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사 차별만사] 여성노동자 잇다(5) I 이젠 욕하면 전화 끊겠다고 당당히 얘기해요 - 보라매병원 진료예약센터 정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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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매병원 진료예약센터는 2018년 10월에 입사했어요. 남녀 동생 한 명씩에 제가 첫째고 결혼 5년차예요. 동갑내기(41세) 신랑은 누나 둘에 막내, 흔히 말하는 홀시어머니에 외아들. 아이는 아직 없어요.
회사에서 하는 일은 기본 예약부터 진료에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 문의사항 응대, 그리고 요즘엔 코로나 관련된 안내 등을 해드리고 있어요.
아이가 생기면 생활이 굉장히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저는 사무직이 이게 처음이에요. 그전에는 학교 다닐 때부터 서비스 계통, 그러니까 호텔이나 외식업 쪽 일을 주로 했어요. 아무래도 결혼이라는 게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잖아요. 2017년 3월에 결혼하면서 가정에 충실하자는 생각에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통상직에 마침 집 근처이기도 하고 해서 여기로 옮겼어요. 요식업에서 일하면 늘 밤늦게 끝나서 가족하고 시간 보내기도 어렵고 시댁 가족행사 등에도 맞추기 어렵더라고요. 남들 쉴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 쉬는 직업이다 보니까. 지금은 주말에 쉴 수 있어서 좋아요.
그런데 신랑이 백화점 입점 옷가게에서 일해서 밤 9시에 집에 와요. 자기 가게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장사가 너무 안 돼서 가게를 접고 알바를 하고 있어요. 저녁은 기다렸다 같이 먹기도 하고 주말엔 제가 쉬니까 픽업해 와서 먹기도 하고. 우리가 아이가 없으니 가능한 거지, 아이가 있으면 정말 굉장히 많이 달라질 것 같기는 해요. 둘 다 이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만 좀 걱정도 돼요. 우리나라는 애를 낳아서 키울 만한 조건이 그리 좋지 않잖아요. 특히 육아휴직의 경우 우리 여자들은 괜찮은데 아빠가 육아휴직 내는 건 아직까지 사회적인 시선이 안 좋기도 하고. 현재 생활이랑 아이 키우는 거랑 엄청난 차이잖아요. 육아부담이 없으니까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아요.
신랑이나 저나 아침 식사를 안 해서 아침에 바쁘진 않아요. 가사 분담을 했지만 제가 더 많이 하긴 해요. 신랑이 해도 제가 좀 성이 안 차면 한번 더 손이 가요. 제가 가끔 잔소리하지만, 신랑이 저보다 깔끔해서 제가 잔소리 듣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근데 남자들이 나이 들면 좀 괜찮아져요. 저희 아버지도 완전히 가부장적이고 밥 같은 거 절대 안 하고 빨래, 다림질 절대 안 하셨는데 지금은 다림질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살림 거의 다 해요. 어머니는 일하시고 아버지는 정년 퇴직하셨거든요.
뭔지 아시죠, 아들에 대한 그런 거?
아버지가 장남이시고 제 남동생이 장남이에요. 제가 장녀고 그 밑에 여동생, 아들을 낳으려고 마지막에 남동생을 낳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동생한테 양보해’, 이건 있었는데 저는 그나마 맏이라 괜찮아요. 문제는 여동생. 어릴 적부터 ‘내가 해 달라고 하면 안 해주고’, 그런 생각이 지금도 있나 봐요. 어렸을 때 시골에 증조할머니도 살아계셨어요. 여동생이랑 비슷한 또래의 막내 삼촌이 있는데 내 동생이 쑥개떡을 먹으려고 집으니 할머니가 손을 탁 치면서 ‘삼촌 줘야한다, 아들 줄 거야’ 해서 그게 상처였다고. 음식 나를 때도 손녀딸한테만 시켜요. 손자들은 그냥 가만히 있고. 뭔지 아시죠, 아들에 대한 그런 거?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많이 엄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좀 더 엄해서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어서 지금보다는 더 훨씬 젊었을 때 자존감이 좀 많이 낮았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여자니까 아들한테, 남자한테 양보해라. 동생이지만 아들이니까, 장남이니까 양보해라.’ 그리고 친척집 가면 장손이니까 남동생에겐 용돈을 더 준다거나 맛있는 걸 챙겨주고. 어렸을 때 그런 게 엄청 기분 나빴어요.
신랑이 어렸을 때 계란후라이 하면 신랑만 줬대요, 누나들 안 주고. 명절 때 갓 시집온 저는 어머니한테 잘하려고 열심히 일해서 음식 만들었는데 남편 매형(시매부)이 뒤늦게 와서 앉아 있으면 음식을 먼저 챙겨줘요. 시매부나 나나 똑같이 시집장가 온 사람인데 시매부한테만 저렇게 하나, 시매부가 잘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 들어요. 그래도 뭐 딸 시집보낸 부모 마음은 그런가 보다 했죠.
아빠가 건설업 하셔서 집이 웬만큼 살다가 IMF 때 망했어요. 아빠가 그 뒤로 변변한 직업을 갖고 살진 않았어요. 그때부터 실질적인 가장은 엄마가 됐죠. 엄마가 고생을 엄청 많이 하셨어요. 중학교까지 나오셨는데 그 학력으로 서울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되게 한정적이잖아요. 식당 일 그런 일밖에 할 게 없었어요.
엄마가 형제가 많은 집 둘째였거든요. 밑에 아들들, 동생들이 있으니까 본인한테까지 학업의 기회가 많이 안 왔겠죠. 만약에 엄마가 공부를 좀 많이 했으면 서울에 와서 조금 덜 힘든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좀 많이 했어요.
급여는 적어도 워라밸이 중요해요
요식업은 원래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앉아 있는 직업보다 몸을 쓰는 직업을 갖는 게 좋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제가 이타적인 면이 좀 많아서 남들하고 대면하는 일을 하고 싶어 호텔경영학과를 갔어요. 그때 IMF 사태가 터져서 제대로 졸업을 못 했어요. 또 맏이잖아요.
지방대를 다녔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호텔 관련 일이 화려한 면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학교 다닐 때 너무 힘들었어요. 집안 사정이 안 좋아져서 저에게 생활비 보태줄 형편이 전혀 안 돼서 제가 다 벌어야 했어요. 어느 날 보니까 나는 분명히 학교 가려고 여기 와 있는데 학교는 안 가고 일만 하고 있는 거예요.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이럴 바에는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서울 올라오자마자 바로 패밀리 레스토랑에 취직했어요.
거기서 한 8, 9년 일했어요. 만족스러웠죠. 같이 일하는 사람도 재미있고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고 손님들하고 친해지면 단골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내가 즐거워하는 요소가 있으니까 오래 일했던 것 같아요. 회사에 관리자도 여자가 더 많았고 회장님도 여자, 일하는 사람도 여자가 많아서였는지 여자로서 부당한 대우 이런 건 없었던 것 같아요. 마지막 요식업은 치킨집이었는데 오후 4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일했어요. 몸도 많이 아팠어요. 족저근막염, 하지정맥류 걸리고 아무래도 밤낮이 뒤바뀌는 직업이라 안 좋아서 겸사겸사 결혼을 계기로 바꾸게 됐죠.
그때는 바쁜 시간만 지나면 괜찮았는데 지금은 전화가 밀려있는 게 보이니까, 이걸 빨리 받아야겠다는 부담 때문에 친절하게 해주고 싶은데 마음과 달리 그렇게 안 되기도 하고. 센터 내에서도 친절한데 콜 조금 받는 사람, 많이 받는데 좀 덜 친절한 사람 이렇게 있거든요. 그 중간에 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고민을 하죠, 항상. 근데 또 아무래도 시립병원이다 보니까 취약계층, 고령 환자가 많아서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말도 잘 안 통하고.
콜센터는 사실 두 번째예요. 어렸을 때 보험회사 콜센터 다녔는데 되게 짧게 다니고 사실 도망쳤어요, 너무 힘들어서. 거기보다는 여기가 훨씬 근무조건이 좋은 것 같아요. 거기는 보험회사라서 자료를 몇백 개씩 주면 내가 계속 전화를 돌려 할당량을 채워야 했거든요. 그때는 세일즈를 하는 입장이었다면 지금은 나한테 고객이 도움을 요청하니까 제 성향에 잘 맞아서 지금이 나은 거예요.
그리고 저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람이에요. 워라밸이 안 지켜지면 이걸 오래 할 수 없어요. 지금 일이 한 달에 500만 원씩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급여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워요.
이젠 욕하면 전화 끊겠다고 당당히 얘기해요
여기 일하는 선생님들 다 마찬가지일 텐데 성적인 욕설부터 여성이라서 차별받는 게 엄청나요. 남자 선생님 한 명 있거든요. 근데 우리가 말할 때는 화내면서 욕하고 소리 지르고 무시하는 발언하면서 막하다가 남자가 받으면 얌전해져요. 콜센터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런 게 있어요. 유튜브 채널 같은 데서 ‘콜센터 일하는 사람들의 이미지 - 담배를 다 필 것 같다’ 이런 게 있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카드회사나 보험회사 콜센터에서 흡연구역을 따로 만들어준대요. 스트레스를 워낙 많이 받으니까.
여자여서, 특히나 보이지 않는다고 막 대하죠. 우리가 약자는 아니지만 본인들이 생각했을 때 ‘나는 손님이고 너보다 위’라는 생각이 있어서 무시하거나 욕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근데 옛날보다는 우리 여자 선생님들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전엔 그런 거 들으면 울거나 듣고만 있었는데 요즘은 욕하면 전화 끊겠다고 당당하게 얘기해요. 전화하는 사람들이 좀 그런 게 있어요. 여자한테는 막 대하고 남자가 받으면 안 그러죠. 특히나 어르신들, 그리고 40대 남자들이 그렇죠.
저희도 일상에서 핸드폰 콜센터 등에 전화할 일이 생기면 사정 아니까 고생 많으시네요 하면서 엄청 친절하게 대하죠. 그런데 직업병이 무서운 게, 상대방이 좀 재수 없다 싶으면 나도 좀 꼬장꼬장하게 되는 거예요. 속으로 ‘저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직업병이 양날의 칼 같달까.
여기가 여자들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진상 손님 만나 쌍욕 먹어서 내가 울면 ‘그만 울고 빨리 전화 받아’ 이렇게 말하는 건 못 봤어요. 그냥 ‘나가서 좀 추스르고 와’ 그러고 관리자들도 잘해주는 것 같아요. 애가 아파서 못 나온다든지, 내가 갑자기 아프다든지 할 때도 다들 편의를 잘 봐주는 편이에요. 아무래도 여자들 집단이라 오히려 이해가 더 쉽게 되니까요. 여자가 근무하기에는 괜찮은 환경인 것 같아요. 더군다나 병원 정직원이 되면서 가족 돌봄이라든지 이런 휴가가 많이 생겨서 팀장님들도 더 손쉽게 쓰게끔 해주신다든지 그런 게 괜찮은 것 같아요.
아 참, 저 원주 갔었어요. 건강보험 고객센터 결의대회요. 거긴 정규직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심하더라구요. 근데 저희 파업할 때 저희 되게 복 받았다 그랬어요. 정규직이 도와주는 파업 별로 없는데 우린 참 감사하다 했죠. 노조 지부에서 기존에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교육을 잘했으니까 정규직 선생님들이 그렇게 한 것 같기도 하고. 정규직, 비정규직을 갈라서 처음부터 채용한 게 문제이긴 한데 그게 IMF 이후로 생긴 거잖아요.
여자라서 안 되는 것도, 여자라서 못할 것도 없다
노조활동, 특히 대의원은 진짜 멋모르고 시작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유튜브 되게 많이 찾아보고 그래서 그거 봤었어요, 고속도로 톨게이트 투쟁! 충격적이었던 게 본사 로비 점거농성할 때 다 옷 벗고 브래지어만 하고 있었잖아요. 내가 진짜 우리 선생님들 웃으라고, ‘우리 다 옷 벗을 거 생각하시고 브래지어 이쁜 거 입고 오세요’ 얘기했었어요. 어떻게 보면 여자라는 게 단점이면서도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근데 그게 좀 안 좋은 무기이긴 해요. 성추행할 수 있으니까 못 만지게 하려고 하는 그런 거잖아요. 어쨌든 여자라서 안 된다는 생각은 안 해봤고 여자라서 못할 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제가 원래 간부가 아니었거든요. 다른 대의원이 집안 사정으로 갑자기 사퇴하셔서 제가 하게 됐어요. 남편은 노동절에 서울역 집회에도 같이 갔을 정도로 많이 트여 있는 사람이에요. 파업하고 노숙할 때도 지지해 주고, 병원장 욕도 같이 하고. 만약 남편이 이런 걸 한다고 하면 저는 응원은 해주되 불법적인 일은 하지 말고 다치지만 말라고 말해 줄 것 같아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안 하면 내 동생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고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가 이걸 당할 수 있다, 내가 당장 이걸 한다고 해서 알아봐주고 뭔가 효과가 나타나진 않지만 누군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그냥 하는 김에 열심히 해야겠다 싶었어요. 전 재밌었어요. 그래서 파업 끝나고 한동안 일하는 게 되게 재미없었어요. (웃음) 비정규직 정규직화 이루고 나서 허탈한 기분이랄까, 열정을 다해서 진짜 날마다 열심히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작년에 임단협 잘 안될 때도 파업한다고 해서 ‘우리 선생님들, 팬티 한 장씩 꼭 가방에 넣고 다니시라’고 얘기하고 이랬거든요.
저는 나중에 아기 낳으면 노동조합 관련된 교육은 보내고 싶어요. 해외처럼 미리 어렸을 때 그래야지 내가 뭔가 했을 때 우리 엄마가 이상한 걸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할 테니까. 또 본인이 당했을 때도 그런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여자라는 것에 갇히지 말자,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니까
저는 사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막 투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오래되신 분들, 10년 넘게 일한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거나 행동하기가 되게 어렵거든요. 10년 넘게 일하신 분이 걱정을 하시는 거예요. 될까, 진짜 될까 의심을 하고. 어쨌든 본인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팀장님,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다, 정규직의 마음으로 사시라’고 그랬는데 다행히 정규직화 됐죠. 근데 정규직 되고 나서도 임단협 해야 하고 급여에 만족을 못 하니까 계속 투쟁해야 해요, 어차피.
남자, 여자 떠나서 운전하다가 싸움이 나도 내가 여자여도 목소리 크면 이기거든요. 내가 여자라는, 여자가 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남들한테도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예 그런 생각하지 말고 나를 그냥 인간인 나로서 인정하고 내가 굳이 여자다 이런 것에 국한되지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니까,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잖아요.
특히나 젊은 친구들한테 해주고 싶은 말, 노동자들의 투쟁을 본인 일 아니라고 무관심하지 말고 언제든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십시일반이라고 다 같이 똑같은 생각 가지고 움직이면 바뀔 수도 있으니까 관심을 많이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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