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내 전체검색
정치

토론회 자료② |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페이지 정보

양준석 조회 4,337회 2021-08-15 12:49

첨부파일

본문

 

987647181e1fac3c6d1c32851011a3ad_1628999197_6473.jpg

헬조선’, ‘금수저체제를 향한 광범한 분노와 반발은 왜 잦아들었을까?

 

 

편집자 주   817() 노해투 온라인 토론회 “‘공정성과 능력주의 담론,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인가?”의 두 번째 발제문, 양준석 동지의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전면적으로 고개를 쳐든 공정성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자본주의 성장과 쇠퇴의 역사, 계급투쟁의 역사와 결부지어 설명합니다.


① 공정성’,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한 이유

②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③ 공정성과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합니다

④ 청년 비정규직의 침묵을 깨고 연대 투쟁으로 초대하자

 

공정론의 더 정확한 이름은 능력주의: “결과의 평등은 필요 없다. 기회의 평등(공정)만 달라. 내 능력으로 해결한다. 너도 능력으로 해결해라.”

능력주의는 단순히 20, MZ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40년 동안 만개한 능력주의. 나아가 자본주의 역사 전체를 관통해 온 능력주의.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는 1958년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처음 만들었지만, 실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훨씬 오랜 시간 작동했다.

 

 

1.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기본 성격

 

1) 능력주의와 다른 이데올로기의 비교

 

 

 

영어표기

어원 (그리스어/라틴어/영어)

귀족주의

Aristocracy

Aristo(best) + Cracy(rule)

신분에 따른 질서

(귀족의 지배)

금권주의

Plutocracy

Pluto(wealth) + Cracy(rule)

재산에 따른 질서

(부자의 지배)

민주주의

Democracy

Demo(people) + Cracy(rule)

다수결에 따른 질서

(인민의 지배)

능력주의

Meritocracy

Merito(ability) + Cracy(rule)

능력에 따른 질서

(능력자의 지배)

 

 

2)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속성

 

능력주의는 소수의 지배(불평등사회)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귀족주의나 금권주의와 그 맥을 같이 하며, 다수의 지배(평등사회)를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대립한다.

 

능력주의는 세습으로 획득되는 신분이나 재산 대신 노력으로 획득되는 능력이라는 자원을 앞세움으로써 기존의 세습적 지배질서를 뒤흔든다. (세습적인 불평등사회에 맞선 허구적 대안으로서 능력주의)

 

능력주의가 추구하는 불평등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가족제도는 능력형성의 기회를 또 하나의 세습적 자원으로 변모시킨다. 결국 능력주의 사회는 또 다른 세습적 지배질서로 귀결된다. (세습적인 불평등사회를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능력주의)

 

능력주의는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 다시 말해 기회의 평등과 능력에 따른 결과의 차등을 주장한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추구하는 불평등사회에서는 능력형성의 기회가 점점 더 차별적으로 세습되며 따라서 기회의 평등조차 점점 더 실현할 수 없게 된다. (결과의 평등 없이는 기회의 평등도 없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사회를 전제한 위에서 개인의 노력에 따른 신분상승을 추구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이 단결된 투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철폐해 나가는 노동자운동과 상극 관계에 있다. 능력주의는 소시민계급의 신분상승 좌절 또는 몰락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노동자운동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아가게 한다. 능력주의는 노동자들이 개인적 신분상승을 위해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저버리도록 유인하여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킨다. 능력주의는 노동자운동을 무력화하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활용되며, 역으로 노동자운동은 능력주의를 철저히 극복할 때에만 제대로 발전해 나갈 수 있다.

 

 

2. 세계적 차원의 계급투쟁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1) 능력주의는 부르주아 정치혁명을 주도한 자본가계급의 이념이었다

 

17~18세기 영국·프랑스·미국 등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정치혁명은 이미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자본가계급이 정치권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정립되는 과정이었다. (1649 영국 청교도혁명과 1688 명예혁명, 1776 미국 독립혁명, 1789 프랑스 대혁명)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정치혁명에서 자유와 평등을 내걸었고, 이를 통해 다수 인민의 지지와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자유와 평등에 대한 다수 인민의 생각과 자본가계급의 생각은 서로 같지 않았다.

 

다수 인민이 염원한 자유는 모든 억압·착취·구속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뜻했고, 평등은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철폐를 뜻했다. 하지만 자본가계급이 생각한 자유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본운동의 해방을 뜻했고,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공정)을 뜻했다. 자본가계급은 수평파나 상퀼로트 같은 인민의 독자적 운동을 진압함으로써 부르주아 정치혁명에 대한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했다.

 

자본가계급은 부르주아 정치혁명을 통해 고귀하지만 무능력한세습 귀족 대신에 미천하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능력을 갖춘자본가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었다. 동시에 능력 없는다수 인민이 권력에 기웃거리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부르주아 정치혁명은 귀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선 능력주의 혁명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새로운 정치체제에서 능력에 따른 지배를 실현하기 위해 재산이라는 성과를 통해 스스로 능력을 입증한 자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했다. 부르주아 정치혁명은 일정 수준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극소수 성인 남성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하는 자본가공화국으로 귀결됐다.

 

2) 독점자본주의 시대 능력주의는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소시민계급의 이념이 됐다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2차 산업혁명과 맞물리면서 자본주의는 자유경쟁 단계에서 독점 단계로 진화했다. 거대한 독점자본을 형성·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가 일반화하고 그에 따라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면서, 자본가계급은 거대한 부를 세습하는 핵심부와 능력에 따라 진입·탈락하는 주변부로 재구성됐다. 자본가계급은 금권주의를 중심으로 능력주의를 활용하는 계급으로 변모했다.

 

이제 능력주의는 자본가계급으로 진입하여 신분상승을 이루고자 하는 소시민계급의 이념이 됐다.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는 과거 귀족주의를 타도했던 자본가계급의 능력주의처럼 과감하거나 공격적이지 못했다.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는 자본가계급 핵심부의 금권주의에 철저히 복종하는 하위 이데올로기로 전개됐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의무교육 제도와 관료선발 제도가 도입되어 각종 시험성적이 신분상승의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규정하게 되자,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는 능력을 평가하는 주된 지표로 시험성적을 사용하는 시험주의 양상을 띠게 됐다.

 

3)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민주공화제 아래서 자본가계급의 핵심적 지배수단이 됐다

 

19세기 들어 산업혁명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한 노동자운동은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며 줄기차게 투쟁했다. 노동조합과 파업의 권리, 8시간 노동제도 함께였다. 19세기를 관통하며 세계 곳곳에서 기나긴 투쟁을 펼친 끝에, 노동자계급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비로소 보통선거권·노동3·8시간노동제를 국제적인 불가역적 권리로 획득했다.

 

단결된 투쟁 속에서 힘을 키워낸 노동자운동은, 자본가계급이 그어놓은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며 제1인터내셔널-파리코뮌-2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운동의 전진을 차단하기 위해 물리적 탄압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유인을 활용했다. 자본가계급은 백인·남성으로 구성된 숙련공에게만 차등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조합주의를 유도했다. 보통선거권을 수용하고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개량주의를 유도했다. 노동자운동 지도부가 노동자대중과 분리된 채 자본에 협조하도록 길들임으로써 관료주의를 유도했다.

 

결국 20세기 벽두에 이르렀을 때 안타깝게도 세계 노동자운동의 다수가 조합주의·개량주의·관료주의 세력에 의해 이끌리게 됐다. 그 대중적 기반은 노동자운동의 주력을 구성하던 노동자계급 상층이었다. 조합주의·개량주의·관료주의를 떠받치는 힘의 원천은 노동자계급 상층이 빠져든 조합주의에서 나왔다. 백인·남성 숙련공으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 상층이 조합주의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 세계관을 수용하게 됐다는 뜻이었다. 노동자운동의 기본 원리가 당면 생존권에 대한 방어를 통해 형성한 단결투쟁력을 더욱 확장시키면서 불평등사회 자체를 변혁하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나아가는 것인 반면에, 노동자계급 상층이 받아들인 조합주의는 불평등사회를 불가피한 전제로 인정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역할을 당면 생존권에 대한 협소한 방어로 제한했고 동시에 그 이상의 문제 해결은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 신분상승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하는 데서 전망을 찾았기 때문이다.

 

백인·남성 숙련공들은 직업별 노조를 통해 노동자계급 상층으로서의 지위를 집단적으로 방어해 냄으로써 능력주의 신분상승을 추구하는 소시민계급의 대열에 개별적으로 합류할 수 있기를 원했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노동자운동의 원대한 이상 대신 자본주의 아래서 일부 (능력 있는) 노동자들만의 신분상승을 추구하게 된 그들은 유색인·여성·미숙련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노조에서 배제했고, 사회주의 운동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노동자계급의 줄기찬 투쟁에 밀려 민주주의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된 자본가계급이 민주주의를 형식적·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노동자계급 내부로 침투시킨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 상층이 자기 계급의 대의로부터 이탈하도록 유도해 냄으로써 노동자운동의 예봉을 꺾고 민주주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후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을 분열시켜 노동자운동을 약화시키는 유력한 지배수단으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계속 활용하게 됐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가계급이 민주공화국에서도 계속 권력을 독점하면서 자본주의 불평등사회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핵심적인 수단이 됐다.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 상층이 능력주의에 포획당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운동의 예봉이 꺾인 대가는 혹독했다. 자본주의 체제의 격화된 위기가 1차 세계대전(1914~18), 세계대공황(1929~39), 2차 세계대전(1939~45)으로 이어지는 대참화를 낳았을 때, 다시 말해 30여 년 동안 세계 노동자계급이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거나 굶주림과 폭정에 치를 떨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대를 견뎌내야 했을 때, 혼선을 거듭하던 세계 노동자운동은 자본주의 체제위기를 세계적인 노동자혁명으로 전환해 내는 데 큰 틀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본주의는 대량파괴와 대량학살로 어느 정도 모순을 털어낸 뒤 새로운 순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역사가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그 중심에는 러시아 노동자혁명이 있었다.)

 

4) 능력주의를 배격하고 단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평등사회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가장 가난하고 억눌린 노동자·농민을 사회의 주인으로 일으켜 세움으로써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동시에 실현할 새로운 사회를 열어냈다. 유독 러시아에서 노동자혁명이 가능했던 주체적 요인은 소비에트를 통해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총단결이 실현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변수가 된 것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와 달리 페트로그라드 금속산업 숙련노동자들을 비롯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상층이 능력주의 신분상승 대신 모든 불평등을 철폐할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총단결을 이끌어내는 혁명적 구심으로 기능한 점이었다.

 

인종·성별을 가리지 않고 미숙련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포괄하는 산별노조·일반노조 운동이 세계적으로 전개되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요구하고 관철해 나간 것 또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중요한 반격이었다. 개인이나 부문의 능력주의 신분상승 대신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연대에 입각한 불평등의 완화·해소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5) 복지국가가 추구되면서 능력주의가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4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자본주의가 안정적 성장을 거듭한 전후호황이 펼쳐졌다. 이 시기 유럽·미국 등 선진국 전반에서는 무상의료·무상교육·실업보험·최저임금 같은 각종 복지제도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복지국가 자본주의가 널리 추진됐다.

 

복지국가 자본주의가 널리 추진된 것, 다시 말해 능력주의가 상대적으로 완화된 것은 여러 가지 배경이 복합된 결과였다. 광범한 노동자대중을 결집한 산별노조 운동에 전쟁동원 후과가 겹치면서 노동자계급의 힘과 목소리가 크게 성장했다. 불평등을 획기적으로 해소한 러시아 노동자혁명을 노동자계급이 뒤따르지 않게 하려면 상당한 복지제도를 제공해야만 했다. 전후호황이라는 경제적 호조건은 자본가계급이 상대적으로 쉽게 양보할 수 있게 했다. 몰락한 소시민의 분노를 활용해 노동자운동을 절멸시키며 능력주의를 가장 극단으로 밀어붙였던 파시즘의 역사적 패배도 영향을 미쳤다.

 

6)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40년 동안 능력주의가 전면화했다

 

1970년대에 세계적으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되면서, 자본가계급은 복지국가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대신 노동자계급을 거세게 공격해 이윤을 쥐어짜는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게 됐다. 198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틀이 잡힌 신자유주의는 1990년대 세계로 확산돼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윤의 원활한 창출을 위해 노동자운동을 최대한 무력화할 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 스스로도 능력주의에 입각한 혁신적 재편을 추구한 제2능력주의 혁명이었다. 자본가계급이 능력주의를 전면화한 신자유주의를 채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진 조건에서 이윤 창출을 원활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착취를 획기적으로 강화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계급 스스로가 훨씬 효율적인 집단으로 거듭나야 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과학기술혁명·정보화·금융화 등과 결합하여 자본가계급 내부의 서열 순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100년 전 독점 자본주의 성립 이래 처음으로, 정보기술 혁신기업의 창업자들이나 혁신적인 금융투기꾼들 같이 자기 능력으로 성공한 자들의 부가 세습 자본가들의 부를 훨씬 넘어서는 일이 속출했다. 신흥 자본가들의 성공 신화는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 신분상승 욕망을 거세게 자극했고, 노동자계급 상층 또한 소시민적 신분상승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금융화가 만들어낸 자산거품은 금융투기 대열에 올라탄 소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의 신분상승 욕망을 더욱 부풀렸다.

 

신자유주의는 자본가계급의 기능을 지원·대행하는 전문가·관리자 집단으로서 소시민 상층을, 몰락해 가는 자영업 중심의 소시민 하층과 분리하며 양극화했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자계급 또한 중심부와 주변부로 양극화하면서 주변부에게 극심한 고용불안과 저임금을 강요했다. 소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상층을 사로잡은 능력주의 신분상승 욕망의 뒷면에는 양극화 과정에서 몰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기까지는 자본가계급을 대표하던 우파 정치세력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던 중도좌파 정치세력 또한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게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때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던 중도좌파 정치세력은 자신들을 떠받치던 노동자계급 상층이 소시민적 신분상승 욕망에 빠져드는 것과 함께 소시민계급의 능력주의 신분상승 욕망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으로 변모했고, 핵심 지지 기반 또한 노동자계급을 떠나 소시민계급으로 이동했다.

 

중도좌파 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복지국가가 비효율적이고 지속불가능하다는 자본가계급의 논리를 이겨낼 수 없어서였다. 실제로 1970년대 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복지국가의 비효율성과 지속불가능성을 드러냈다. 복지국가는 고착된 불평등사회의 패배자로서 무기력하게 복지에만 의존하는 실패자를 양산하고 있었다.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국가가 상당한 재원을 퍼부었지만, 불평등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불평등사회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는 그대로 둔 채 불평등의 정도만을 완화하려고 했던 복지국가의 숙명적 한계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복지국가의 운명은 예정돼 있었다. 자본의 원활한 이윤창출을 위해 불평등의 완화를 포기하든지, 아니면 불평등을 뿌리 뽑기 위해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든지, 둘 중의 하나로 나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중도좌파 정치세력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노동자혁명을 한사코 외면했던 만큼 결국 복지국가 폐기와 신자유주의 수용이라는 외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가 세계를 더욱 맹렬히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소련의 몰락이 안긴 거대한 이데올로기 효과 덕분이었다. 러시아 노동자혁명 이후 획기적으로 불평등을 철폐한 것으로 간주됐던 소련이 오랜 침체 끝에 결국 몰락한 것은 결과의 평등은 사회적 역동성을 제거하며 결국 실현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소련 사회는 이미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가·당 관료들이 특권을 누리며 자본가 역할을 하는 철저한 관료적 불평등사회로 전락했으며, 역으로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역동성을 상실하고 몰락한 것이었다. 오히려 러시아 노동자혁명은 비록 관료적 반혁명에 패배하긴 했지만, 인민의 자발적인 연대와 협력으로 활력과 창의성이 충만한 평등사회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가 뻗어나가는 데서 중국의 개혁개방이 안긴 이데올로기 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은 혁명 이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거대한 참사와 혼란을 겪은 뒤 개혁개방 노선을 채택하면서부터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이것은 ‘(결과의 평등에 집착하는) 계획경제의 실패와 (기회의 평등에 기초한) 시장경제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근거로 여겨졌다. 그러나 중국의 계획경제가 잘 작동하지 않은 것은 소련의 관료적 계획경제를, 다시 말해 관료적 불평등사회를 더욱 관료적으로 이식하면서 관념적 실적주의가 극단화한 까닭이었다. 중국의 경험은 관료적 지시명령이 아니라 인민의 자발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만 평등사회가 실현가능함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또한 중국의 개혁개방 40여 년 동안 공산당 관료의 자손들이 자본가계급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불평등사회에서 능력향상의 기회가 차별적으로 세습되는 또 하나의 사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울러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끝없이 펼쳐지는 대불황, 기후재앙, 팬데믹은 오늘날 시장경제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을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7) 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들이 반란을 시작했다

 

신자유주의 40, 다시 말해 능력주의 40년은 불평등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세계적으로 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들, 다시 말해 극심한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주변부 노동자들과 몰락해 가는 하층 소시민들은 평생 (나아가 대를 이어) 능력향상의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는 암담한 구조 속에 갇히게 됐다.

 

세계 곳곳에서 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들이 반란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1년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운동과 미국의 월가점령운동,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와 트럼프 집권, 2018년 프랑스의 노란조끼 운동 등이 있었다.

 

이들의 반란이 갖는 특징은 기존의 노동자운동으로 대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거에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던 중도좌파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능력주의 전도사가 되는 과정은, 노동조합운동 또한 중심부 노동자들의 능력주의 신분상승 욕망을 소심하게 대변하고 방어하는 운동으로 찌그러드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들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적 진공으로 치고 들어간 것은 좌파 또는 우파 포퓰리즘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파 포퓰리즘은 능력주의 사회의 패배자들에게 감정적 배설구를 제공할 뿐 삶의 조건을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다. 신개량주의로 대표되는 좌파 포퓰리즘은 능력주의 불평등사회와 정면승부를 펼치는 데 필수적인 노동자계급의 광범한 단결로 전진할 전망을 열지 못했다.

 

프랑스에서 노란조끼 운동이 한창일 때 일부 철도노동자들은 이 운동을 방어하면서 노동조합운동과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노동자운동(노동조합+노동자당), 중심부 노동자들에 갇혀 능력주의 신분상승 욕망의 대변자로 머물기를 멈추고, 주변부 노동자들과 하층 소시민의 절망에 깊이 공감하고 대변하는 운동으로 거듭날 때, 다시 말해 능력주의 불평등사회 철폐의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을 광범하게 단결시키는 운동으로 거듭날 때, 능력주의 불평등사회에 맞선 반란은 비로소 제 길을 찾고 거세게 타오를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에서의 계급투쟁과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1) 1987 노동자대투쟁은 멸시받던 노동자의 반()능력주의 인간선언이었다

 

멀리 일제 식민지 시기와 미군정기로부터 정부수립 이후 산업화 시기를 거쳐 IMF 외환위기를 맞기까지, 20세기 내내 한국 자본가계급의 모토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전근대적 관계주의였다. 적산불하, 원조경제, 차관경제 등 한국 자본가계급의 시초 축적을 위한 원천은 정경유착에서 나왔다. 이후에도 재벌은 정치자금을 상납하고 정권은 알짜사업을 하사하는구조가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능력이 아니라 빽과 연줄이 자본가들의 성공을 좌우했다.

 

그렇다고 이 시기 한국 사회가 능력주의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능력주의는 빽도 연줄도 없는 민중들의 세계를 지배했다. 급속한 산업화를 거치며 광범한 농민들과 그 자녀들이 도시로 진출해 노동자와 도시 소시민으로 전환됐다. 이 과정에서 학력과 학벌로 표시되는 능력에 따라 전문직·관리직의 상층 소시민, 사무노동을 하는 (화이트칼라) 지식 노동자, 육체노동을 하는 (블루칼라) 단순 노동자로 신분이 갈라졌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노동자운동을 절멸시킨 결과, 산업화 시기 한국의 노동자들은, 특히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착취와 억압을 겪어야 했다. 노동자들은 병영식 노동통제가 이루어지던 현장에서, 세계 최악의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산업재해에 시달리며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노동을 강요받았다. 노동자들의 극악한 처지는 그 지옥에 빠지지 않으려는 또는 그 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신분상승 욕망을 강력히 자극했는데, 신분상승을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은 학력과 학벌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드물게는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신분상승 욕망의 뒷면에는 지옥에서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는 (공부 못한) 비천한 인간들, 공돌이와 공순이에 대한 멸시가 있었다.

 

이 시기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분열된 상태로 묶어두기 위해 능력주의 노동통제를 적극 활용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인사고과제와 상여금차등제였다. 통상 현장의 반장들이 노동자 개개인을 A·B·C·D로 평가한 다음 차별적인 임금인상·상여금·승진 등의 근거로 활용했다. 노동자들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 반장들에게 아부하고 선물을 바치며 경쟁했고, 결국 노동자들끼리 끝없는 질시와 반목으로 허우적거렸다.

 

19877·8·9월 전국을 뜨겁게 뒤흔든 노동자대투쟁은 능력주의에 맞선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다. 노동자들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외쳤다. 공돌이·공순이라며 자신들을 멸시하던 오만한 시선을 투쟁의 쇠망치로 깨부숴버리면서 세상을 뒤흔드는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노동자들은 천형의 낙인처럼 부끄러워하던 작업복을 이제 사회생활 속에서도 당당하게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인사고과제와 상여금차등제 폐지를 핵심 요구로 제기해 관철시켰다. 현장에는 질시와 반목 대신 민주노조 깃발 아래강고한 단결이 튼튼하게 뿌리내렸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비정규직을 철폐한 투쟁이기도 했다. 사내하청은 한국에서 제조업 비정규직의 전형적 형태인데, 1987년 이전에는 조선·철강 등의 일부 산업에 먼저 도입되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물꼬를 텄던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직영과 사내하청이 함께 만든 노동조합이었고, 하청 직영화를 주요 요구로 내걸어 관철시켰다. 현대종합목재 노동조합 또한 직영과 사내하청이 함께 만들었는데, 사내하청 조합원이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가장 평범한 노동자들이 불평등과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똘똘 뭉쳐 일어선 투쟁이었다.

 

2)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능력주의가 한국사회를 강타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한국의 자본가들은 30대 재벌 가운데 16개가 망할 정도로 혹독한 재편을 치러야 했다. 한국 자본가들의 사업 관행은 전근대적 관계주의에서 능력주의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자본가계급의 중심부를 세습적 자본가들이 틀어쥐고 있는 상황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한국 자본가계급 내부의 능력주의 재편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소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은 급격히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하게 양극화됐다. 전문직·관리직의 상층 소시민들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공유하며 세계 시민으로서 높은 삶의 질을 누리게 됐지만, 자영업을 하다 몰락을 거듭하는 하층 소시민들은 웬만한 노동자들보다 어려운 형편으로 빠져들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안정된 고용과 탄탄한 임금으로 상층 소시민의 삶을 뒤따를 수 있었지만, 중소영세기업과 서비스산업에서 주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987년 이전 노동자들의 삶으로 거의 되돌아가야 했다.

 

외환위기 이후 소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 속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전개되면서,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 또는 몰락에 대한 공포감이 다시 한 번 거세게 불타올랐다. 신분을 결정하는 기본 요인은 역시 학력과 학벌이었지만, (다양하게 확대된 고시와 입사시험·면접까지) 각종 채용시험이 최종 승부를 가르게 되었다.

 

신분상승을 위한 (또는 몰락을 피하기 위한) 학업경쟁은 초등학교부터 대학 이후까지 청소년과 청년의 삶을 끝없이 앗아가는 괴물로 진화했다. 사교육 시장이 거대하게 팽창하면서 경쟁이 점점 더 일찍부터 시작됐고, 학력과 학벌만으로는 취업의 최종 결과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청소년기·청년기를 보낸 MZ세대는 아름다운 꿈과 설레임, 우정과 모험으로 가득 채워야 할 인생 초입부를 살인적인 능력주의 학업경쟁에 거의 빼앗겨야만 했다.

 

소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양극화는 자본가계급이 추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였다. 소시민계급은 세계화에 올라탄 상층과 올라타지 못한 하층으로 양극화됐다. 노동자계급은 노동유연화를 피해갈 보호막을 가진 중심부 노동자들과 보호막 없이 고스란히 초과착취를 강요당하게 된 주변부 노동자들로 양극화됐다.

 

노동자운동은 노동자계급 양극화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양극화를 되돌리고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킬 책임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특히 민주노조운동은 큰 틀에서 보자면 주된 기반인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의 신분상승 욕망과 감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말이 아닌 행동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민주노조운동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고 힘을 집중하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의 양극화를 되돌리고 광범한 단결을 건설하기 위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킬 전망을 잃어버린 민주노조운동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자본가계급은 박근혜 정부를 통해 성과연봉제와 저성과자 해고제로 대표되는 노동개악을 꺼내들었다. 정규직의 삶 또한 1987년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공공연한 선언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민주노조운동은 빠르게 결집했고 박근혜 정부에 맞서 저항에 나섰다. 민주노조운동의 반격은 박근혜 정부를 결국 몰락으로 이끈, 힘의 균형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일격이 되었다.

 

3) 문재인 정부 시기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청년 담론을 지배했다

 

2015년 무렵 청년들은 헬조선과 금수저·흙수저를 말했다. 능력주의 학업경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의 표출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시기에 청년들은 공정의 이름으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반대했다. 모든 것을 시험으로, 즉 능력주의 학업경쟁으로 해결하라고 외쳐댔다.

 

가장 목소리를 높인 이들이 공공부문 정규직으로 이미 진입한 청년들이라는 점은 상층 노동자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1987년 이전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블루칼라 노동자들을 공돌이와 공순이로 비하하던 것,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들이 비정규직 투쟁을 방관하거나 심지어 반대하던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공공부문 정규직 청년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과 전교조가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정규직 청년들의 능력주의 공정론은 조합주의 속에 숨겨져 있던 상층 노동자들의 소시민적 욕망이 적나라한 형태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규직 청년들의 능력주의 공정론은, 한 발은 노동자운동에 한 발은 소시민적 욕망에 위태롭게 걸치고 서 있는 조합주의의 위선적 본질을 적나라하게 까발려주는 창이다.

 

그런데 공공부문 정규직 청년들의 능력주의 공정론이 취업준비생들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비정규직 청년들의 침묵을 압도하면서, 청년들 전체를 대표하는 목소리처럼 되었다는 점은 성격이 다른 문제다. 헬조선과 금수저·흙수저를 말하며 능력주의 학업경쟁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청년들의 목소리는 왜 잦아들었을까? 취업준비생들은 왜 자신들을 패배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데도 능력주의 학업경쟁을 옹호하고 있을까? 훨씬 수가 많은 비정규직 청년들은 왜 패배자의 삶을 강요당하면서도 능력주의 궤변 앞에 침묵하고 있을까?

 

능력주의 학업경쟁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청년들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깊이 연결돼 있을 것이다. 대다수 청년들은 촛불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능력주의 불평등사회를 상당 수준 뜯어고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아래서 능력주의 학업경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조국사태는 그들이 능력주의 학업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반칙도 서슴지 않는다는 걸 보여줬다. 부동산 폭등은 불평등을 더욱 급격히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불평등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걸 결정적으로 보여줬다. 그렇다고 능력주의 불평등사회를 깨부술 다른 대안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능력주의 불평등사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청년들의 희망이 급격히 꺾이면서, 청년들의 의식은 능력주의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대안은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뿐이라는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년들이 문재인 정부의 실체를 확인하고 깊이 실망하게 된 것은 사실 예정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청년들이 능력주의 불평등사회를 깨부술 다른 대안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노동자운동에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정부와 명확하게 단절하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전망과 투쟁으로 명확하게 나아가지 못했다. 진보정당은 민주당의 주변정당처럼 행동했고, 민주노총 안에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공공연히 활동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 노동자운동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린 결과, 노동자운동 전반은 민주노조운동의 상당한 양적 확대 속에서도 오히려 상당한 질적 후퇴를 겪었다. 분명 노동자운동은 문재인 정부와 다른 길을 가고자 했지만, 말을 넘어 행동으로 독립적인 전망과 투쟁을 세워내지 못했고, 당연히 청년들의 눈에는 명확한 자기 대안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노동자운동은 능력주의 불평등사회를 철폐할 구체적인 전망을 청년들에게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특히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노동자계급의 모든 역량을 결집해 낼 원대한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 정규직의 신분상승 욕망과 감성을 넘어서지 못한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립분산된 비정규직 투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개별 비정규직 투쟁들이 그들만의 문제해결을 넘어 전체 비정규직의 철폐를 위한 투쟁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로 어떻게 연결되고 나아갈 것인지 전망을 제시하지 못했다. 취업준비생들도, 다수의 비정규직 청년들도, 깊이 공감하고 기꺼이 동참할 수 있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의 전망을 우리는 어떻게 기획하고 구체화할 수 있을까?

페이스북 페이지 노동해방투쟁연대

텔레그램 채널 가자! 노동해방 또는 t.me/nht2018

유튜브 채널 노해투

이메일 nohaetu@jinbo.net

■ 출력해서 보실 분은 상단에 첨부한 PDF 파일을 누르세요.

■ 기사가 도움이 됐나요?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온라인 정치신문 <가자! 노동해방>을 후원해 주세요!

후원계좌 우리은행 1002-058-254774 이청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목록

게시물 검색
로그인
노해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