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I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 - 민주적 계획경제는 실현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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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번역 출간된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경영학 교수 폴 애들러(Paul Adler)다. 그는 민주사회주의자를 자임한다. 버니 샌더스로 대표되는 바로 그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사상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우선 흥미롭다. 경영학이 어떤 학문인가.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걷어치우고 보면, 경영학은 노동자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어떻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학문 아닌가. (물론 이런 목적의 학문이라 할지라도 노동자들이 경영학을 연구하고 재활용할 가치는 충분하다. 대표적으로 사회조직 내 인간의 행동 양식을 다룬 조직행동론이 그렇다.)
폴 애들러도 비슷한 뜻에서 “경영대학 교수 중에서 민주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이는 드물다”는 점을 시인한다. 그럼에도 자신은 경영학 연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몇몇 사업체의 경영 방식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이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두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두 가지 결론이란 지금의 자본주의 방식 대신, 사회적 생산과 자원의 배분을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전략적으로 경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오늘날 이 둘의 결합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여섯 가지 위기의 원인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에 앞서 폴 애들러는 현재 인류가 여섯 가지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적 불합리, 노동자 소외, 반응이 없는 정부, 지속 불가능한 환경, 심각해지는 사회 분열, 국제 갈등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들이다.
대표적으로 ‘경제적 불합리’를 살펴 보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한편에서는 과도노동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실업과 불안정노동으로 고통 받는다. 반면 2010년 기준 미국의 상위 1% 부유층은 전체 주식과 뮤추얼 펀드의 48%, 전체 사업 지분의 61%를 보유했다. 이 사회는 한편에서는 필요하지도 않은 재화와 서비스를 점점 더 많이 생산하며 천연자원과 인간의 노력‧창의력을 허비하지만, 다른 한편 말라리아나 결핵 치료제 같이 돈 안 되는 필수품 생산은 부족하다.
폴 애들러는 여섯 가지 위기의 근본 원인이 “자본주의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으로 구성된 특별한 재산 체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옳다. 사회적으로 필요한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일 지구가 망한대도 이윤을 얻을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뛰어드는 것이 자본의 본성이다. 이윤 획득을 위한 자본 간의 치열한 경쟁은 독점의 폐해로 귀결되거나, 아니면 개별 자본의 무정부성에 따른 경제위기와 대량 실업으로 이어진다. 노동자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하나의 도구로 소외되며, 자본의 이윤 추구에 종속된 정부는 인민을 대표하지 못한다. 기후위기, 사회에 만연한 차별과 혐오, 제국주의 패권 경쟁 역시 이윤생산체제인 자본주의의 본질에서 기인한다.
한편 자본은 이윤 증대를 위해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추구하고 상호의존성을 증대시킨다. 즉 자본주의의 생산자는 “고립된 상태에서 개발‧운영하기보다는 다른 생산자와 더 넓은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 역량을 흡수‧활용해 노하우와 기술의 혜택”을 받는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성의 증가를 ‘생산의 사회화’라고 표현할 수 있다. 폴 애들러는 “생산 활동은 점점 더 상호의존적으로 이뤄지는 데 반해 생산 활동이 의존하는 자원, 즉 우리 삶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물질과 장비는 여전히 사유재산인 것”이 자본주의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위기의 해법
자본주의의 위기가 워낙 명확하다 보니, 자본주의의 개혁 모델 역시 백가쟁명 식으로 쏟아져 나온다. 폴 애들러는 이 중 윤리적 자본주의, 규제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 테크노 유토피아주의 등의 모델을 차례로 검토한다. 그리고 어떠한 개혁 모델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기업들이 우리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한”, “우리가 직면한 여섯 가지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진정한 대안인 민주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우선 사회의 주요 생산 자원을 공공의 소유로 둠으로써, 경제의 핵은 하나의 거대한 기업이나 다름없어질 것”이고 “오늘날 경쟁적인 여러 기업은 곧 핵심적인 거대 기업의 부차적인 팀원으로 바뀔 것”이다. 마치 “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기업 내 여러 부서를 경영하듯이, 이제 한 팀이 된 경쟁 기업들은 상호의존적 문화를 바탕으로 전략적으로 경영”하게 된다. 물론 “민주적인 방식으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이를 좀 더 친숙하게, 노동자 민주주의에 기반한 민주적 계획경제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전통 그대로다.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이윤 대신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는 체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획경제’를 구소련 말 상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로 상징되는, 다시 말해 대단히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인 경제체제라고 인식한다. 지금의 사회주의자는 민주적 계획경제가 실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을 넘어서는 합리적 체제라는 점을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민주적 계획경제는 실현 가능한가?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앞서 밝힌 대로 폴 애들러는 자본주의의 초대형 기업 몇 군데를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적 계획경제가 실현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현재 전 세계에 1만1,700개 소매점을 두고 직원이 230만 명에 달하는 월마트, 매년 약 3억 명의 소비자에게 20억 개에 가까운 제품을 배송하는 아마존 등의 기업 규모는 웬만한 국가 몇 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그런데 이들 초대형 기업 내부에서 “원자재 공급부터 최종 완제품 판매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영자의 전략 경영으로 조정”된다. 즉 초대형 기업 내부에서는 이미 시장 경쟁 대신 전형적인 계획경제가 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각각의 대기업이 조직을 관리하면서 내부적으로 맞닥뜨리는 문제는 우리가 경제를 사회주의적으로 관리하려고 할 때 극복해야 할 문제와 유사”하다. 여기서 계획경제에 대한 오래된 비난에 답해 보자.
첫째, (독과점의 폐해는 논외로 하고) 자본주의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와 공급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데 비해, 계획경제로는 절대 이 효율성을 쫓아올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폴 애들러는 “현대의 컴퓨터 기술은 경제 전반에서 일어나는 생산 및 투자 계획을 충분히 계산해낼 수 있어서 자본주의 시장을 통해서만 균형을 맞출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오늘날의 대기업은 이미 ‘전사적 자원 관리(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와 ‘판매 운영 계획(S&OP, Sales and Operations Planning) 같은 시스템으로 경영 전략을 세우기 위한 모든 기본 자료를 통합해 활용한다.
둘째, 계획은 본질적으로 중앙집중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계획경제란 필연적으로 수직적 관료체계, 이른바 지령경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미래의 경제 혁신에 꼭 필요한 개인의 창의성은 말살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폴 애들러는 이른바 ‘고차원 기업’에서 행해지는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실례로 들어 반박한다. ‘고차원 기업’은 디지털 기술 발전에 기반해 경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통합한 후, 하위 조직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전체 전략과 조율하기 위한 상향식 경영 참여 기법을 개발해왔다. 중앙집중적 의사결정과 개별 구성원의 자율성 사이의 긴장은 이와 같은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를 통해 실천적으로 해소된다.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는 이어 ‘협력하여 혁신 이루기’, ‘협력하여 학습하기’, ‘협력하여 일하기’로 나아간다.
이것이 원활하게 돌아가는 ‘고차원 기업’에서는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의존성 기업 문화가 자리 잡는다. 즉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독특하고 다양한 발상이 필요한 상황이더라도, 직원과 기업이 공동의 목표를 공유한다면 개인주의 문화와 집단주의 문화가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이 팀에서 결정한 업무 지침을 따라야 하더라도 집단주의 문화는 향상할 기회를 확인하며 도움이 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개인의 창의력을 방해하지 않는다.” 고차원 기업 구성원 누군가가 비유했듯이, 개인기에만 의존하던 길거리 농구가 개인 기량과 팀 플레이가 융합된 NBA 프로 농구로 바뀌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물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첫째, ‘고차원 기업’의 위와 같은 경영 기법은 그들이 시장에서 가지는 독점적 지위 때문에 가능하다. 이들 “기업의 방대한 규모는 다양한 기업 활동을 통제하면서도 시장 경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당장의 생존이 급선무인 ‘저차원 기업’에서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란 꿈같은 헛소리일 뿐이다. 이런 곳은 자본의 독재 권력이 여전히 노골적이다. 둘째, ‘고차원 기업’ 역시 언제까지나 경쟁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 역시 비용의 제약에 부딪히거나 실적의 압박을 받을 때면 자신들의 원칙에서 퇴보하기 일쑤였다. 셋째,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협력하여 전략 세우기가 단일 회사에만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변덕스러운 시장 상황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초대형 기업 내부에서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이 넘치게 확인된다면, 이를 국가경제와 세계경제의 수준에서 좀 더 폭넓고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겠는가? 사회 전체의 생산수단을 사유화 한 자본가계급이 독재적 권력을 휘두르는 사회 대신, 노동에 참여하는 모두가 민주적으로 협력하여 사회적 필요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이를 실행하는 사회가 왜 불가능하겠는가? 마르크스는 바로 이런 사회를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라고 불렀다(<자본1>).
민주적 계획경제는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일찍이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자본주의에서 “생산수단과 생산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것”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개인들의 사적 생산을 전제로 하는 전유(專有) 형태에 복종한다”고 표현했다. 이 모순이 한편으로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공장 내에서의 생산의 조직화와 사회 전체 내에서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 사이의 대립으로 재생산”된다고도 지적했다. 문제의 해결은 “생산력들의 사회적 본성이 실제로 승인되는 것에만, 따라서 생산방식, 전유방식, 교환방식을 생산수단의 사회적 성격과 일치시키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이처럼 폴 애들러는 엥겔스가 말한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소유 사이의 모순,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과 개별 기업 내에서의 고도의 계획성 사이의 모순을 똑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여기까지다. 뒤이어 폴 애들러는 민주사회주의의 실현 경로로 몽상가 같은 소리를 내놓기 때문이다.
폴 애들러가 민주사회주의 변혁의 시나리오로 내세우는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심각한 경제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주사회주의가 절실하다는 시민들의 요구가 있으리라는 내용”이다. 파산한 기업과 은행을 정부가 인수하라는 요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기후재앙이 현실화하여,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의 전시경제체제와 비슷한 비상체제로 돌입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첫 번째는 경제위기, 두 번째는 환경위기로 인해 작금의 자본주의가 파국을 맞게 되고, 이로써 민주사회주의 변혁이 달성 가능하다는 파국론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인식 자체가 섣부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장기불황>이란 책에서 “(자본주의가) 아직 손대지 않은 거대한 산업예비군이 있는데, 특히 아프리카에 있다. 아프리카의 인구는 단지 90년 동안에 걸쳐 네 배 넘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는 아프리카는 물론 “아시아와 남미와 중동의 인구 수억 명을 착취할 노동력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고 “이는 성숙 자본주의 경제국들의 이윤율을 벌충하기 위한 전형적 방식”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인류의 절대 다수가 경제위기와 환경위기로 고통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윤이 생산되는 원천이 있는 이상 자본주의는 스스로 박물관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마지막 세 번째 시나리오는 개량주의의 빛바랜 문서 그대로인데, 즉 “점진적인 변화”를 통한 민주사회주의의 달성이다. 최저임금 인상, 더 강력한 환경 규제, 보편적 의료보험, 노동자 이사, 무상 교육 등등….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로 이행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금지법도,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도 그놈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변하는 문재인 정부의 행태를 떠올려보라. 자본가들이 사유화한 생산수단을 사회가 되찾는 것이 과연 사회적 합의를 통한 “점진적인 변화”로 가능할까?
이와 같이 폴 애들러가 민주사회주의를 향한 몽상적 경로를 이야기할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물론 자본주의가 창출한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오늘날 민주사회주의, 민주적 계획경제는 완전히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실현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역량을 역사 앞에 실천으로 증명했을 때에 가능하다. 한마디로 혁명적 투쟁 없이 민주적 계획경제로의 이행은 불가능하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는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단지 지배계급이 달리 전복될 방법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복하는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모든 낡은 찌꺼기를 목구멍으로부터 씻어버리고 사회를 새롭게 건설할 역량”을 갖추게 되기 때문이라고 썼다. 역사적으로 구소련 등에서 실시한 계획경제가 실패했던 근본적 이유는, 인터넷, 전산화 등의 기술적 기반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운영권을 쥔 자주적 노동자권력이 내전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을 거치며 소멸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의 상징이던 노동자평의회는 그저 당의 결정을 집행하는 거수기로 전락했고, 민주적 협력이 불가능한 관료적 계획 하에서 노동자들의 창의성은 압살됐다.
결론적으로 노동자들의 의식적, 자주적 계급투쟁의 중요성이 빠진 폴 애들러의 <1%가 아닌 99%를 위한 경제>는 중대한 한계를 갖는다. 그럼에도 현대 자본주의 기업 연구를 통해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을 살핀 이 책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동지들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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