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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혁명과 오늘날의 사회 혁명 - 우리의 전통은 1959년 쿠바가 아니라 1917년 러시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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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익 조회 363회 2021-08-28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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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쿠바 혁명 이후 62년이 흐른 지금 쿠바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를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쿠바 정부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인데, 그 기저에는 1959년 쿠바 혁명에 대한 규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세우는 건 훈고학적 접근이 아니라 오늘과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을 규명하고, 혁명의 노동계급적 노선을 수호하기 위해서 중요하다. 한마디로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에 단단히 의지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서 과거 혁명의 역사적 성과와 의의를 사회주의 노동자혁명과 단순 대비해 단죄하는 비역사적 접근법을 피하면서도, 그 역사적 한계를 정확히 응시하는 변증법적 접근법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본령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명확히 해야 한다. 이 본질적 요소들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당시 쿠바 혁명이 소중한 혁명이었을지라도, 사회주의 노동자혁명과는 다른 종류의 혁명이었다고 규정해야 한다.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본령은 두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바로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자기해방운동이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에게 누군가가 던져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니다. 죽은 노동(과거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수단)에 대한 산 노동(노동자)의 종속을 의미하는 축적을 위한 축적을 타파하고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사회가 의식적, 집단적으로 통제 운영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본질이다. 이것은 노동자 스스로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 노동자민주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실현불가능하다.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는 그 어떤 엘리트 집단도 이러한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자기해방운동 과정을 대신할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운동의 역사적 과정을 안내하고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운동의 발전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전위와 대중 사이의 구별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소멸을 지향한다. 이에 비해 온갖 유형의 관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운동을 봉쇄하고 억압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 관료적 지배체제가 국유화 등 모종의 조치를 도입한다고 해도, 그게 반자본주의일 수는 있을망정 결코 사회주의적인 조치는 될 수 없다.

 

국유화의 정도는 사회주의 사회 여부와 노동자공동체 사회(코뮤니즘)로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는 하지만 사회주의 사회의 1의 본질적 요소는 아니다. 1의 요소는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권력의 존재 여부, 즉 노동자계급의 민주적·대중적 기구가 사회를 실제로 운영하고 통제하고 있느냐의 여부다. 이 전제는 사회주의적 국유화를 자본주의적 국유화나 관료적 국유화와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점이다. 자본가 관료들 혹은 관료집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국유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변형된 형식일 뿐 사회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이 혁명이 철저히 국제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코뮤니즘 생산양식은 오직 세계적 수준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토해낸 사회적 생산력이 이미 세계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계 노동자혁명, 즉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을 통해 세계적 수준에서 생산력을 작동시키지 않는 한, 고립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사회주의 노동자혁명 정부라면 응당 세계 노동자혁명을 위해 현신해야만 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의 나라에서 노동자권력을 발전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향해 분투함으로써 사회주의의 권위를 확산하면서 세계 혁명을 촉진해야 한다. 이것은 민족국가의 발전에 주목하는 일국 혁명 노선과 대치하는 것이다.

 

쿠바 혁명의 기록

 

사회주의의 이러한 핵심 원리를 따라 쿠바 혁명의 실제 전개과정을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자.

 

1890년대에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맞선 쿠바인들의 반란을 미국이 진압한 뒤 미국 자본은 쿠바 설탕 산업을 지배했고, 쿠바에서는 강력한 반미 민족주의 흐름이 잉태됐다. 쿠바 경제에서 설탕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높았는데, 1929년 이후로 세계 시장이 침체하자 1930년대 사회적 위기 국면이 찾아왔다.

 

1930년대 초반에 파업을 비롯한 여러 투쟁이 분출했지만, 혁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권력은 바티스타 군대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바티스타의 군부 지배로도, 그리고 1944~1952년에 번갈아가면서 지배했던 포퓰리스트 정부들로도 쿠바 사회의 위기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오히려 1950년대 경제위기가 악화하면서 실업률이 치솟았다. 다시 정권을 잡은 바티스타는 군사독재 탄압정책을 선택했지만,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저항과 마주쳐야 했다. 쿠바 전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심지어 자본가들과 연계된 세력들도 바티스타를 반대했다.

 

1953726일 카스트로가 혁명세력을 조직해 몬카다 군병영을 공격하면서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바티스타에 대항한 1956년 봉기에 발맞춰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200여 명의 게릴라 부대원을 이끌고 쿠바 해안에 상륙했다. 주변 농촌 산악지대의 게릴라전과 함께 도시에서도 격렬한 투쟁이 발생했다. 농촌 게릴라 사망자들의 열 배나 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의 저항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저항의 실질 중심지는 도시였다.

 

19584월 카스트로가 호소한 도시 총파업은 호응을 얻지 못해 실패했지만, 1958년 중반에 이르면 혁명세력들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195912월 카스트로 군대가 쿠바의 핵심 도시들에 진입했을 때 그 수는 2~3,000명 정도였지만, 바티스타 정부를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경찰, 군대는 바티스타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고, 이미 사실상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19581231일에 혁명 게릴라군이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고, 195911일에 카스트로 주도의 혁명정권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처음부터 사회주의 정부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았다. 1961416일에 이르러서야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고 선언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의 성격

 

1959년 쿠바에서 일어난 혁명의 성격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주도하고, 노동자계급의 조직들이 정부를 형성하고 통제하는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지식인 혁명가들이 주도하고, 일부 소농민들이 합류한 중간계급 혁명이었다.

 

우선 1933년에 발생한 운동에서 비롯한 혁명세력의 이념은 학생들 주도의 그룹들에서 나왔는데, 이들의 사상은 명확한 사회주의는 아니었고 반제국주의 이념과 민족주의 이념을 혼합한 것이었다. 이런 사상을 물질적 힘으로 구현한 게릴라운동이 집권했을 때 이 혁명정부의 성격은 노동자 정부와는 완전히 거리가 있었다.

 

이것은 혁명 주도 세력 자신에게도 아주 분명한 사실이었다. “우리의 최초 농민 게릴라군을 이루었던 군인들은, 토지 소유에 적극적으로 애착을 보이는 사회 계급 소속이었다. 그들의 정신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소부르주아적이라는 것이다”(체 게바라), “이 군대는 권력 쟁취를 위한 주관적 조건들이 무르익은 농촌에서 만들어져, 도시를 외부로부터 정복하기 위해 전진한다”(체 게바라).

 

혁명의 주도세력은 지식인과 농민들이었고, 혁명정부 핵심부에 노동자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쿠바 혁명의 주도 세력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이 실현되는 사회주의 노동자 정부를 세워내는 게 아니었다. 혁명의 목표도 사회주의 실현이 아니라 평등한 토지 분배와 민족경제 발전이었다.

 

국유화조차 원래는 추구했던 목적이 아니었다. “국유화는 민간 기업을 약화시킨다. 훨씬 중요한 것은, 전면적 국유화를 시도하면, 가능한 한 빨리 산업화를 달성한다는 우리 경제 강령의 핵심 목표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목표를 위해서, 외국인 투자는 쿠바에서 항상 환영받을 것이고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다”(카스트로, 19582월 미국의 월간 잡지 코로네트와의 인터뷰, 토니 클리프 <쿠바 혁명의 성격>에서 재인용).

 

이런 계급적 한계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건 당시 쿠바 혁명정부에서 노동자 조직들의 지위가 대단히 부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와 같이 사회를 통제하는 노동자 기구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 형식적으로 비슷한 기구들을 창설했지만 그 실제 권한은 미미했고 거의 관제조직의 수준으로만 존재했다. 가령 국유화와 협동농장 도입과 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결정이 내려지는 동안 노동자 조직들은 완전히 배제돼 있었다. 노동자 민주주의도 유명무실했다. 노동자계급은 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그들 중간계급이 해방을 선물하는 대상이자, 혁명을 위해 동원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됐다.

 

쿠바 노동자계급은 어디에?

 

이처럼 1959년 쿠바혁명은 노동자혁명이 아니라 중간계급 주도의 급진적 민족혁명이었다. 이러한 혁명의 성격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대답은 1959년 당시 쿠바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시에 쿠바 노동자계급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당시 혁명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민족혁명을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으로 성장전화시키는 영속혁명의 가능성이 현실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쿠바의 노동자계급은 왜 그러한 역사적 과제를 담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1959년 혁명이 중간계급 주도의 혁명에 머물고, 노동자계급이 통치대상으로 전락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시 쿠바 노동자들의 상태로 들어가 보자.

 

현재 본인이 갖고 있는 사실적 증거들로는 물론 그 질문에 온전히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몇 가지 추정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당시 쿠바에 노동자계급은 버스노동자를 비롯해 주로 서비스업 기반의 도시 노동자들과 함께, 농업노동자들이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 자본가들이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들에는 소농민들이 아니라 농업노동자들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릴라 부대는 소농민들 일부를 조직했을 뿐이었다.

 

첫째 추정은 당시 쿠바의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특권화된 노동자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게 조합주의적·개량주의적 영향력을 미쳐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이 마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더 그럴듯한 둘째 추정은 쿠바 노동자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쿠바 공산당이 마비시켜왔다는 추정이다. 쿠바에서 사회적 위기가 찾아왔던 19337월 아바나의 버스 노동자들이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며 벌인 파업은 정부에 맞선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제당소와 철도역과 같은 핵심시설들을 점거했고, 스스로 소비에트라 부른 자주적 기구를 결성한 바가 있다. 이것은 쿠바 노동자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잠재력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봉쇄됐는데, 그 결정적 역할을 쿠바 공산당(PSP=인민사회당)이 담당했다. 1933년 당시 PSP는 양보안을 받고 노동자총파업을 중단하도록 요구했고, 1939~1946년 내내 바티스타 군사정부의 통치를 지지했다. 195849일 카스트로의 총파업 호소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은 냉담했는데, 여기에는 파업을 거부했고 게릴라 반란에 냉담했던 공산당의 방침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쿠바 공산당이 게릴라 부대를 지지하고 총파업을 호소했던 건 쿠바 혁명이 성공하고 바티스타 정부의 붕괴가 분명해진 시점이었다.

 

쿠바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유착돼 있고 노동운동에 대한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공산당의 이러한 노선은 노동자혁명을 이끄는 게 아니라 그 정부가 군사독재 정부이든 포퓰리스트 정부이든 게릴라 혁명 정부이든, 모든 정부에 협조하고 유착해 개량의 떡고물을 따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쿠바 노동운동 속으로 노동귀족적이고 개량주의적이며 조합주의적인 요소들을 불어넣었고, 그 결과 1933년부터 1959년에 이르는 쿠바의 사회적 위기 국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완전히 마비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추정은 당시 쿠바의 산업화 정도,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형성 정도가 아주 미약하고, 아울러 쿠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능력이 너무 낮아서 당시의 혁명적 과제를 떠안기에는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객관적 진실이 무엇이든, 단 하나 분명한 것은 1959년 쿠바 혁명을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결정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정적인 조건은 혁명정부를 수립해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전진할 준비와 태세를 갖춘 노동자계급운동이다. 노동자계급의 주도력 하에 중간계급을 이끌면서 중간계급의 동요와 한계를 뚫고 자신의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운동이다.

 

이런 객관적 상황에서는 1959년 쿠바 혁명이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 혹은 그것을 향한 혁명의 시발점으로 자리 잡는 건 불가능했다. 노동자계급이 빠진 그 자리를 다른 계급이 대체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그 혁명이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으로 자리매김하는 게 불가능함을 뜻했다. 그 결과 1959년 쿠바 혁명은 소부르주아 중간계급 혁명이 되었고, 이 혁명에 자신의 계급적 각인을 찍은 건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급진적 중간계급이었다. 또한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조직들에 기반한 노동자권력 대신 노동자계급 위에 군림하는 중간계급 관료집단의 권력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등장했던 이 소부르주아 혁명권력이 무언가 반동적인 건 아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사회적 위기는 어떤 식으로든 해소돼야 한다. 그걸 중간계급이 수행한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그걸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으로 오해해서는 안 되고, 그 혁명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다음의 전진의 길, 즉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향해 일관되게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급진적 소부르주아 권력은 1959년 혁명 이후 어디로 향하게 될까? 우리는 소부르주아 중간계급의 주관적 염원이나 희망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발 딛고 있는 물질적, 역사적 기초 위에서 그걸 검토해야 한다. 어떤 혁명이 수행된 뒤, 그 혁명이 잉태한 사회체제의 역사적 발자취는 바로 그러한 냉엄한 계급적, 물질적 기초 위에서 규정되기 때문이다.

 

쿠바 혁명정부의 진화

 

대중은 혁명정부를 지지했는데, 토지·의료개혁, 일자리확대 등 개혁정책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1959년 혁명정부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던 쿠바 자본가들은 이런 개혁정책 앞에서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미국 자본가들에게 종속적이었고, 대부분의 이윤을 미국 자본가들에게 빼앗겨야 했던 쿠바 자본가들은 이 정도의 개혁정책조차 자신들의 이윤을 정면으로 침식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혁명 정부에 포함되었던 자본가 인사들도 정부에서 이탈했다.

 

쿠바 자본가들이 해외로 망명해버리자, 쿠바 경제의 주요 부문들이 자동적으로 국유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면 국유화가 원래 이 정부의 정책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논리를 따라 국유화는 경제 전체 분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국유화된 산업시설들에서 노동자들의 민주적 통제는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경제시설은 게릴라 출신 장교들의 관할권에 속했다. 게릴라 부대의 핵심들이 이렇게 사회의 정치적·경제적 권한을 틀어쥐고 있는 관료로 변신했다.

 

또한 공산당이 혁명세력의 핵심 조직으로 자리 잡아 갔다. 이것은 혁명적 역동성이 관료적 지배로 전환되는 급격한 과정을 정치적으로 표현했다. 여러 혁명세력이 복잡한 방식으로 얽혀 있었던 당시 상황을 교통정리하고 순화하기 위해서는 항상 모든 정부에 순응해왔던 공산당이 적합했다. 1960년대 중반 공산당이 재창당됐을 때 노동자운동에 참여했던 중앙위원은 4%도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들에서도 민주주의적 토론과 선거는 거의 찾기 어려웠다. 토지 몰수, 집단농장이 도입될 때도 농업노동자들은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반정부적인 기조를 취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언론들의 자유는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이렇게 관료적 지배체제가 정치적·경제적 기구들 전반에서 자리잡아갔다. 국유화는 관료적 국유화였고, 노동자권력과 결합해 사회주의를 향하는 국유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토지 집산화도 관료적 방식으로 위로부터 도입되었다. 한마디로 국가를 장악한 관료집단이 국유화된 생산수단을 운영·통제하는 국가관료자본주의 체제가 점차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쿠바 소부르주아 혁명 정부가 민족경제의 발전을 위해 축적을 위한 축적 노선을 집행하는 과정은 이 정부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자로 전화되는 과정이었다. 축적노선을 집행하기 위해, 그들은 미제국주의에 의해 세계와 분리된 상태를 타개해야만 했다. 기계와 원료와 같은 자본재 없는 축적은 불가능했는데, 이것들은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설탕과 교역을 통해서 소비재의 상당 부분을 수입해야만 대중의 생활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는데, 일국에 고립된 쿠바 정부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쿠바 정부는 그 해결책으로 소련과 동구권과 같은, 미국과 패권 다툼을 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체제와의 협력을 선택했다.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세계 혁명 노선 대신, 스탈린주의 소련 체제와의 동맹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1966년 쿠바 무역의 80퍼센트가 동구권과의 무역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쿠바는 소련의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모두를 모방했다.

 

쿠바 정부 핵심들의 공통 관심사는 쿠바에서 산업과 농업을 발전시켜 후진성을 탈피하는 것이었다. 또한 설탕산업을 보완하는, 새로운 산업들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위로부터의 관료적 계획화 노선 등 스탈린주의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축적논리를 반영하는 빠른 속도의 산업발전 논리가 도입되었다. 관료집단에 의해 위로부터 결정되는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 계획이 대중들에게 강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생활수준 상당 부분을 희생해야만 달성할 수 있었으므로 노동자 민중에 대한 통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소련처럼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 규율을 강제하는 여러 조치가 도입되었다. 관료집단과 일반 대중 사이의 불평등도 확대되었다. 생필품 결핍으로 고생하는 대중의 맞은편에서 정부와 공산당 관료들은 수입 자동차를 지급받고, 특권을 누리기 시작했다. 공산당원들은 주로 관료층에서 모집되거나 관료들에 의해 승인된 모범노동자들로 채워졌다. 1959년에 쿠바에서 탄생한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은 20년 사이에 이렇게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자리잡아갔다.

 

최근까지 쿠바 사회의 변화 양상

 

쿠바 체제의 위기는 1980년대에 찾아왔다. 두 가지 요소가 영향을 미쳤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세계경제 위기의 심화다. 다른 하나는 쿠바가 대외 무역의 대부분을 의지해왔던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설탕 수출가격이 급락했다. 쿠바 체제의 축적 메커니즘도 요동쳤다. 1975~1980년 경제개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국민총생산도 크게 하락했다.

 

그러자 쿠바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소련과 중국 등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기존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수정해, 민간 자본주의 시스템과 결합하는 혼합 모델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겨냥했던 것은 동구권을 대체하는 무역을 새롭게 활성화하고, 설탕산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다변화하면서 축적기금(투자기금)을 달러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1992년 정부의 해외 무역 독점이 폐지됐고, 해외 자본가들과의 합작 사업이 합법화되었다. 이윤의 해외송금도 전면 허용되었다. 해외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달러로 지급하는 임금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가 수중으로 집중되었다. 이를 통해 모아진 자금은 축적기금으로 활용되었다. 아울러 설탕산업을 보완하는 산업으로 관광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 또한 달러를 확보해, 축적기금으로 투입하기 위함이었다.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권한을 위임받게 된 국영기업 관리자들이 민간 기업인으로 변신하는 일도 늘어났다. 부패가 확산되었고, 관료층 및 신흥자본가층과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불평등이 크게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공산당 대회는 6년 동안 열리지 않았다. 이렇듯 모든 변화는 쿠바 사회의 최정점에 있는 핵심 관료층의 의지에 좌우되었는데, 그 의지의 핵심은 국가관료자본주의 체제를 안정화하고 축적 메커니즘을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변화로도 쿠바 사회의 심화되는 위기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세계 경제위기 격화가 그 한 부분인 쿠바 체제를 옥죄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는 그걸 더욱 격화시켰다. 특히 설탕수출과 함께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산업이 된 관광산업이 직격탄을 맞았다. 쿠바의 관료집단은 이렇게 심화되는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전가시키려 했다. 국가의 환율정책에 따라 페소화는 엄청난 수준으로 평가절하됐는데, 이건 대중의 실질 임금수준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을 뜻했다. 높은 식료품·전기 가격으로 대중의 삶은 추락했고, 쿠바가 자랑해왔던 공공 의료시스템도 흔들렸다. 불평등의 확대와 관료적 통제에 대한 대중의 축적된 염증과 함께, 이러한 경제 문제들이 더해짐으로써 대중적 불만은 고조되었다. 바로 이것이 최근 쿠바에서 등장한 시위의 객관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시위는 아직 쿠바 사회의 변화를 끌어낼 만큼 거대한 대중운동으로까지 도약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이 시위에 참가하는 대중과 그들이 내거는 요구의 성격은 대단히 복잡하고 모순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일부 시위대의 요구는 친미적이고 반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쿠바 시위는 과거 1933년 이후 쿠바에서 등장했던 사회적 위기처럼 거대한 사회적 위기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에서 국가관료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했던 쿠바 체제가 이제 새로운 도전과 저항의 물결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시위에 대한 탄압은 이 체제가 이제 반동적 체제로 더욱 본격적으로 전화하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혁명정부에서 시작해 이제 대중의 거센 도전과 저항과 마주치게 된 쿠바 정부의 이러한 역사적 변화 과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이러한 진화를 강요했는가? 어떤 계급적, 사회적 동학이 작동하고 있는가? 1959년 쿠바에 수립된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이 오늘날 드러내는 한계를 우리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이걸 살펴볼 차례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가 불러오는 환멸로부터 벗어나기

 

최근 수십 년 동안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의 영향력은 커졌고,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와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노선 사이의 결정적 차이는 망각되곤 했다.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관료주의 반혁명에 의해 패배하고, 1920~30년대 세계적으로 분출된 노동자혁명들이 실패한 뒤 세계 노동자혁명 운동이 오랜 기간 침체의 터널을 통과해온 것을 반영한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소부르주아 혁명주의가 복권되면서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이 차지하던 역사적 지위를 위협해왔던 것이다.

 

세계 노동자혁명이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중국, 베트남, 쿠바 등에서 등장한 소부르주아 혁명은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지위를 대체하면서 혁명의 주류지위를 차지하려 했다. 사회주의 혁명가들 중 일부, 특히 지식인 혁명가들의 상당수가 그것에 마취되고 동화됐다. 그들은 소부르주아(민족민주) 혁명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 갖는 진보성을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고유성과 혼동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고유한 노선으로부터 사실상 벗어나버리곤 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노동자혁명 노선은 자본가계급에 맞선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자신을 수호해왔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주의, 무정부주의 등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볼셰비키도 인민주의와 사회혁명당 류의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맞선 투쟁 속에서 자기 노선을 정립했다.

 

핵심은 사회주의 혁명의 본령으로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는 결정적 지위였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노선에 대해서도 저항했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혁명의 주체로 노동자계급을 상정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지식인이나 농민들로 대체하려 했다. 또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국제주의 노선에 철저하지 않았고, 대개의 경우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란 민족혁명을 통한 민족적 발전의 길을 미화하거나 지극히 공상적인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의 힘에 기반해 세계적 차원의 사회적 생산력을 통제하고 운영하는 사회주의 전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특정 국면에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와의 일시적 제휴 가능성을 열어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별 짓기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사활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가 결국 초래할 수밖에 없는 환멸과 파국, 개량성으로부터 벗어나 혁명,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소부르주아계급의 역사적 지위는 봉건적 과거에 있지, ‘현재와 미래에 있지 않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발전된 생산양식을 소부르주아계급은 만들어낼 수 없다. 소부르주아계급이 발 딛고 있는 생산력은 소규모로 분산된 낡은 것이며, 자본주의 생산력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과거의 것이다. 그 결과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자신의 손아귀에 권력이 쥐어졌을 때 가장 파멸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더 나은 미래를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동요 속에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용하고 스스로 자본가계급의 변종으로 전환해 자본주의 축적과정을 떠맡아야 하는 운명에 직면한다.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형성은 그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의지하는 혁명노선은 혁명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환멸을 불러오고,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뿐이다. 오늘날 쿠바 혁명에 대한 정확한 성격 규정이 필요한 실천적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쿠바 혁명에 대한 환상이 걷히고, 이 소부르주아 혁명주의가 만들어낸 사회 체제에 대한 환멸이 본격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은 없었는가?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은 혁명적 사회주의로 전진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스스로는 불가능하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자체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노선을 부정하기 때문이며, 소부르주아계급이란 객관적 기초 위에서는 스스로 사회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 길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이 혁명적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게 가능한 조건은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 바깥에서 도입돼야 한다.

 

세계적 수준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권력과 운동이 거세게 등장하고, 이것이 미치는 영향력과 주도권, 지도력 하에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은 사회주의로 이동할 가능성을 얻게 된다. 소농민들이 노동자 권력의 지도 하에서, 그리고 도시에서 형성되는 거대하고 선진적인 사회적 생산력의 도움으로 협동조합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것을 경제적 영역에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없다면,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은 보나파르티즘 정권으로 일시적으로 제 계급 위에 군림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돼 그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이건 계급분화 속에서 상층 소부르주아들이 자본가계급으로 전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이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편에 서게 되는 경우에도 그것은 결코 순탄한 역사적 과정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운동에 기반하고, 노동자대중의 의지와 에너지, 주도성, 통제력에 의지하는 새로운 혁명주체가 등장해야만 이러한 모순은 극복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이 사회주의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 정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노동자 스스로의 자주적 운동에 기반한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과 독립적 방식으로 등장해 주도권을 거머쥐는 역사적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과 노동자 사회주의 운동 사이에는 항상적인 긴장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사회혁명당 좌파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개의 경우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어느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이르게 되면 결정적 한계를 드러내고 노동자 사회주의 운동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이 대립이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세계적 수준에서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이 압도적 힘을 획득하고 있는 국면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1930년대에 시작해 1959년 쿠바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역사적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선 쿠바 내부적으로 볼 때 쿠바 노동자계급은 그러한 혁명적 지도력과 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한 준비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의 영향력에 압도당해 버렸다. 세계적 수준에서 보더라도, 1917년에 수립된 소련의 노동자 권력이 붕괴하고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된 상황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침체 국면에 접어든 상황에서는 쿠바의 소부르주아 혁명주의 정권을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편으로 이끌 만한 요소들이 성숙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부르주아 혁명 정권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진화하게 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진화에도 불구하고, 1959년에 쿠바에서 수립된 정권이 갖는 역사적 진보성은 물론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정부는 제국주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고, 토지개혁 등을 통해 봉건적 멍에로부터 민중을 해방시킨 진보적인 혁명 정부였다. 하지만 이 정부의 소부르주아적 한계와 관료적 성격은 그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적으로 퇴화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해버렸다.

 

우리는 1959년 쿠바 혁명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그 혁명의 역사적 한계와 함께 오늘날 그 체제가 도달한 결과에 결코 눈감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혁명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린 길이며, 여기서 중요한 건 오늘과 미래에 우리가 직면한 역사적 과제를 응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소부르주아 혁명만이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서도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해 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진보성에 대해 결코 부정하지 않은 채로, 그 부르주아 혁명이 오늘날 잉태한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단호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 혁명

 

오늘날의 혁명이란 문제에 대해 접근하면서, 1959년 쿠바 혁명을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반대로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진보성에도 불구하고, 1959년 쿠바 혁명에 내재하고 있던 결정적 한계와 함께 그것의 역사적 진화를 냉정한 태도로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면 그것은 중남미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전진을 가로막을 뿐이며,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을 사회주의 권력으로 치환함으로써 혁명운동에 대한 환멸을 조장하려는 세계 자본가계급의 의도에 놀아나게 된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한 뒤에는 항상 낡아버린 노선이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까지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소부르주아 혁명의 역사적 진보성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과거 쿠바, 중국, 베트남 등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물질적 조건, 즉 소부르주아적 환경이 지금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 나라들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은 성장했고, 소부르주아계급은 현격히 쇠퇴했으며 사회적 생산력은 전면화되었다. 소부르주아 혁명의 물질적 조건은 소멸했다. 게다가 과거의 소부르주아 혁명정권은 지금은 부르주아 지배계급으로 전환돼 노동자혁명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세계 혁명은 전반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에서든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 이외의 다른 경로를 취할 수 없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역사적 진보성을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혁명권력의 지도력과 주도성 하에서 소부르주아 혁명정부가 사회주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에도 결코 쉽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불가능한 역사적 전망이다.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가 완전히 도래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리카나 중동의 일부 후진적 국가들에서 소부르주아 (민족)혁명주의 정권이 등장할 가능성은 아예 배제할 수 없으나 그건 세계사적 시야에서 보자면 아주 주변적이고 예외적인 에피소드에 불과할 것이다. 이게 변증법적으로, 역사적으로 혁명운동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대한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의 독립성과 구별 정립은 이러한 역사적 단계에서는 더욱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환멸로부터 노동자계급과 혁명가들을 구원하고,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의 진정한 본질과 역사적 임무로 노동자들이 무장하는 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의 한 가지인 민중주의의 잔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노선과 전통을 더욱 굳건히 확립해야 하는 한국에서 그 중요성은 더욱 강조해야 한다.

 

북한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지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고, 이들이 역사적으로 낡아버린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상황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인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사활적인 사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애정과 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것을 뚫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해방 사상을 단호하게 움켜쥐고, 오늘날 사회혁명의 주인공으로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와의 단절은 더욱 절실하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 역사에 대한 이론적 접근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쿠바 정부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노동자권력,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굳건한 연대를 표명한다. 이들 사이의 이론적 토의는 노동자계급에게 더 명확한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을 전달하고, 오늘날 사회혁명의 과제를 더 분명히 한다는 측면에서 유용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미제국주의에 맞선 쿠바의 민족적 독립성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쿠바에 대한 억압과 간섭, 봉쇄 정책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든 행위를 우리는 단호히 규탄하며, 이에 맞선 쿠바의 저항을 지지한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봉쇄를 즉각 철회하라!”

 

하지만 이것이 지금의 쿠바 정부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쿠바에서 본격화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낡은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게서도, 반동적으로 전화한 국가관료집단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다. 오직 쿠바 노동자계급의 자주적 운동과 혁명적 운동의 발전에 희망이 있고, 그 점에서 우리는 다음의 연대 요구를 제기한다. “쿠바의 노동자 민중에게 집회·시위·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라! 쿠바 정부는 노동운동가들과 혁명가들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미제국주의에 맞선 쿠바의 민족자결권을 전적으로 지지하면서도, 그리고 과거 역사적 시기에 쿠바 혁명이 갖는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과거 쿠바 혁명을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에 맞서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자주적으로 일어나 스스로의 해방을 위해 권력을 장악했던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전통 속에 놓여 있음을 선언한다.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 노선”, “노동자 국제주의 노선은 오늘날 우리가 견지하는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 노선이다. 이 노선에 입각해 우리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관료집단에 맞서 사회혁명의 길에 나서는 쿠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며,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해 그들과 굳건히 단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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