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선거권을 둘러싼 저들의 계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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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공직선거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만 18세부터 선거권을 얻게 됐다. 보수 성향의 한국교총은 강하게 반발하며 학교에서 선거운동이나 정치활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한국당 역시 ‘교실의 정치화’를 막아야 한다고 강변했다.
반면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선거권 연령 하향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까지 민주시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얼핏 보면 자유한국당은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반동세력이고, 민주당은 시대 변화에 발맞춰 나아가는 진보적인 세력인 것처럼 비친다.
물론 청소년의 미성숙 운운하며 선거권 연령 하향에 반발하는 보수우익의 주장은 거들떠볼 가치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곧 민주당의 ‘진보성’을, 따라서 민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할 이유를 보여주는 것일까?
민주당의 생색내기
최근까지 OECD 회원국 중 오직 한국만 유일하게 만 19세 선거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 187개국 중 144개국이 이미 18세 선거권을 보장했다. 독일, 미국, 영국,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브라질 등 일부 나라에선 16세부터 전국 또는 지방 차원에서 선거권이 보장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함께 보장되면서 18세에 시장(2005년 미국 미시간주 힐스데일카운티 시장)이나 국회의원(2002년 독일연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사례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공직선거법 개정에 포함된 선거권 연령 하향은 ‘하향’이라기보다 ‘정상화’에 가깝다. 즉 민주당은 당연히 추진해야 마땅한 조치를 추진하면서 정치적으로 생색을 낼 수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적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 청소년들은 흔히 자유한국당 같은 보수우익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같은 뼈아픈 사회적 경험과 더불어, 학교에서 기본적인 민주주의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보수우익의 반동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우익들은 한국의 교육이 ‘좌편향’이라고 열을 내며, 자연스럽게 선거권 연령 하향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에 불리할 거라고 계산하게 된다. 반대로 민주당은 그와 같은 젊은 세대의 의식의 흐름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거나 적어도 불리하지는 않을 거라고 계산할 것이다. 더 나아가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까지 민주시민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꽤 자신만만한 태도를 취하기까지 한다.
민주시민 교육?
이런 태도는 노골적으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려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보다는 좀 더 합리적이고 세련돼 보인다. 하지만 아직 질문이 남아 있다. 그들이 추진하겠다는 ‘민주시민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진 않다. 세월호 참사나 최순실 게이트 같은 사건들을 겪으며 우리는 보수우익이 지키고 대표하려는 가치가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배울 수 있었다. 현실이라는 교과서가 그것을 가르쳐줬다. 민주당이 지키고 대표하려는 가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현실이라는 교과서를 참조할 수 있다. 문재인 집권기 절반을 지나는 동안 그들의 말과 행동을 비교하며 실체를 검증할 수 있는 근거가 많이 쌓였다.
단적으로 지난 2년 반은 문재인 정권이 내건 노동존중 구호의 실체를 역겨운 방식으로 입증해온 과정이었다. 고통스런 비정규직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정당한 열망을 자회사 채용이라는 기만적인 꼼수로 돌려막고, 이를 거부하는 노동자 1,500명이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되도록 방조했으며, 이런 사태를 초래하고 가족 일감 몰아주기 의혹까지 받고 있는 도로공사 사장 이강래를 내내 감싸고 돌다가, 마침내 총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순탄하게 사직 처리까지 해준 게 문재인 정권이다.
저들은 이 모든 일이 ‘자본주의라는 룰’에 비춰볼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변호할 것이다. 그런 자들이 내뱉는 ‘민주시민 교육’이라니, 시작도 하기 전에 악취가 풍기지 않는가.
자유한국당이 자신의 특권과 이익을 저울질하며 청소년 선거권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처럼, 민주당 정권도 어느 순간에나 자신의 특권과 이익을 저울질할 뿐이다. 그리고 그 특권과 이익은 자본주의라는 계급제도를 정당화하고 유지, 강화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민주당이 거론하는 이른바 민주시민 교육도 결국에는 자본주의 계급제도의 틀 안에서 이뤄질 것이고, 바로 그 계급제도를 정당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다.(관련기사 보기)
계급투쟁이라는 교육
그래서 우리는 만 18세 선거권 보장을 무조건 찬성하고 환영해야 하지만, 청소년들이 선거권을 의미 있게 누릴 수 있기 위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어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학교에서 올바른 ‘민주시민 교육’이 이뤄지게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압력과 개입이 필요하다.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그런 사회적, 정치적 압력이 어느 정도 조성됐다. 그 압력 때문에 박근혜 후임 정부는 노동존중 같은 그럴싸한 구호를 내걸어야 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더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결과 당시 조성된 사회적, 정치적 압력은 자본가정당들 간의 공방과 탄핵이라는 법률적 절차로 해소돼 버렸다. 이런 조건에서 이뤄질 민주당 정권의 ‘민주시민 교육’이란 결국 노동자계급의 목소리를 배제하거나 노동자계급을 시혜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청소년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열려야 한다. 민주당이나 자유한국당 같은 자본주의 옹호 세력이나 그 2중대들 가운데 누군가를 고르는 것으로 그 선택지가 제한돼선 안 된다. 그러려면 노동자들부터 민주당 같은 자본가정당들과 단절하고,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사회 전체에 공공연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란 아주 먼 미래의 과제이거나 불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노동자들이 자본가정당들에 종속되지 않고 한 사회를 뒤흔드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은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 벌어진 대중반란에서(관련기사 보기), 뿐만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 열강에 속한 프랑스에서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파업투쟁에서(관련기사 보기) 하나의 사실로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의 밑바탕에는, 지배계급이 법적으로 허용하는 ‘질서’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대담한 투쟁 정신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전개되는 투쟁은 노동자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투쟁에 주목하거나 직접 참여하는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사회집단에게 가장 강력한 사회적 교육의 공간이 될 것이다.
이번 만 18세 선거권 보장이 이뤄지기까지 많은 청소년 단체들의 지난한 노력과 투쟁이 있었다. 이제 노동자운동이 어떻게 이들의 투쟁에 응답할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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