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플랫폼노동은 상품이 아니다(제레미아스 아담스 프라슬, 숨쉬는책공장) - 말장난으로 점철된 ‘플랫폼산업’의 실상을 꼼꼼하게 뜯어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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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타다가 다시 등장했다. VCNC(대표 박재욱)는 이른바 혁신의 아이콘답게 이번에 승인된 다섯 가지 샌드박스 가운데 세 개를 가맹택시 타다 관련한 것으로 채워 부활에 성공했다. 신기술, 신사업 모델은 실험단계에서 당연히 허용돼야 하고, 문제가 있어도 발전이 이뤄지면 해결할 수 있으니 당장 규제할 필요가 없다는 궤변, 혁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규제를 면제하는 게 당연하다는 혁신지상주의는 몇 개월 만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코로나19 상황이 길어지면서 배달대행 플랫폼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리고 있다. 타다, 카카오T, 배달대행 등 플랫폼산업은 혁신,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어느새 우리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 플랫폼산업이 다양해지고 저변을 확장하는 반면 플랫폼 노동자의 실상은 여전히 가려져 있다. 샌드박스를 통해 정부가 규제를 완화해주고 플랫폼 자본의 든든한 뒷배를 봐 주는 마당에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요구하며 혁신 잔치에 초를 치기란 더더욱 쉽지 않다.
제레미아스 아담스-프라슬의 책 <플랫폼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혁신을 자처하는 플랫폼산업에 정말 새로운 점이 있기는 한지, 플랫폼노동의 실상은 어떤지 체계적으로 파헤친다. 우리나라 플랫폼산업의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이에 관한 국내의 연구도 아직 많지 않은 터라, 외국 사례 중심이긴 하지만 플랫폼산업과 플랫폼노동을 상당히 깊이 있게 다루는 책으로 검토해볼 만하다.
낡은 것에 새 이름표 달기
플랫폼산업 하면 떠오르는 말 - 혁신경제, 긱경제, 공유경제, 주문형 노동. 이 중 그나마 긱경제가 플랫폼노동의 속성을 잘 반영한 편이다. 원래 긱(gig)이란 연주자들의 협연, 다음 계약이 보장되지 않는 일회성 작업이나 거래를 뜻한다고 한다. 거창해 보이는 저 새로운 표현들은 기껏해야 불안정한 임시직 노동, 비정규직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플랫폼산업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혁신이다. 이 책은 이 혁신이란 놈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플랫폼산업은 앱을 통한 ‘디지털 노동중개사업’으로, 사실은 ‘노동력을 긴밀하게 통제함으로써 거래의 전 과정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면서도 자신들은 단순히 매칭서비스를 할 뿐이라고 우긴다. ‘앱 뒤에서 누군가는 계속 일하고’ ‘긱 경제의 제품은 노동’이지만 정작 노동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플랫폼기업은 기술에 의존해 노동자를 엄격히 통제하며 구식 사용자처럼 운영하면서 엄청 혁신적인 체한다.
그러면서 노동법을 회피한다. 불법이 혁신? 개인사업자로 위장돼 있을 뿐 특수고용 노동자와 다를 바 없이 플랫폼 노동자들은 대부분 4대 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한 채 거의 모든 비용을 본인이 부담하며 더 적은 수입을 가져갈 뿐이다. 플랫폼산업이 전통적으로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집단(육아하며 알바하는 경단녀 주부, 학생, 자의 반 타의 반의 반퇴직자 등)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연성이란 이름으로 다수 노동자를 불안정노동으로 이끌 위험성이 다분하다.
일자리를 창출하고 추가수입을 제공하고 전통적으로 문제 있는 부문에서 노동을 공식화한다는 ‘장점’에도 이런 불안정노동의 확대는 결국 플랫폼산업의 혁신 말장난의 장막을 단숨에 날려버린다. 무엇보다 플랫폼산업의 대부분 일자리는 살인적인 저임금, 심지어 최저임금의 1/3에도 못 미치는 기아임금을 지급한다.
이에 더해 수요예측이 불가능하기에 유연성은 환상일 뿐이다. ‘영시간계약’은 근로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사용자 필요에 따라 노동자를 호출해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유연성은 결국 ‘사이버 프롤레타리아(사이버타리아)’를 낳는다. 플랫폼기업들은 긱경제 노동자가 대부분 부수입을 얻기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은 플랫폼 노동자 다수는 원해서가 아니라 마지못해 ‘독립적 상태’에 있게 됐다. 부업이 아니라 직업인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니 저임금은 결국 이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살인임금이 될 수밖에 없다.
플랫폼자본은 플랫폼 노동자가 개인사업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독립계약자’로 재분류하려 안간힘을 쓴다. ‘제3의 고용상 지위를 만들자는 제안’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우버, 리프트 등 플랫폼 노동자의 성격을 규정하고 사업주가 제대로 보상 못하면 처벌하는 내용을 담은 AB5법안이 올해 1월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시행됐다. 그러나 11월 미 대선 당시 캘리포니아 주민발의 법안 22호(prop22)가 통과돼 AB5법은 무력화됐다. 플랫폼기업들은 플랫폼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과 적당한 노동시간, 보험 혜택 등을 보장하지 않기 위해 AB5에 강력 반발해 오다 2,0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쏟아부어 주민투표 캠페인을 성공시켰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대우하지 않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 이것이 플랫폼산업이 목청 높이는 혁신인가!
‘사용자로 보이기를 원치 않는다’
한 번쯤 배달앱으로 주문해본 사람은 등급평가를 하거나 다른 이들의 평가에 의존해 선택을 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등급평가 알고리즘은 품질만 알리는 게 아니라 ‘노동자를 매일 그리고 특정 플랫폼기업의 생태계에 가두어둠으로써 통제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플랫폼기업은 다음 일거리를 찾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계속 경쟁하게 강요함으로써 낮은 임금수준을 유지한다.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시간, 대기하는 시간은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런 유휴시간 비용과 각종 유지비와 운영비(자동차나 오토바이, 컴퓨터 등의 제공 등)는 전혀 지급되지 않고 모두 노동자 책임이다. 낮은 임금 때문에 노동자들은 더 장시간 일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기업은 경쟁을 위해 인력 과잉공급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다. 기술을 이용해 통제와 관리가 오히려 전통적 기업보다 더 엄격해졌는데도 자신들은 사용자가 아니다?
여기서 또다시 말장난, 이름표 붙이기가 시작된다. 플랫폼 노동자들이 ‘유연성을 즐기기 때문에 노동법상의 권리를 실제로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거나 ‘그들을 근로자로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는 기업으로서 우리가 제공하고 싶은 일부 혜택을 제공할 수 없게 된다’는 헛소리.
‘더 이상 노동이라 말하지 않는다. 긱, 과업, 승차, 부업, 인공지능작업, 호의’ 기타 등등. 그러면서 긱경제는 돈벌이 사업이 아니라 마치 엄청 이타적이고 공동체적 사회를 지향하는 그 무엇인 듯 포장한다. 무엇이 공유되고 누가 누구와 협력하는지 전혀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말장난과 노동법 회피 노력을 동원해봤자 긱경제, 플랫폼산업이란 ‘노동자를 독립적인 프리랜서와 기업가로 배역을 바꿔 다시 캐스팅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뒤에 플랫폼 노동자들에게 ‘기업가정신’을 강요하면서 교통사고가 나거나 소비자의 항의가 들어왔을 때도 기업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보상도 회피한 채 노동자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자신은 ‘단지 중개자일 뿐 사용자가 아니’라면서. 그래서 ‘혁신은 점점 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 암호가 되고 있다. 바로 법을 어기는 것이다.’ 플랫폼산업에서는 해고가 없다. ‘공급자 협약을 해지’하거나 (앱상에서) ‘비활성화’될 뿐이다.
혁신의 역설
‘원래 실리콘 밸리에서 혁신적 기업이란 말은 작은 규모를 이용해 더 큰 산업이나 부풀려져 있는 경쟁자를 흔들어 놓는 기업을 뜻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오히려 소수의 공유경제 기업이 전통적인 산업의 거인들을 제치고 스스로 독점적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 플랫폼기업은 오로지 독점을 향해 나아가고 그래야 원하는 충분한 이윤을 가져갈 수 있다.
스타트업 기업이 기존 대기업(골리앗)과 경쟁한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이다. 다른 업체를 인수합병해서 독점대기업으로의 공룡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존 기업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최근 이슈였던 요기요의 배민 인수합병을 보자. 요기요(딜리버리히어로)의 배민(우아한형제들) 인수가격은 40억 달러(약 4조 8천억 원)로, 우리나라 인터넷기업 M&A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한다.
이 책은 말한다. ‘혁신이라는 용어는 긱경제 사업모델이 가진 훨씬 더 깊고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측면을 은폐한다. 사업의 위험이 플랫폼기업들로부터 개별 노동자에게로 급격하게 이동한다는 점, 저렴한 노동력에 의존하는 것이 진정한 혁신과는 정반대로 가도록 동기부여하는 진짜 위험성’이라고.
그렇게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으로까지 나아간다. ‘값싼 노동력에 대한 의존과 개별화된 과업집단으로의 노동력 분할 그리고 노동법의 적용 범위 밖에서 운영해야 한다는 고집은 모두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확인됐다. 인간이 아주 적은 비용으로 어떤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한 혁신적인 기계의 개발과 설치, 유지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것’ 말이다. ‘기업가들이 값싼 외주 노동자에 의존하는 것은 불완전하고 열등한 기계를 영구적으로 사용하게 해 좀 더 경제적인 개선된 생산방식의 채택을 막는다.’ 최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플랫폼산업이 오히려 생산방식의 발전과 개선에 역행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 생산양식의 발전과정은 인간-노동자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얼마나 더 키우고 현실에 적용하는가, 특히 노동자계급의 집단지성, 과학기술의 발전성과를 활용하는가와 깊숙이 연결된다. 이 점에서 특히나 플랫폼산업은 해롭다.
‘혁신가들을 혁신해 보자’
혁신을 부르짖지만 알맹이는 없는 혁신가들.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플랫폼산업을 진짜로 혁신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사실우선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바로 노동자를 분류하는 문제다. 누가 봐도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인데 이른바 혁신가들은 ‘허구와 왜곡된 언어, 심지어 참신한 전문용어까지 사용해서’ 재분류하려 한다. 특수고용 노동에서의 ‘전속성’ 문제와 비슷하다. ‘사용자가 한 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가?’ 특히 플랫폼산업의 경우 소비자와 기업이 함께 사용자 기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이런저런 복잡한 딴지를 걷어내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바로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음으로 ‘긱노동 탄력요금제’를 제시한다. ‘유연한 노동에 대한 특별보상(uplift)’은 노동자에게 위험하고 불안정한 노동에 대해 보상하고 사용자가 정말 꼭 필요한 경우에만 유연노동을 사용하도록 할 거라는 주장이다. 호주는 복수의 최저임금률을 사용해서 임시직 노동자에게 더 높은 시간당 소득을 보장해준다. 폴란드는 2016년에 ‘현재 거의 모든 노동은 고용관계로 계약을 맺었는지 아니면 용역계약을 체결했는지에 관계없이 동일한 최저임금(또는 가격)의 적용을 받’도록 최저임금법을 개정했다. 그 외에도 저자는 규제에서 자유로운 이른바 혁신기업이 내야 할 세금을 제대로 내도록 플랫폼기업에 대한 각국 정부의 세제혜택을 없애야 한다고 제기한다.
저자의 주장에선 자본가들을 지원하는 게 본분인 정부가 마치 모두에게 ‘공평’해질 수 있을 것처럼 기대하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그런 점은 내겐 좀 비현실적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플랫폼기업의 혁신 타령의 허점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플랫폼노동, 그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름과 권리를 되찾기 위한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자본가들에게 혁신이란 곧 비용절감, 노동의 절약일지 모르지만 노동자에게 그것은 대량실업과 불안정노동, 저임금과 가난으로의 추락일 뿐이다. 이 불합리함을 바꾸기 위해 플랫폼 노동자 당사자는 물론이고 노동자 모두가 이른바 혁신경제에 더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노동운동 패턴에만 머물지 않고 전체 노동자의 삶을 바꾸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자동화가 어떻게 펼쳐지든 간에 중요한 것은 자율주행차와 하인 로봇의 약속이 긱경제 그리고 더 나아가 전체 노동시장에서 양질의 근로조건을 보장해야 하는 절박함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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