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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회 자료① | ‘공정성’,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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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건보공단 고객센터 파업지지 청년노동자선언 공동제안자 조회 6,816회 2021-08-1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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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7() 진행될 온라인 토론회 “‘공정성과 능력주의 담론,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참여하실 분들이 사전에 기본적인 내용을 검토하실 수 있도록 자료를 올립니다. 아래 글은 첫 번째 발제로 예정된 김태훈 동지의 “‘공정성’,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한 이유입니다.


공정성’,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한 이유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개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공정성과 능력주의 담론에 반대합니다

청년 비정규직의 침묵을 깨고 연대 투쟁으로 초대하자

 

어디서나 등장하는 공정성

 

공정성은 이 사회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구글에 공정성을 검색하면 54만 개의 기사가 뜬다. 최근 기사를 살펴보면 공정이란 표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벌총수에 돌아간 상금 1공정논란 불 지핀 예술원상(한겨레8.4)

공정한 노동전환·정의로운 기후대응시민사회·노동조합 기자회견(연합뉴스8.2)

피지컬로 경기출전 공정하냐올림픽 첫 성전환선수 논란(중앙일보8.1)

불평등 상속받은 MZ 예측가능한 공정을 원한다(서울신문7.15)

 

정치권으로 눈을 돌려도 공정이란 단어는 난립한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주자 이재명은 청년정책 간담회에서 공정성 회복해야 성장기회가 생긴다고 강조하고, 국민의힘 대표로 당선된 30대 청년 정치인 이준석은 닥치고 시험주의 공정성을 외친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정의와 공정을 내세우고,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도 과정의 공정을 약속하며 당선된 바 있다.

 

노동시장 내에서도 공정성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등장해왔다. 이전부터 인천국제공항, 서울교통공사, 한국도로공사 등 공기업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쟁점을 두고 내부 갈등이 치열하게 발생해왔다. 민간부문에서는 공정의 가치를 내건 2030세대 주축의 현대자동차 사무직노조가 결성되기도 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국민건강보험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투쟁을 두고서 일부 청년들 사이에서 공정성 훼손이란 목소리가 등장했고 사기업 정규직’, ‘로또 취업등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건보공단 정규직은 시험 없이 정규직화되는 것은 불공정한 처사라 외치고 있는 와중에 일부 취업준비생의 역차별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는 문제는 능력주의공정성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진단

 

치열하고 경쟁적인 교육체계

 

한국 교육현장을 들여다 보면 오로지 시험을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험은 학생들에게 주변 친구들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게 만든다. 학생들은 등급으로 표현된 상대평가제도를 통해 경쟁시스템을 철저하게 내면화한다. 좋은 등급 받고,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는 것만이 정상적인 삶인 것이라고 믿고 자란 그들은 공정한 경쟁말고 그 어떤 가치도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장한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공정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공정을 외치는 청년들조차 대부분 경쟁에서 탈락해 패배자로 낙인찍힌 삶을 살아가는데, 그들은 이것을 사회 구조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오로지 불공정의 문제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시스템 때문에 지금의 청년세대가 공정성능력주의에 강하게 집착하게 된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특별히 현재 청년세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적인 교육체계와 시험은 이전 세대에도 강하게 작동해왔다. 과거에도 학력고사와 고등학교 입시제도 등 시험을 통한 경쟁이 존재해왔다. 물론 지금에 와서 더 경쟁적 요소가 강화된 측면이 있지만, 현재 청년세대만 이런 경쟁 교육시스템을 겪은 건 아니다. 경쟁 교육시스템은 분명 능력주의 경향을 심화시킨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주요한 요인으로 바라봐선 안 된다.

 

잘못된 진단은 잘못된 해결책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 실제로 능력주의 논쟁이 불거질 때마다 등장한 해결책은 이러한 교육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나왔다. 예컨대 2004EBS 연계 수능이 도입된 주요 이유는 사교육 과열이었다. 사교육 과열 문제는 시험으로 대표되는 능력주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아주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다. 2010년에는 사교육 수요를 획기적으로 줄이기 위해 EBS 연계율을 70%까지 확대했다. 이런 조치는 사교육 과열을 조금이나마 해소했을지 몰라도 더욱 공정한 교육 경쟁시스템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스템은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능력주의를 공고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근본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MZ세대론과 분열 정치

 

청년세대가 모두 능력주의공정에 민감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문제가 있다. 예컨대 언론은 1981년생(현재 41)2010년생(현재 12), 이른바 ‘MZ세대가 비슷한 성장환경을 공유해왔다고 주장하면서 공정성에 민감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도한다.

 

정말 그럴까? 과연 한국사회의 33%를 차지하는 2030세대 인구 1,700만 명 모두가 같은 특성을 가질 수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같은 특성을 공유할 수 없다. 수천만 명의 인구는 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 없다. 이들은 부유한 집안과 가난한 집안으로 쪼개져 있다. 뿐만 아니라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지역, 가족형태, 종교, 사상,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등 수없이 많은 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니 이들은 같은 특성을 가질 수도 없을뿐더러, 백 번 양보해 그렇다고 해도 모두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그렇다면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공통으로 겪은 50~70년대생은 왜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서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가? 그러니 세대 정의는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아가 MZ세대의 특성과 관련된 기사들 대부분이 수도권 4년제 대학 청년들의 생각을 인터뷰해 보도한 내용이다.(“언론이 인용한 청년’ 70%가 서울 거주라니”, 미디어오늘, 2021.7.12) 전국에 대학조차 가지 못한 청년들은 스피커도 얻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인 셈이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공정이라는 말은 고작 상위권 학생들이 평생 걱정 없는 정규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시험을 통한 선발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과거보다 인터넷정보기술스마트폰 기술이 발달해 실시간 소통이 가능해졌다. 실제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끼리 자주 모이고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일부 사람들의 글을 황색언론들이 과장해서 보도한다는 점이다. 마치 대부분의 청년들의 생각인 것처럼 선동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청년들이 뭉쳐있는 커뮤니티의 의견은 필요 이상으로 부각되고 과장된다. 결과적으로 ‘MZ세대의 청년들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규정되고 기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기성언론이 강조하듯 이것은 특정 세대의 문제인가? 실상을 들여다 보면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의식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건보공단 고객센터 파업에 등장한 목소리는 대기업공기업 정규직의 특권적 목소리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갖기보다 체제가 강요하는 의식을 내재화한 것에 불과하다. 내재화된 의식은 본인의 계급적 위치가 자본가는 아니지만, 자본가처럼 사고하고 있는 이들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갈등을 부추기기 위한 장치로 청년을 소환하고 있을 뿐이다.

 

능력주의의 심리적 기저: 억울함과 선택적 분노

 

그러나 공정성 담론에서 능력주의는 단순히 자본의 갈라치기에 길들여진 것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실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사회적, 심리적 기반이 있다. “나는 노력해서 간신히 정규직이 됐는데 저들은 그런 노력도 안 하고 정규직이 된다고? 말도 안 된다. 정말 억울하다.” 능력주의의 기저에는 이런 억울함과 분노가 쌓여있다. 이 감정은 입시제도와 채용 과정에서 비리와 부패가 엮인 현실을 만나 더욱 시험에 목매게 만든다. 시험이라는 형식적인 기회의 평등을 지금의 상황에서 최선의 평등이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얼핏 보면 이들 모두가 공정성 이야기를 중요시하는 듯 보인다. 건보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파업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LG 고위직 채용비리에 대한 반응은 어땠는가? 분명 분노는 했으나 청와대 청원과 같은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사 댓글 대부분이 안 그런 데가 어딨냐며 자조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처럼 이들이 신봉하는 능력주의는 선택적 분노였다. 강자에게는 목소리 높이지 못하지만, 약자에게는 목소리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쟁의 치열함은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약자에게 흘러가게 만든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좋은 대학과 직장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에서 오로지 개인의 노력만으로 좋은 대학과 직장에 갈 수 있을까? 발제문을 작성하면서 학원강사로 오랜 시간 일한 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분의 말에 따르면 어떤 학생을 가르쳤는데 남편분 월급의 3/4을 죄다 학생에게 투자하는 집안이더라는 것이다. 또 대학입시에 아무리 블라인드 면접을 진행해도 특목고, 자사고는 선생님이 써준 기록만 해도 수십 장에 달하기 때문에 면접관이 이들을 알아채고 뽑아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만약 수능을 망쳐 재수를 하더라도 가난한 학생들은 대부분 포기하거나 가까스로 일 년 더 연장하며 고시원에서 힘들게 학업을 이어가지만, 있는 집 학생들은 3~5년 가까이 계속 재수를 하면서 어떻게든 수도권 명문대학에 들어가고 만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학생의 40%가 강남 3구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개인의 온전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불평등한 조건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

 

능력주의 공정성 논리를 받아들이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 확산을 들 수 있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공공성을 축소하고 기존 복지와 권리를 제한해왔다. 동시에 도덕적 해이를 운운하며 개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한국사회도 이런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비정규직제도가 도입됐다.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는 사라져갔고,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자 보편적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이런 상태는 고착돼 버렸다.

 

‘MZ세대이전 세대는 정규직이 무엇인지 또 비정규직제도가 도입돼 얼마나 비참하게 노동자의 지위가 추락하는지 몸소 겪었다. 이들은 비정규직이 문제라는 점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소위 ‘MZ세대라고 불리는 능력주의 신봉자들은 비정규직이 만연하고도 당연하게 있는 사회에서 태어났다.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게 공기처럼 당연한 시대에 살아온 것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요구가, 시험도 거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더 나은 보상을 가져가려는 부당한 요구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당연한 사회에서 태어난 이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탈출할 방법은 경쟁을 통한 생존뿐이다. 자본주의는 그 길 말고 어떠한 길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자본주의 자체를 뒤엎는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 유일한 탈출구는 채용시험뿐이다.

 

최근 노동조합에 새로 가입한 조합원들의 정서만 보더라도 드러나는 게 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절박하게 싸워 노조가 정말 필요하다는 집단의 공통 경험이 없으니 조합원으로서 누리는 권리가 마치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라 내가 잘나서 이 회사에 들어와 당연히 누리고 받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정부와 자본의 논리 앞에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후퇴하면서 능력주의 공정성에 날개가 달려버린 결과다.

 

능력주의 공정성 넘어서기

 

한국 양궁과 기회의 평등

 

올해 올림픽 9연패의 한국 양궁을 칭찬하며 이런 얘기가 나온다.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선발했기에 금메달을 계속 딸 수 있는 거라고. 오직 실력을 바탕으로 모든 선수가 똑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경쟁해 대표선수를 선발하는 원칙을 고수했다며 치켜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똑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현대차그룹 정의선의 전폭적 지원이다. 현대차 일가는 37년간 양궁 인재 발굴과 첨단장비 개발 등에 약 500억 원을 투자하고 유소년 때부터 체계적 훈련·지원을 했다. 이런 배경 아래 공정한 경쟁의 한국 양궁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궁에 대한 전폭적 지원은 사회로 따지면 무상교육 같은 공적지원이다. 한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갖기 위해서 들이는 노력에 이 사회가 모든 교육비용을 감당한다면 그 사람이 그 직업을 가졌을 때 자신의 직업을 특권적 지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에 환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은 자신의 노동을 개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이 사회에 기여하는 형태로 사용할 것이며, 진정으로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람으로 자라날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두에게 묻고자 한다. 우리 사회는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가? 오히려 지옥고(지하, 옥탑방, 고시원)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알아서 생존하길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환경 요인이 바탕이 되지 못한 채 그나마 기회의 평등이라는 시험을 외친들 소수는 승리자로 다수는 패배자로 낙인찍는 줄세우기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타인의 노동을 통해 살아간다

 

능력주의에 대한 대안은 노동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신의 능력이 뛰어난들 이 사회를 당신 혼자 운영하며 살 수 있는가?” 사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 타인의 노동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청소노동자의 노동 없이 공부를 하거나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당신의 능력은 누군가의 가르침이라는 노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없이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살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내 노력과 능력은 본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내가 노력할 수 있었던 환경, 잘사는 집안조차 당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의 노동 덕이고, 이 사회가 운영되도록 매일 노동하는 사람들 덕이다.

 

그런데 비정규직제도는 어떤 노동이 중요하고 어떤 노동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었다. 직업의 귀천이 생긴 것이다. 우리 사회는 청소노동자의 노동을 하찮게 취급한다. 이에 비해 판사, 변호사, 의사 등 어떤 특정 직업군에 대한 노동에 과도한 환상을 갖고 높게 평가한다. 그 직업을 갖기 위한 노력과 비용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라 반박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특정 직업을 하찮게 여길만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유기적으로 사회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개인을 파편화시킨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이 교사에게 샘 월급 우리 엄마아빠가 세금으로 주는 건데 왜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세요?”라고 말한다거나,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청소노동자에게 내 등록금으로 당신들 월급 주는데, 청소도 안 하고 파업하고 더럽게 왜 우리 앞에서 밥을 먹나? 왜 우리한테 피해를 줘요?”라고 말한다. 한 사회를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물건으로 바라보기에 벌어지는 일 아닌가? 자신은 합당한 값을 지불했는데 왜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냐는, 인간을 오로지 도구로 취급하는 것이다.

 

개인이 이룩한 성과, 성공은 각자의 실력과 능력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상호관계와 다양한 요소가 작동해 자신의 능력 이상의 성취가 가능해진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탈락한 이들에게 더 이상 목소리 내지 말고 패배자로 살아가라 말한다. 그것이 그에 맞는 정당한 대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이 있기에 세상은 돌아간다. 당신들이 말하는 탈락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다면, 세상은 단 하루도 굴러갈 수 없다.

 

분노의 화살을 돌려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기업 입사를 원하고, 공무원을 준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직업을 자아실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심화된 경쟁체제 속 그나마 안정된 일자리라 느껴서다. 분명 누군가는 어떤 직업을 희망하고 그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원하는 직업을 갖는 사람들이 몇 퍼센트나 될까? 회사를 그만두거나 반강제로 잘리고서 어쩔 수 없이 먹고살기 위해 자영업에 뛰어든 사람들이 많지, 자영업에 대한 애착과 자아실현을 위해 뛰어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각자가 원하는 직업을 자유롭게 가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대안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분노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 불평등하고 부자유한 상황에서 분노는 약자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다. 분노의 화살을 이제 다른 곳으로 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풀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만 살아남게 만든 자본과 정부, 사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나아가 평등한 사회란 무엇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그려가야 한다. 지금과 같이 분노의 방향이 사회가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이라면, 이 한정된 파이를 두고 누가 더 가져갈 건지 또다시 어떻게 나눌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분열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니 분노해야 할 대상을 확실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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