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I <능력주의와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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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첫머리에서부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백만 명이 광화문에 모였다. 발언자는 자신을 ‘예비교사’라고 소개했다. “정유라처럼 대통령 친구 딸이라고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면, 제가 어떻게 학생들에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고 성공할 수 있으니 노력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 발언은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아니, 제발 좀 그렇게 가르치지 말라고!”
그 자리에서 아무 비판의식 없이 환호를 보내며 박수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입시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믿음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얼마 전 정경심 교수 재판에서 자녀 입시비리 유죄에 대한 판결문의 일부다. 재판부는 평등과 정의에 일조한 역사적인 판결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재판부만이 아니라 시험의 공정성을 신봉하는 많은 이들 또한 그럴지도. 과연 그런가?
책 <능력주의와 불평등>은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여성, 노동, 교육, 청소년, 의사 등 분야별 활동가와 정치학자, 사회비평가 등의 저자는, 능력주의란 무엇인지, 능력주의를 양산하는 시험과 학교 교육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능력주의가 왜 문제인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나간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던져라?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시험이나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면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이는 바람직하고 공정하다는 논리, 능력주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영어유치원, 각종 학원을 다니면서 어릴 적부터 능력주의를 교육받고 내면화하기 시작한다. ‘헌법 제31조 제1항.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능력주의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능력에 따른 교육이란 능력을 이유로 사회불평등을 온존시키는 장치가 되기 십상이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그럴 듯한 말은 신성불가침한 무엇이 되어 다들 스펙 쌓기와 경쟁에서 이기기에 혈안이 되고 일평생 시험과 평가, 등급 매기기의 노예, 희생양이 되어 살아간다.
국가고시에 어렵게 합격해 공무원이 된 정규직들은,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비정규직에게 ‘시험 쳐서 들어와라’, ‘무임승차는 안 된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기적인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차별의식과 반노동자성을 당당히 밝힌다. 건강보험 고객센터 투쟁에서 이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의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공공병원 확충과 의대정원 확대에 결사반대하고 과감히 진료거부를 하며 환자와 국민 전체를 상대로 협박해 ‘승리’를 쟁취했다. 이들은 어떤 모순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 사회가, 이 체제가 그렇게 교육해왔고 능력주의, 평가와 시험을 통한 서열화를 당연하고 공정한 것으로 취급해왔고 찬양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누린 특혜와 안정적인 일자리, 출세의 비결은 바로 이 체제의 통치이데올로기에 철저히 순응하고 이를 체화하여 뼈를 깎는 노력과 고난을 거쳐 지금의 성취를 이룬 데 있다. 그래서 저들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먼저 돌을 던져라!” 당당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가권력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은 설령 불평등을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더 노력한 사람에게 더 보상하는 공정한 자원 배분이라고 용인하게 만든다.” 문득 무서워졌다. 이렇듯 폭력적이고 부당한 차별과 불평등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것이라며 우리의 머리를 지배하고 눈을 가리는 평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채 살아온 나는, 우리는 어쩌면 저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마치 모든 개인이 공정한 출발선에서 능력을 다투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양 하는 능력주의는 허구다.” 자격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회 전체가 능력주의에 사로잡혀 있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는 이성마저 흐릿해져버린 게 현실이다.
“평등과 공정함 두 가지가 충돌할 경우 사람들은 불공정한 평등보다는 공정한 불평등을 선택하게 된다.” 자주 등장하는 공정성 논리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될지도 모른다. 실로 무서운 일이다.
“과거와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평가의 ‘전 사회화’와 평가 자체의 ‘권력화’다.” 그래서 이 “평가권력은 사회의 모든 것을 평가한다.” 게다가 이것이 노동의 영역으로 파고들어 성과급제, 직무급제,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노동자를 계층으로 나누고 쪼개 단결과 연대보다는 개인의 안정과 출세를 위해 경쟁과 개별화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자본가와 지배계급은 노동자투쟁의 위력을, 민주노조의 힘을 쪼그라뜨려 통치와 착취를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권리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대입 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운동을 하는 동지들을 향해 “서울대라도 합격하고 나서 거부한다면 인정해 주겠다, 공부 못하는 주제에 거부하는 건 패배자의 자기변명 아니냐”라며, 체제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목소리를 낼만한 자격(능력)이 있는가 묻는다며 청소년운동 활동가 공현은 꼬집는다. “권리가 왜 자격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을까? 본래 권리는 다수성을 전제로 한다.” 능력주의 신봉자들은 권리, 존엄을 주장하려면 시험과 평가를 통과하라고, 그래야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모든 것에서 시험을 절대기준으로, 점수와 등급을 무기로 삼으려 든다.
능력 있는 전문가가 국가를 통치하고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다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에 정면도전하기 위해서는 시험과 평가를 거부하는 청소년과 교육노동자, 때마다 공정성 논란의 도마에 오르는,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 직무급제를 강요받는 노동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 투쟁의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왜 저들의 능력주의와 공정성 주장이 비겁한 체제옹호 논리이자 불평등한 체제 정당화의 가림막인지 낱낱이 까발릴 필요가 있다.
권리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우리에게 자격과 능력을 들이미는 자들에게 되묻자. 진정 이 사회를 떠받치는 힘은 시험, 평가를 거쳐 획득한 점수화된 능력이 아니라 노동의 힘, 생산의 힘이다. 이에 기생하며 이윤을 독식하고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일삼고 자기계급의 이해득실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지배계급의 자격 없음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지를.
‘이상적인’ 능력주의
능력주의, 공정성 논의에서 무엇보다 문제는, 그것을 비판하는 부류에서조차 ‘제대로 된’ 능력주의, 능력주의의 완벽한 적용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도 간혹 능력주의의 ‘오작동’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질 때가 있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가장 이상적인 능력주의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에 가장 큰 위협일 수 있다.” “능력주의는 합리성을 가장한 차별이며 권리의 훼손임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능력주의에 휩쓸린다면 투쟁하는 노동자민중은 길을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능력주의에 ‘진정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게 될 만한 저간의 사정이 있다. 능력주의와 공정성을 그토록 떠벌리는 지배계급이 실상은 능력에 따른 공정함 대신 인맥, 학연, 지연 등의 온갖 불공정한 요인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우리는 너무도 흔히 목격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민주주의일 뿐이듯 능력주의 또한 자기모순을 지닌 허구에 지나지 않기에, 정의를 바라고 능력주의의 원리를 따라 신분상승이나 인생역전을 꿈꾸는 이들은 이상적인 능력주의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진보주의자들은 이런 성과급 제도를 연공서열과 경력 우대를 철폐해서 능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좋은 제도로 보기도 했다. 능력주의가 권위주의와 나이주의를 타파할 수 있다는 논리”인 것이다.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그것의 허구성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지배체제가 바라는 바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 다니게 될 위험이 있다. “가장 이상적인 능력주의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에 가장 큰 위협일 수 있다”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능력주의는 인종주의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종주의는 자기들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는 인간집단의 수만큼 있게 된다. 지적 인종주의는 가장 교묘하여 가장 알아차리기 어려운 인종주의”라고 했다. 바로 “지배 세력이 우월한 학업성적 그리고 학위와 자격증으로 입증된 지적 우수성을 과거의 특권이나 귀족 타이틀처럼 내세워 자기들이 차지한 지배적인 위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곧 인종주의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지난한 과정은 ‘예외적인 차별은 인정하자’는 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들과의 끊임없는 싸움의 과정이다.
공정성을 부르짖으며 실제로는 각종 차별과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가 특권층이 되기를 꿈꾸거나 특권을 지닌 것을, 소수자나 약자,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연대하는 대신 선을 긋고 등 돌리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엄청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자본가계급에는 분노하지 않으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 요구에 불공정을 들이밀며 날카롭게 반응하는 일부 정규직들. 시험과 평가, 경쟁과 서열화를 만고불변의 진리이자 원칙으로 떠받드는 능력주의 전도사들. 이들을 한심한 개인, 이기적인 집단으로 치부하고 말 문제가 아니다. 배후는 따로 있다.
“경쟁에 뛰어드는 순간, 누가 이 경쟁을 만들었는지는 잊게 되고 서로에 대해 적대적으로 된다.” 능력주의는 지배계급의 효과 만점의 통치기술이자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아왔고 더욱 치밀하게 작동하며 민주노조운동과 노동계급의 단결과 연대를 깨뜨리려 들 것이다. 자본의 기만과 착취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노동자계급과 사회운동세력이 단결과 연대를 실천하고 공동체의식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주저한다면 자본이 쳐 놓은 능력주의의 덫을 넘어서기 어렵지 않을까.
“능력주의의 문제를 대학(입시)의 문제, 청년세대의 문제, 또는 그 세대의 노동시장 진입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젠더와 인종, 비장애 중심주의의 문제, 노동의 가치와 위계의 문제로 이야기하고, 국가, 시장, 기업은 이 구조에서 어떤 역할로 존재하는지 물어야만, 능력주의의 체제성을 고려한 관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뒤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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