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론 – 탈성장론의 한계와 사회주의 운동의 기후위기 대응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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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 30일 <가자! 노동해방> 온라인신문에 게재됐던 ‘탈성장, 사회주의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담론일까?’ 기사의 보론이다.
이 기사에 대한 반응 중 하나는, ‘고도화된 생산력에 바탕을 둔 경제적 풍요가 생태환경에 대한 무지막지한 파괴를 초래하고 있는데, 사회주의자가 어떻게 탈성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냐’는 비판이었다. 노동자 통제란 단순히 생산력 관리의 주체가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는 다른 가치관과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는 정당한 지적과 함께 말이다.
이 비판에 대한 답변을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이윤 획득을 위한 무분별한 생산력 발전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태환경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생산력 발전, 나아가 모든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일소하고 인간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산력 발전은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 토대를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의 변증법적 성격을 인식하는 가운데서 찾는다. 따라서 이 점을 좀 더 파헤쳐보기로 하자. 자본주의적 생산력의 변증법적 성격은, 다시 표현해보자면 현재 산업 분야 중에서 탈성장(나아가 생산 폐지)이 시급한 부문과, 반대로 급속하고 비약적인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동시에 공존한다는 것으로도 표현해 볼 수 있다.
탈성장이 즉시 시작돼야 하는 부문
올여름 유럽과 미국의 기록적 폭염은 탄소배출량의 획기적인 감축이 얼마나 긴급하게 요구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긴박한 시점에도, 이윤생산체제인 자본주의가 얼마나 불필요하게 자원을 낭비하며 지구의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우리는 수십 수백 가지의 실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2021년 중반까지 가상화폐 투기 광풍이 불었을 때, 가상화폐 채굴을 위한 전력 사용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2021년 5월 영국 케임브리지대 대안금융센터는 비트코인 채굴을 위한 전력소비량이 매년 149TWh(테라와트시)라고 추정했다. 말레이시아(147TWh), 스웨덴(131TWh), 아르헨티나(125TWh) 등의 연간 전력소비량을 앞지르는 규모다. 기후위기의 시대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가상화폐 채굴을 위해 얼마나 많은 화석연료가 태워졌을지, 이로써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으로 추가 배출됐을지를 생각해보면 황당할 지경이다.
일상에서 좀 더 소소한 실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판매돼야만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상품은 “목숨을 건 도약”을 위해 과대포장을 마다하지 않는다. 어린이 장난감, 화장품 등의 과대포장은 아주 오래된 얘기다. 상품에 불필요하게 포함된 포장재는 거대한 쓰레기더미가 되고, 해양생태계를 파괴하는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인류를 위협 중이다. 한 가지만 더 지적해보자. 한국의 이동통신 3사는 경쟁사로부터 회원을 빼앗아 오기 위해 해마다 8조 원 안팎의 마케팅 비용을 지출한다. 자사의 이윤을 늘리기 위해서는 ‘투자’해야 하는 비용이겠지만,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는 역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낭비다.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위한 체제에서는 이처럼 불필요한 자원 낭비가 필연적인데, 자본가들은 자본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으로 맹목적으로 돌진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사용가치와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와 그 증식이 자본가의 추진력 동기가 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한 기업에 투하되는 자본을 끊임없이 증대시키고, 또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갖가지 내재적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경쟁은 자본가에게,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끊임없이 증대시키도록 강제하고, 그는 오로지 누진적인 축적을 통해서만 자본을 증대시킬 수 있다.”(<자본1>)
기후재앙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생산 부문의 탈성장, 아니 즉각적인 폐지를 요구한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력 논리에도 결단코 반대한다. 그것은 인간을 생산력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무분별한 생산력제일주의자들이 아니다. 예컨대 어느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면, 사회주의자라면 응당 위험 요인 파악과 노동자의 안전 확보를 위한 조치를 우선 요구할 것이다. 자본가들이 덮어놓고 신속한 생산 재개를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급속하고 비약적인 성장이 필요한 부문
반면 탈성장 대신 집중적인 자원 투입을 통해 시급히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부문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재생에너지 부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석연료 연소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중지시키자면,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대책 없이 확대되는 원전 건설을 막자면, 재생에너지 부문의 기술 개발과 생산성 향상이 필수적이다. 특히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극복하기 위한 에너지저장장치, 수전해 그린수소 생산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요구된다.
또한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이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분할을 통해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강요하고 있는 열악한 직종이 있다. 예컨대 수천만 명이 배설하는 분뇨와 음식물쓰레기를 매일 처리하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또 고압송전탑 배선 노동자들처럼 일상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도 있다. 이들의 노동을 좀 더 손쉬운 것으로, 좀 더 안전하고 위생적인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기계화, 로봇화 등을 통한 노동생산성 발전이 필수적이다.
인간을 고통스러운 질병, 감염병 등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보건의료기술의 발전도 당연히 필요하다. 전 세계에서 희귀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숫자는 약 3억 명에 이르며, 이 중 50%가 어린이이다. 희귀병, 난치병 환자를 위한 치료제, 백신 개발을 위해 좀 더 많은 사회적 역량을 투여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대규모 기계제 생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탈성장론자들이 주목하는 돌봄노동의 영역에서도 사회적 생산력 발전은 꼭 필요하다. 갓난아기의 천 기저귀를 종일 빨아대야 하는 돌봄노동과 친환경 생분해 일회용 기저귀를 사용하는 돌봄노동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없다. 가사노동, 돌봄노동의 사회화를 위한 생산성 향상의 필요성 역시 다양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탈성장론자들도 동의하고 있듯이, 저개발국가에서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의 발전이 필요하다. 2020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20억 명이 안전한 식수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으며, 세계 인구의 절반인 36억 명은 안전한 위생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인구 중 4억9,400만 명이 여전히 노상 배변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당연히 성장과 발전이 필요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영역들에서의 급속한 성장이란, 생태환경의 파괴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생태환경의 지속적인 공존을 가능케 하는 형태로 취해져야 할 것이다. 인간과 생태환경 사이의 건강한 물질대사가 회복될 때만 생산력의 지속적인 균형 발전 또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성장이 필요한 부문을 어떻게 조정, 통제할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간단하게만 살펴봐도 기후위기의 시대에(또한 향후 인류가 살아가야 할 미래 시대에),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성장’이 필요한 부문이 공존하고 교차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기후위기의 시대에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과 성장이 필요한 부문을 구분하는 작업은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감축한다는 방향 아래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부문을 어떻게 조정하고 통제할 것인가?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에서 비효율적으로 낭비되는 노동과 자원을, 꼭 성장이 필요한 부문으로 급속히 전용(轉用)해 인간 해방의 토대를 앞당기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탈성장론자들은 이 점에 대해 답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 탈성장이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시민협동조합과 지역 공동체에서의 소규모 나눔과 연대를 통해 일정 정도 탈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급속한 성장, 즉 노동생산성의 향상이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 탈성장론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 전제 아래에서만 노동의 분할과 결합이 조직될 수 있으며, 생산수단을 대량집적에 의해 절약할 수 있고, 또 그 소재적 성격 때문에 공동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노동수단(예를 들어 기계 시스템 등)이 생겨날 수 있으며, 나아가 거대한 자연력을 생산에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과정을 과학의 기술적 응용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 (<자본1>)
이처럼 사회주의자들은 탈성장론자들과 달리, 근본적으로는 자본의 이윤 생산을 위한 것일지라도 자본주의가 사회적 집단노동의 조직을 통해 진정한 생산력 발전의 주‧객관적 토대를 형성해놓은 것을 주목한다. 자본가는 인류와 생태환경을 위한 진정한 생산력 발전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가치증식의 광신자”일 뿐이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개인의 완전하고 자유로운 발전을 근본원리로 하는 더욱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기초가 될 수 있는 물적 생산조건”을 창조하는 것이다(<자본1>).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주체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다. 자본주의 생산과정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사회적 역량을 축적해 나간다. 자본 간 경쟁의 결과인 자본의 집중‧집적으로, 분산돼 있던 노동자들은 서로 연결되고, 공동의 규율을 확립하며, 자본의 이윤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을 보유하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바로 이 노동자계급이 일련의 계급투쟁 과정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민주적 노동자권력을 수립하면, 비로소 사회 모순의 진정한 해결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노동자권력은 자본주의가 닦아놓은 생산력 토대 위에서, 인간과 생태환경의 공존과 지속을 위해 꼭 필요한 생산 부문에는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할 것이며, 단지 자본의 이윤 증식을 위할 뿐이었고 생태환경을 파괴했을 뿐인 생산 부문은 즉각 폐지할 것이다. 즉 중앙집중적인 노동자 생산통제를 통해 기후재앙에 대응해 나갈 것이다.
노동자권력은 이런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자권력이 기후위기 해결을 비롯해 사회의 갖가지 모순과 차별을 해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권력이 그 자체로 지난한 계급투쟁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거쳐 달성된 성취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노동자권력, 성차별‧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노동자권력을 상상하기 어렵듯, 생태환경의 파괴를 무릅쓰더라도 생산력 발전만 앞세우는 노동자권력 역시 상상하기 어렵다. 노동자권력이란 노동자계급이 자본의 각종 억압 이데올로기를 깨뜨리고 전 계급적 단결과 변혁적 전망을 쟁취했을 때만 비로소 도달 가능한 대단히 높은 단계의 역사적 성취인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전망으로 진군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자들은 일상적 시기에 생태환경 보존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자본의 이윤을 위한 생산 체제의 야만성을 쉼 없이 폭로해야 한다. 특히 스타하노프 운동으로 상징되는 구소련 등의 생산력제일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점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스탈린주의는 후진 농업국가에서 자본의 시초 축적을 위해 노동자를 가혹하게 착취했던 체제에 불과했다.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는 민주적‧계획적‧생태적 생산력 발전 및 노동생산성 향상을 통해 전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안전한 노동조건을 확보해나갈 것이다. 이로써 인간이 생산력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이 인간에 복무하도록 만들 것이며, 생태환경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실현해 나갈 것이다.
한편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북반구(글로벌 노스) 선진국 시민들의 에너지 낭비와 과잉소비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개인적 차원의 실천으로는 결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말이다.) 모든 성차별을 뛰어넘은 계급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노동자운동 내에 잔존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처럼, 선진국의 과잉소비 비판을 통해서 생태환경 보존의 문제의식을 전체 노동자계급에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탈성장 담론으로는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을 조직하기 어렵다
사이토 고헤이는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억제 없는 소비에 사람들을 몰아세우는 ‘자본의 전제’ 아래에서는 자기 억제의 자유를 선택하기가 어렵”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 억제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탈성자론자들의 ‘착한 소비’ 논리다. 무분별한 과잉소비가 지구의 생태환경에 부담을 주니 소비를 절제하자는 것인데,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 즉 생산관계에서 벌어지는 노동 착취를 통한 이윤 생산을 건드리지 않는 행위가 어떻게 ‘혁명적 행위’인지는 차치하기로 하자.
문제는 이런 실천 전략이 소위 먹고살 만한 중간계급에서나 통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더 많은 이윤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대자본이 대공업적 방식으로 저렴하게 대량생산품을 공급하는 인터넷 쇼핑몰 대신, 지역협동조합에서 품앗이 협업으로 자체 생산한 가내수공업품을 이용할 수 있는 계층은 극히 드물다. 우선 시간이 넘쳐나야 할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 하루하루가 피곤한 대다수 노동자계급의 냉소만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또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성장 담론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감축하려는 자본가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오용될 가능성도 높다. 예컨대 자본가정부가 전력 수요를 줄여 지구를 구하자면서 전기요금을 대폭 인상하자고 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탈성장론은 노동자계급 생활에 대한 긴축 요구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이다.
거대한 혁명적 잠재력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조직하자면 탈성장론 대신 민주적‧계획적‧생태적 생산력 통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정의로운 전환’을 위해 노동자계급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 즉 자본의 이윤 생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게 만들자면, 노동자의 고용이나 생활조건에 대한 일체의 공격에 단호히 맞서면서 동시에 생태환경의 적극적 보호에 나서자고 주장해야 한다.
사회주의 운동의 기후위기 대응 전략
자본주의 산업화 이후 불과 100여 년 만에 지구 평균기온이 벌써 1.09℃나 오른 지금, 그나마 1.5℃ 이내로 기온 상승 폭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실천이 긴급하게 조직돼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는 기후위기 운동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활용한 ‘무기의 비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자본주의 지향을 분명히 하더라도, 노동자투쟁과의 연결이라는 물질적 수단이 없으면 기후정의 운동이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만약 노동자계급이 자신이 가진 고유의 투쟁 방식, 예컨대 총파업으로 기후위기의 주범인 자본의 이윤 생산을 중단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나아가 노동자들이 기후위기 대응의 핵심적 부문에서 자주관리 등 직접적 생산통제에 나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자본가들의 무능과 기생성이 여지없이 폭로되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아니라 생산의 주역인 노동자들이,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사회를 직접 운영해 나갈 수 있다는 혁명적 전망이 싹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전망을 향해 일상적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특히 노동자계급이 협소한 조합주의적 운동에 머무르는 대신, 전체 인류에 대한 책임감을 발휘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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