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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획연재① 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와 만나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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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7,595회 2018-05-2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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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배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거듭 마르크스주의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때마다 거대한 생명력을 드러냈다.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올해,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은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잊히지 않은 채 떠오르고 있다. 왜 마르크스주의는 ‘죽은 개’가 될 수 없는가? 나아가 오늘날 노동자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탐구하고 마르크스의 사상과 대화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마르크스주의의 출발 – 자본주의에 대한 단호한 규탄

 

마르크스주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갖고 있는 상식과 직관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적대적이며 자본주의 철폐를 주장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쟁과도 같은 비참한 상태를 강요하는 반동적인 체제라는 단호한 비판정신에서 출발한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낳는 치떨리는 폐해들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과학적인 대안으로 마르크스에 의해 발견됐다. ‘투사!’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가 마르크스라는 인물 속에서 탄생할 수 있는 뿌리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투사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투사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사회주의를 탄생시킬 수 있던 원천은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였다.

 

“학문은 이기적인 쾌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운이 좋아서 학문적 추구에 전념하게 된 사람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즐겨 하던 말들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러한 삶의 가치관을 죽을 때까지 일관되게 견지했다.

 

이렇게 인류를 위해 학문을 하고자 했던 선량하고 훌륭한 청년은 과거에도 많았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왜 자본주의에 맞선 열렬한 투사의 삶으로 나아갔을까?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살았던 사회와 깊이 연결돼 있었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

 

마르크스는 1818년 프랑스 국경에 인접한 독일의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다. 1842년 프로이센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절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스물네 살의 젊은 나이에 <라인신문>에서 편집진으로 일하기 시작했던 마르크스는 자연스레 정치적 저항을 시작했고,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면서 기계제 대공업 생산방식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것은 공장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탄생시켰고, 가난한 농민들을 임금노동으로 내몰았다. 마르크스는 실레지아 지역 방직공들의 봉기와 모젤 지방에서 포도를 재배하던 농민들이 받은 억압과 고통 등 노동자 민중의 비참한 삶과 대면했다. 그는 방직공들의 봉기를 전면적으로 지지했고, 그들의 민주적 권리 보장을 주장했다. 또한 사적 소유를 강화하는 새로운 법의 제정으로 숲에서 땔감을 줍는 일마저 절도죄로 처벌받아야 했던 가난한 농민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이렇게 가난한 노동자 민중과 연대하는 과정에서 마르크스는 ‘사적 소유권’을 심장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약탈성과 반인간성을 경험했고,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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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자체가 혁명적 사상의 탄생을 재촉했다.

 

그는 저물어가는 낡은 봉건적 지배체제와 함께 새롭게 떠오르는 자본주의 지배체제 모두에 맞섰다. 두 체제 모두 가난한 노동인민을 무자비하게 착취했고, 잔인하게 억압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지배체제의 뿌리, 가난한 노동인민이 겪는 고통의 뿌리에는 ‘생산수단에 대한 배타적, 독점적 소유’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했다. 당연히 그것에 대한 해결책은 ‘서로 사랑하자’는 식의 관념적 호소가 아니라 ‘지배계급에 맞선 피지배계급의 투쟁’이었다.

 

만일 절대주의의 잔인한 억압이 없었다면, 그리고 신흥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희생되고 짓밟힌 노동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의 비참한 상태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은 결코 저항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헤겔과 포이어바흐처럼, 관념철학의 상아탑에 갇힌 평범한 철학자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의 뇌가 자본주의를 타도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을 토해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를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만든 것은 바로 반동적 사회, 즉 자본주의 자체였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괴물이라면, 이 괴물은 모순으로 가득 찬 당시의 반동적 사회체제가 잉태한 것이었다. 

 

또 다시 괴물을 키우고 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이 21세기의 세계와 한국사회에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는가?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변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쓸모없는 이론이 되지 않았는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제시하는 반론이다. 과연 그럴까?

 

브라질에서는 총기사고로 매년 3만7천 명이 총에 맞아 죽는다. 인구 10만 명당 19명꼴이다. 이것을 가히 전쟁과도 같은 상태라 부를 수 있다면, 한국 역시 전쟁 중이다. 하루에 43명, 연간 1만5천 명, 매년 인구 10만 명당 무려 31명이 자살한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음을 방증한다. 동시에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거대한 생명력의 뿌리를 보여준다.

 

마르크스가 태어나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시기와 200년 후 오늘날이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분석한 자본주의의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작동하고 있다.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 즉 불평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2014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 안에 드는 부유층의 재산은 110조 달러(약 11경 7,183조 원)로, 가난한 인구 35억 명의 재산보다 65배나 많다. 사회의 부의 더 많은 부분이 자본가들 수중에 독점되면서, 그들의 권한은 모든 영역에서 커져가고 있다. 세기말적 징후라고 하는 전쟁, 범죄, 도덕적 타락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절대빈곤을 해결했다는 것을 체제 정당화의 거의 유일한 알리바이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흔들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실업률은 높은 수준을 이루고 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최소한의 인간적 삶마저 포기해야 한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의 2015년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9명 중 1명이 충분한 음식을 공급받지 못하고, 하루 1.25달러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10억 명 이상이다. 격화되는 자본주의 경쟁, 그리고 이윤율을 높이려는 자본가들의 잔인한 착취가 결합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언제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자본주의가 구세주로 삼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해법이 되지 못한다. 자본가들의 수중에 장악돼 이윤을 위해 작동하는 과학과 기술은 대규모로 일자리를 제거하고, 노동자들을 더 강력한 경쟁의 톱니바퀴 속으로 밀어 넣는 공포의 수단으로 작동해 왔다. 2016년 7월 보고서에서, ILO는 4차 산업혁명으로 앞으로 20년 사이에 아시아에서만 1억 37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명백한 상황은 만인 대 만인의 무한대의 경쟁을 강요한다. 그런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어린 학생들까지도 경쟁의 링에 올라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안정감과 행복의 가장 중요한 원천 중 하나인 연대감을 파괴한다. 고립된 개인으로 내몰려 불안정해지고 행복감을 상실한 사람들은 자살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고통에 절규하는 한국의 젊은이들

 

마르크스 이래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르크스가 규정한 그 잔인한 착취본성을 더욱 철저하게 발현해 온 것이 자본주의다. 게다가 이 자본주의의 미래 또한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한국 노동자계급 젊은이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삶이다. 

   

퇴학, 휴학 등으로 학업을 중단하거나 아예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초중고생이 30만~40만 명에 이른다. 그 일부는 조기유학을 떠나는 상류층 자녀지만, 대부분은 빈곤층 청소년이다. ‘학교 밖에서’ 서성대는 그들은 이미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있다. 뒤늦게 마음잡는다 해도 시급 4천~5천 원짜리 아르바이트로 10대와 20대를 버틴다. 그 궤적을 밟아 사실상 영구빈곤의 궤도에 오른 30대가 역시 수십만 명이다. … 

 

경제적, 사회적으로 배척당한 10~30대가 이렇게 많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나? … 내가 만난 절대 다수의 빈곤청년은 반지하방, 옥탑방, 고시원 등에 살고 있었다. … 공단에 가면 학업중단 청소년, 전문계고 졸업자, 전문대 졸업자 등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고 먹고 잔다. … 구로디지털공단은 서울 도심에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번듯한 빌딩의 밀집지대다. 빈곤을 티내지 않는다. 공단 안에 들어가면 상황이 달라진다(물론 거기 들 어가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자부품을 만드는 소공장인데, 납을 비롯해 각종 화학약품이 가득한 곳에서 환기, 냉난방 시설도 부족한 가운데 20대 청년들이 일하고 있다. … 그들의 폐와 혈관에 축적되는 중금속도 절대로 보여지지 않는다.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년들 역시 도심 곳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긴 하다. 편의점, 대형마트, 커피전문점, 백화점 등에서 일한다. … 아름다운 용모에 짙은 화장을 하고 단정하게 유니폼을 입은 백화점 화장품 매장 직원의 거의 전부는 시급 4천 원짜리 계약직이다.

 

지방으로 내려가면, 청년의 일자리는 대기업 공장에서 비롯한다. 현대, 삼성, LG, SK, 포스코 등 재벌이 운영하는 각종 제조업 공장들이다. 그런데 이들 공장에선 90년대 후반 이후, 사실상 정규직을 추가로 채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내하청 방식의 용역을 통해 비정규직만 채용했다. 지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조선소와 제철소와 자동차공장에 가보면, 정규직은 40대 이상이고 30대 이하는 모두 비정규직이다.(안수찬,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한겨레21>, 2011년 4월)

 

세상을 확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아가고 있다. 2015년 10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의 토론회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에서 발표된 조사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년 42%가 원하는 미래에 대해 “붕괴, 새로운 시작”을 선택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미래에 원하는 것으로 선택한 비율을 23%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이들의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젊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조부모나 부모 세대만 하더라도, 그들이 젊었을 때 압도적 다수가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원하는 미래로 선택했다. 조부모, 부모 세대와 지금의 젊은 세대 사이에는 어떤 강이 흐르고 있는가?

 

과거를 지배했던 패러다임은 무엇이었는가? 첫째 낙수효과, 즉 선성장 후분배에 대한 기대였다. 자본주의가 성장해 경제가 발전하면, 그 낙수효과로 더 나은 풍요로운 미래가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 말이다. 박정희 시대의 엄청난 속도의 경제발전은 그 낙수효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조부모 세대들은 열광했고, 성장하는 자본주의를 포옹했다.

 

부모 세대에 이르자 이런 포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IMF 사태는 자본주의의 잔인한 야만성, 그리고 자본주의가 경제성장의 박차가 아니라 장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부모 세대에 각인했다. 이것을 보면서 자랐던 지금의 젊은 층은 더 이상 자본주의를 격하게 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수록 경제적 활력이 떨어지고 수시로 비틀거리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이 자신을 덮칠까 공포에 떨고 있다. 세월호 사태는 이 젊은 층에게서 자본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당장 이 공포스런 체제를 철폐할 대안이 없기에 그것 앞에 굴복해 경쟁의 톱니에 으깨지더라도, 그들은 마음 속 깊이 염원하고 있다. “붕괴, 새로운 시작!”

 

둘째, 개천에서 용 나기 패러다임이었다. 허리띠를 조르고 열심히 노력하면, 또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훨씬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 그래서 이 고통스런 노동자계급의 삶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이 산산조각나고 있다. 계층이동의 통로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으며, 학력 수준은 갈수록 집안의 경제 수준에 좌우되고 있다. 대학을 나오더라도 그들의 다수에게 닥치는 미래는 ‘청년 실업의 높은 벽’이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오더라도, 그들의 대부분은 운 좋게 얼마 안 되는 정규직 자리를 꿰찬 것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 부모 세대에서는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충분히 기대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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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현실이 젊은 층에게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갈망을 심어준다.(사진_KBS뉴스) 

 

이런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8~33세 때의 고용 상황을 비교해보면 침묵의 세대(1946년 이전 생), 베이비붐 세대(1946~1964년생), X세대(1964~1980년생)까지는 고용률이 80%에 이르지만,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의 경우 70% 수준에 머물고 있다.

 

“세계를 변혁하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젊은이들에게도 여전히 정당하다. 아니 더욱 절실하다. 마르크스 시대의 자본주의는 최소한 성장하는 자본주의라도 됐다. 그러나 쇠퇴해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것이 지금의 자본주의다. 그 내려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기에 인류, 특히 미래의 세대를 더욱 고통스럽고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내몰 것이다. 

 

오늘날 더욱 빛나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나와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사회구조’를 정확히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항상 노동자를 비롯한 압도적 다수의 노동하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계급 착취체제인데, 이 착취는 갈수록 강화되고 그 결과 불평등 및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 그 해명의 결과물이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마르크스 생전보다 오늘날의 현실에 더욱 유효하다. 당시에 출발단계였던 자본주의는 오늘날 더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 확장됐고, 자본주의가 토해낸 노동자계급은 더 거대해졌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질이 200년 동안 결코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확고해지면서 미래 세대의 삶을 짓밟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모순을 밝히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누구보다도 젊은 세대에게 절실한 가치를 갖는다. 이 사상은 단지 과거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변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갈수록 현실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운동원리가 낳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미래의 방향을 추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1883년 마르크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런던 하이게이트에서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불과 10여 명이 참석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당시로는 그만큼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자본주의가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의 정당성을 현실에서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나아가서 실업과 공황,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인류가 갈구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사상은 전 세계의 노동자들과 젊은이들 속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만성화된 불황, 높아지는 실업률, 격화되는 경쟁, 갈수록 앞이 안 보이는 불확실한 미래, 전쟁의 위협 등이 젊은 세대를 칭칭 휘감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오늘날의 젊은이들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미국에서 사회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신봉자가 늘고 있다.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 대안으로 매력적이지 않은 민주당 등도 사회주의 확산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사회주의자를 표방하는 버니 샌더스 미 상원의원의 여전히 높은 지지도는 미국 사회에 스며든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방증한다. 지난해 9월 하버드대와 해리스폴 여론조사 결과, 샌더스는 53%의 지지율을 기록해 1위였다. …

 

이런 분위기가 짙어지자 미 보수진영에서는 한껏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보수성향의 잡지 <아메리칸스펙테터>는 “밀레니얼 세대가 곧 미국에서 가장 큰 유권자 층이 될 것이란 사실을 감안할 때, 이들이 사회주의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은 충격적”이라며 “전 세계의 부러움이자 서구의 가치를 만들어낸 자본주의가 ‘도도새’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채지선, “‘살기 팍팍해져’ 미국 파고드는 사회주의”, 5월 6일자 <한국일보>)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

 

마르크스주의와 대면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착취적, 반동적 본성을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런 반동적 체제가 갖는 모순과 함께, 그 모순을 타파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적대적인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진정한 차별점은 자본주의에 적대적일 뿐만 아니라 그 대안으로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낡고 반동화된 체제는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것을 해명했다. 자본주의도 역사적 진보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결국 반동화돼 폐지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필연적이고도 과학적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제시한다. 개인적인 이익이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 – 사회주의 - 에 도달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사회주의 대안은 노동자투쟁이라는 물질적 힘으로 구체화돼 자본주의를 붕괴상태로까지 내몬 적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 기회만 되면 자본가계급이 떠들었지만,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유령 앞에서 그들이 계속해서 벌벌 떨 만큼 변하지 않는 현실성을 사회주의는 획득해 왔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하나의 사상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물질적 힘이 바로 노동자계급이라고 규정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에 의해 가장 고통 받는 계급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모든 곳에서 거대하게 성장하고 조직화되는 계급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새로운 노동공동체 세상을 열 수 있는 혁명계급임을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들을 동정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역사와 경제를 깊이 연구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건설의 주역이라는 견해에 이르렀다. 마르크스는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 고전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라는 당시 인류가 획득했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성과들을 깊이 탐구했고, 이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필연적 모순과 이것을 해결하는 새로운 사회로서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도출했다. 사적인 이익의 영향을 받거나 계급적 편견에 눈먼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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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마르크스를 묘사한 그림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수십 년 사이에 한국에서, 중국에서, 인도에서 자본주의화와 나란히 등장하는 수억의 노동자계급을 보고 있다. 또한 아무리 사회주의를 증오하더라도, 노동자 없이는 자본주의가 굴러 갈 수 없기에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을 품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를 보고 있다. 교통과 통신, 무역의 발달은 이 노동자들을 더욱 긴밀히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자본가계급은 잠시 사회주의를 막을 수는 있지만, 결코 이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 없다.

 

이제껏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 규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함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혁명적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마르크스가 최초였다. 또한 마르크스가 제기한 혁명적 대안은 자본주의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여전히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남아 있다. 자신을 덮치는 자본주의의 공격에 맞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 다가서는 것을 막는 또 다른 장애물

 

모든 이론은 실험을 통해 검증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이야말로 현실의 실험을 통해 명백히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 아닌가? 이미 역사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 이론을 굳이 공부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사회주의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지 않는가?

 

대략 위와 같은 논리가 마르크스주의에 다가오는 것을 가로막는 또 다른 결정적 장애물일 것이다. 사회주의가 북한이나 중국, 그리고 1930년대 이후 러시아를 의미한다면, 그런 비판은 유효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를 정확히 탐구함으로써 그런 체제들이 과연 자본주의 변종인지 아니면 진정한 사회주의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변종이라면, 마르크스주의가 그것에 책임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권력자들이 온갖 나쁜 짓을 한다고 해서 그 책임을 사회주의에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200년이 넘는 기간, 세계적인 역사적 실험을 통해 자본주의는 무엇을 증명했는가? 불평등, 실업, 전쟁, 경쟁, 도덕적 타락, 가난 등이다. 무수한 실험을 통해 응당 파산을 선고받아야 할 당사자는 바로 자본주의 자신이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학습하고 탐구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주류체제가 왜곡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또는 이러저러한 지식인들에 의해 변형되고 재해석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 저작 자체를 탐구함으로써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과학적 해법을 제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해야 한다. 제기하고 있다면,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돼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나름의 해법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어떤 결과에 도달하든, 다음은 분명하다. 이 체제가 부당하고 낡았으며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이 사회가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전망을 모색하는 주체적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 글은 지금부터 이러한 마르크스주의 학습을 안내하고자 한다.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왜곡하지 않고, 그 객관적 실체에 다가서게 돕는 것이 목표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일 것이다. 부디 이 글의 안내까지도 의심해보면서, 더 많은 젊은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이 낡고 반동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길을 찾아가기를 희망한다.(계속)

 

[이 글은 노해투(준) 젊은층 조직화 모임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총 10회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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