 만들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진실”(183~4)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임금 노동이라는 자본주의 제도는 잉여가치 이상의 것을 감춘다. 또 사회적 재생산 노동이 그 자신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라는 일종의 출생 모반을 감춘다.”(184)

 

저자들이 보기에 현재 진행 중인 자본주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다.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무급 가사노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의료·교육 등) 서비스 부문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사회적 재생산이 수행된다는 점을 포괄한다.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갖는 세 번째 측면은 제국주의가 만든 위계질서를 토대로 거대 도시들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좋은 급여를 받는 진보적 여성들이 가사노동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 이주민·유색인종 여성들을 (불안정하게) 고용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고용된 여성들은 자신의 집에서 수행돼야 할 가사노동을 누군가에게 떠넘겨야 한다. 고용된 여성들의 딸들이나 어머니는 어떤 종류의 급여도 없이 자신의 형제자매나 손자손녀를 돌보고 청소와 요리를 해야 한다. 그녀들은 이 사슬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경제주의·계급환원론·노동조합주의를 철저히 경계한다. 동시에 저자들의 논리적 귀결점에도 반대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공장이나 광산에서노동하는 이들로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저자들에 동의한다. 노동자계급은 논밭과 살림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무실·호텔·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사람들, 병원·놀이방·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 공공부문이나 시민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 일자리가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 실업자, 무보수로 일하는 사람들”(82) 모두를 포괄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구성에 대한 묘사에 동의하지만, 그로부터 끌어낸 정치적 입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부문이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는 데서 똑같이 중추적”(82)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계급투쟁은 사회적 재생산을 두고 벌어지는 투쟁 역시 아우른다”(83)면서 특히 주택공급·대중교통·무상교육을 위한 투쟁을 거론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투쟁들이 사회를 뿌리부터 가지까지 전복할 잠재력을 품은 채 이제 우리 운동의 예각을 형성한다”(84)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들의 주장과 모순되게,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이러한 운동들에 참여할 때 일반 시민으로 해소되는 것을 본다. 광범한 부문의 요구들을 반자본주의 투쟁과 융합시켜 내는 것을,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노조관료들은 대중들의 요구가 급진화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기 위해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다른 계급·부문의 정치 지도자들과 공모하며 제도권 정당들을 활용한다.

 

선언의 저자들은 테제 11에서 산업 임금 노동자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계급의 연대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약화시킨다”(162)고 말한다.

 

자본주의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생산의 (그리고 서비스의) 주된 바퀴가 굴러갈 수 있게 하는 부문의 사회적 힘이 필요하다. 바로 자본가계급의 이윤 창출이 가능하게 만드는 부문이다. (이 부문에 여성은 몇 십 년 전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이 부문은 자본주의에 의해 억압받는 다른 모든 부문과 동맹을 건설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 반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모든 페미니즘이 노동자운동의 부문주의·관료주의 지도자들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임금생활자들의 경제적 요구들과 광범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민주주의 요구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 이러한 분리는 자본주의에게 이로울 뿐이다.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사회 운동들의 (역시 관료주의·부문주의) 지도자들에도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의 집중화된 부문의 결정적 역할을 부정하면서, 민주주의 투쟁들을 제한적인 개량주의 전망 아래로 종속시키려 한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점점 더 실현불가능해지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노동자계급의 페미니즘이자 노동자계급을 위한 페미니즘이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작동을 위해 전략적 지위에 놓은 사회적 주체이다. (바로 그로부터 노동자계급은 동맹을 건설할 수 있다.) 그 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은 개량의 지평선을 넘어설 힘이 없는 운동으로 용해되고 말 것이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가장 집중화된 부문의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잠재력을 현실화하려면, 자본에 의해 억압받는 모든 부문을 (심지어 모든 계급을) 이끌려는 실질적이고 의식적인 의지를 수립해 내야만 한다.

 

그러한 의지를 수립해 내는 것 또한 하나의 준비 과제다. 새로운 페미니스트 물결이 세계적인 사회적·정치적 급진화 과정의 일부로서 등장했던 1970년대와 달리, 오늘날에는 개량주의 전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하지 않는다. 계급투쟁의 새로운 현상과 (새로운 페미니스트 물결을 포함한) 국제적인 정치적 현상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전주곡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반자본주의 페미니즘이 관객으로 머무는 것 이상이길 열망한다면, 만일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 현실에 단호히 개입하기를 열망한다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전투를 전개해서 여성운동의 다수가 이러한 혁명적 전망을 채택하고 스스로 미래의 사건들에 대비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을 오늘날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잔혹한 전체주의로 변질시켰던 경제주의 경향들에 이론적·정치적으로 반대한다. 전략적 초점을 가진 마르크스주의는, 선언을 발행한 이들처럼 가부장적 자본주의를 풍부하게 분석하고 서술해내는 것만이 아니라, 전략적 가설들을 과감히 실행하고 조직을 건설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이것은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여성들이, 억압당하고 착취당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완강하고 끈질긴 저항으로부터 승리의 쟁취로 (상황이 허락할 때) 전진할 수 있기 위해 필수적이다.

 

원문 기사

https://www.leftvoice.org/feminism-for-the-99-a-debate-about-strate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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