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 I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리얼리티 정치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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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렬한 정치 풍자극,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는 사격 금메달리스트 출신 셀럽 이정은이 갑작스레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후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다룬 블랙코미디 정치 풍자극이다. 10부작 드라마를 완주하는 내내 작가들의 역량에 감탄하며 낄낄댔다. 부르주아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속살을 이렇게 잘 까밝힐 수 있을까! <씨네21>에서 이 드라마를 올해(2021년)의 시리즈 1위로 뽑았다더니 다 이유가 있다.
드라마에서 이정은은 보수야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인물이다. 초선 시절 거수기 노릇만 하다 소속 정당에서 팽(烹) 당한 처지였는데, 임기가 1년 남은 청와대에서 이정은을 리스크 관리용 장관으로 발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정권의 기대와 다르게 이정은은 특유의 순발력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껍데기 장관을 넘어 대권 예비주자로까지 자리매김하게 된다. 정치판에서 상품성 있는 여성이 소비되는 방식, 그러나 이를 마다하지 않고 도리어 권력의 핵심부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 정치인의 권력의지를 씨줄 날줄로 엮어 보여주며 웃음을 짓게 한다.
이정은, 차정원(주인공의 경쟁자로 4선의 여성 정치인이다) 같은 등장 인물들에게 정치란 최고 권력을 얻기 위해 나아가는 입신양명의 대장정 같은 것이다. 이들에겐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차별과 억압도 정치 소비자들로부터 ‘까방권’을 얻기 위한 정치적 자산이거나, 경쟁 정치인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들은 모든 사안에서 대중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체크하며 정치공학적 유불리에 따라 행동의 향방을 결정한다.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거짓말과 범죄 은폐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청와대’란 하늘이 도와준다면 개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영달(榮達)을 의미한다.
정치적 사명 의식이 고릿적 낭만이 된 세상
하기야 이제 더 이상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거대담론을 읊어대지 않는다. ‘조국근대화’에 헌신하겠다던 박정희도,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YS와 DJ도, 이제는 모두 흘러간 옛 시대의 낭만적 정치인들이 되었다. 박정희가 얘기하던 ‘조국근대화’가 실상은 국가권력의 폭압적 비호를 필요로 하는 자본의 시초 축적 열망이었다는 것, 그리고 YS와 DJ가 내세우던 ‘민주주의’가 실제로는 자본의 착취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성숙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의미했다는 것은 잠깐 제쳐두기로 하자. 어쨌건 DJ 정도면 때론 자신의 목숨도 걸 만큼의 정치적 사명 의식은 가지고 있었다.
눈을 돌려 작금의 대선판을 보자. 너 말고 내가 권력을 잡겠다는, 저 진저리 처지는 내로남불의 권력욕을 빼고 나면 이른바 유력 대선주자들에게 뭐가 남는가? 대체 그들에게 정치적 문제의식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눈앞에 닥친 기후위기, 극심한 자산 불평등, 저출생, 노동자들의 파괴되는 삶, 미중 제국주의 양강 사이의 외교 문제…, 굵직한 정치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이들은 표 계산의 득실을 따져 피상적으로만 현안을 다룰 뿐이다. 대체 저들에게 일말의 정치적 책임감이란 게 있긴 한가? 물론 애당초 부르주아 정치인들이 체제를 넘어서는 진정한 해법을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그래도 예전에는 뻔뻔한 거짓말일지언정 허튼소리라도 내뱉더니 이제는 철면피하게 공약 소꿉장난이나 벌여놓고 있다는 걸 지적하는 것이다.
뜬금없이 한 줄짜리 ‘여성가족부 폐지’ 문구를 정책이랍시고 SNS에 올려놓은 채, 이마트에서 멸공 인증 놀이를 하고 있는 윤석열을 보라. 한때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을 떠들더니만 중도 표를 얻기 위해 자기 공약을 모두 뒤집고 나서,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이 세상을 구원할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드는 이재명을 보라. 다들 현실을 받아들이길. 바로 이들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윤석열이 시인했듯이 그들에게 소속 정당이란 그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부르주아 정당으로서 가지는 공통점은 그들 사이의 사소한 차이를 질적으로 뛰어넘는다.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홍준표는 1996년 국회의원 선거로 정계에 입문했다. 홍준표가 어딘가에서 밝히길 원래는 당시 이기택 민주당에 입당하기로 했는데(동시에 DJ로부터도 영입 제안을 받았다 한다), 지역구 배정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는 바람에 YS 신한국당에 입당한 것이라 한다. 지금의 극우 정치인 홍준표 대신, 햇볕정책을 열렬히 옹호하고 있을 민주당 정치인 홍준표를 떠올려봐도 재밌을 것이다. 그들이 침소봉대하는 정치적 차이란 그냥 우연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가치, 부르주아적 이념일지언정 그래도 가치와 이념을 내세우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뜻도 모를 ‘공정’과 ‘상식’만 남발될 뿐, 아예 가치와 이념 자체가 실종된 시대다. 내로남불의 진영 논리로 무장한 채 권력을 향해 실시간 인기 게임을 벌이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정치판이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정치판 묘사는 객관적 현실을 충실하게 재현한 리얼리즘일 뿐이다.
또 한명의 문제적 인물, 김성남
김성남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주인공 이정은의 남편이다. 그는 진보적 시사평론가로, 극에서 ‘유시민이 되고픈 잔잔바리’로 묘사되는 좌파 지식인이다. 알튀세르를 강의하고 다니고 아내 앞에서는 청와대의 무식한 NL들을 비난하지만, 어떻게 하면 청와대에서 한자리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유명세를 얻고 책을 팔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속물에 불과하다. 드라마에서는 김성남의 속물 근성을 룸살롱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결정적 장면 한 컷으로 간결하게 정리해준다.
더구나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외양과는 달리 그는 흔해 빠진 가부장적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이 보수야당 출신인 이정은을 계몽시켰다 자부하지만, 이정은이 문체부 장관으로서 출세 가도를 달리자 자격지심이 폭발해 터무니없는 납치 자작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드라마의 장점은 인물 개성의 입체적 변화를 개연성 있게 묘사한다는 것인데, 김성남 역시 어느 순간에서는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영부인’을 꿈꾸며 정치 활극의 배역 하나를 기꺼이 떠맡는다. 물론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영부인’이란 지위보다 자신 안의 가부장성이 더 강력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김성남은 현실의 계급투쟁과 괴리된 소부르주아 지식인을 상징한다. 그에게 좌파 사상(알튀세르가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도 잠깐 제쳐두기로 하자)이란 그저 경제적 성공을 얻기 위해 판매해야 하는,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상품에 불과하다. 그람시가 얘기했던 노동자계급의 유기적 지식인, 즉 노동자 대중과 깊이 연결돼 실천 활동에 참가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과 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진짜 지식인과는 정반대 되는 인물이 김성남이다.
김성남은 계급투쟁의 퇴조와 함께 제 살길을 찾아 제도권으로 스며들었던 수많은 활동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노동자계급의 실천 투쟁과 결합하지 않은 채로 좌파 사상을 체현한다는 것은 자기 착각에 불과하다. 지난 시절의 영웅적 무용담을 곱씹으며 나는 저들과 다르다 착각하지만, 사실 자신 역시 보수적 입장에서 체제를 옹호하는 한 명의 생활인(生活人) 이상 이하도 아니다.
진짜 희망은 새로운 노동자 투쟁 속에서 솟아날 것이다
역대급 비호감 경쟁이라는 이번 대선을 지켜보며 정치적 냉소주의를 떨쳐버리기란 쉽지 않다. 현실의 노동자운동과 동떨어진 채 쓰잘데기 없는 훈수만 늘어놓다 고작 ‘토착왜구 박멸’의 한심한 깃발이나 치켜올리는 진보 지식인들의 행태를 보며 욕지기를 참아내기도 힘들다. 선거는 예상대로 저들만의 소꿉장난으로 흘러가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노동자계급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진짜 희망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다시 솟구칠 때 발견될 것이다. 선거가 자본가들의 공허한 말장난 놀이터가 아니라 노동자 투쟁의 거대한 잠재력과 에너지를 발산하는 공간으로 되는 것,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사상이 지식소매상들의 조잡한 상품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망에 넘친 노동자들의 대중적 사상으로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노동자 대중투쟁이 다시 그 위용을 드러낼 때 가능해질 것이다. 날로 명백해지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체제 위기가 그 전망을 다시 현실로 불러오고 있다. 역사에 대한 낙관적 전망 아래, 잠깐은 이 드라마를 보며 웃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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