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 혁명에서 자본주의 복고까지: 중국공산당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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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는 중국혁명이 소부르주아 세력이 주도한 반제반봉건 혁명으로서, 세계사적 한계 속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귀결됐으며, 오늘날의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 국가라고 보고 있다. 그 점에서 중국을 기형적 노동자국가였다가 자본주의 복고가 일어난 것으로 보는 이 글의 전제와는 입장 차이가 있지만, 중국혁명을 이해하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토론을 활성화하기 위한 자료로서 아래 기사를 번역해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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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Revolution to Capitalist Restoration: 100 Years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수 미(Sou Mi), 2021년 8월 5일
7월은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었다. 1921년 7월 23일, 50명의 당원을 대변하는 7개 지역 12명의 대표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은, 백 년이 지난 지금 9,500만 명의 당원을 자랑하고 있다. 봉건제와 제국주의에 맞선 중국 고유의 투쟁 과정에서 설립된 중국공산당의 등장은 민족혁명 투쟁에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이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천두슈(陳獨秀) 같은 젊은 혁명가들은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의 노동자계급이 억압적 차르 체제와 자본주의를 어떻게 타도하는지 목격했고, 그 교훈을 급진화한 민중의 길을 찾는 데 사용했다. 중국공산당의 이런 혁명적 기원은,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싸우면서 중국을 지배 중인 일당 관료체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7월의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은 “오직 중국 특색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는 전혀 사회주의가 아니다. 중국의 발전은 시장 질서의 도입과 중국 경제의 자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그것은 다국적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중국의 값싼 노동력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이용하는 자본주의 복고를 위해 혁명의 성과를 유실시킨 과정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며, 세계 최대의 산업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또한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미국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중국의 성장을 경제적, 군사적 수단으로 억누르려는 데 일치해 있다.
중국 자본주의의 진화는 1949년 혁명이 정복당한 것에 기반한다. 이 혁명은 제국주의를 패배시켰을 뿐만 아니라,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국가통일을 이룸으로써 중국이 백여 년 만에 다시 자주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현대 중국의 발전은 중국공산당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늘날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세기 중국공산당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차 당대회를 향한 길
중국공산당은 봉건제와 제국주의에서 해방되려는 중국의 오랜 투쟁 속에서 결성됐다. (중국공산당 결성으로부터) 불과 10년 전, 혁명의 전개는 청조(淸朝)의 지배를 끝내고 중화민국(1912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국가)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치적 지도력은 제국주의를 타도하는 데 무력했으며 여러 지역을 자신의 통치 아래 두는 데 실패해 결국 군사독재로 귀결됐다.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 국민당을 포함한 이 신생 공화국의 자본가 지도자들은, 평화를 중재하기 위해 영국, 일본 정부 모두와 외교 협정을 모색했다. 이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을 확증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뒤처진 나라들에서 민족 자본가는 민중의 민주주의 요구를 실현할 수 없고 제국주의의 하수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1차 세계대전 말의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중국 내 독일 점령지가 일본에 양도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졌다. 그 결과 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와 자국 정부의 허약한 대응에 저항한 1919년 5‧4운동이 일어났다.
반면 러시아의 볼셰비키당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와 차르 체제 모두를 타도하도록 이끄는 데 성공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됐는데, 특히 차르 체제가 중국 내에서 유지하던 특권을 볼셰비키 정부가 폐기한 후에 더욱 그랬다. 5‧4운동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러시아에서처럼 자본주의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하지 않고서는 봉건제와 제국주의를 패퇴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다.
그것은 트로츠키가 <연속혁명>에서 예견한 것과 같다. “후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 과업은 우리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직결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주의의 과업을 시대에 맞게 부여한다.” 민족 자본가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과업도 실현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민주주의의 과업은 오직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처럼, 민족해방을 향한 투쟁은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은 자국 자본가에 맞선 투쟁과 필수적으로 결합돼야 한다는 상식이 점차 커갔다.
이렇게 급성장한 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 천두슈와 리다자오(李大釗)가 있었는데, 이 둘은 신문화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신문화운동의 대변자였던 천두슈의 신문 <신청년(新靑年)>은 이제 급진화한 중국 민중 속에 마르크스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신문이 됐다.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시진핑은 혁명이 중국 국가 건설에 필수적이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의 창당은 사실 국제주의 이념에 기반해 있으며, 이는 전 세계에 사회주의 혁명을 확산시키려 했던 코민테른의 초창기 노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중국에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관심은 제3인터내셔널의 개입과 함께 자라났다. 제3인터내셔널은 상하이 혁명국을 설치했으며, 중국에서 당을 결성하기 위해 천두슈, 리다자오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과 접촉해 나갔다.
1921년 7월 23일, 50명의 당원을 대변한 12명의 대표는 첫 번째 당대회를 개최했다(중국공산당 1차 전국대표회의 - 옮긴이). 천두슈나 리다자오 모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천두슈는 그를 대신할 대표를 파견했다. 결의안에는 공산당을 코민테른의 지부로 설립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며, 또한 대회는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는 어떠한 동맹도 배제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투쟁을 결의하고 있었다.
인민전선과 스탈린주의의 배신
그 뒤 수십 년에 걸친 중국공산당의 타락이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었다. 다음 몇 년 간 중국공산당의 전개 과정은 스탈린주의적 배신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스탈린의 영향력에 점차 종속돼 가던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으면서, 중국공산당은 곧 자신의 창당 결의안에서 멀어져갔다.
1922년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과 반제국주의 연합전선을 건설했는데, 자본가 민족주의 정당과 반제국주의 투쟁을 함께 하더라도 자신의 조직과 깃발을 유지하고 고통당하는 대중을 끌어모으는 계급 독립성의 축을 세워나갔다. 그러나 고작 1년 후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에서 세력을 키워간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지시 아래 국민당 대열 속으로 용해됐다. 나아가 소위 통일전선(1차 국공합작 – 옮긴이)에서, 국민당 지도자 쑨원은 중국공산당이 자기 조직을 해산하고 국민당에 개별 당원으로 들어와 국민당의 사상과 규율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1923년 초 소련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토의됐을 때, 스탈린과 부하린(이들은 코민테른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국제조직에서 소련의 대외정책을 위한 도구로 빠르게 변형시키고 있었다)은 중국공산당의 해산을 압박하는 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국민당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1922년 결의안을 우스꽝스럽게 해석하며 그렇게 했다. 이 동의안에 대해 트로츠키만 유일한 반대표를 던졌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 항복에 맞서 투쟁했으며, 그렇게 하면 당의 계급적 독립성이 상실될 것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코민테른 규율의 위협 때문에 중앙위원회는 마지못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중국공산당 당원들은 코민테른 관료들에 비해 경험이 훨씬 적었지만, 훨씬 더 혁명적인 본능을 보여줬다.
코민테른 관료집단은 이제 스탈린과 부하린의 철권통치 아래 2단계 혁명 이론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주주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 자본가가 이끄는 부르주아혁명이 우선 이뤄져야 하고, 그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종속시켜야만 하며, 이어 미래의 언제쯤인가 사회주의 혁명이 뒤따른다는 이론이다. 코민테른 관료집단은 다가오는 혁명의 과정에서 국민당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 조직에 수년간 필수적인 군사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국민당을 강화시킨 반면 중국공산당 동지들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후 몇 년간은 이런 투쟁 양상으로 채워졌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기 위해 헌신한 반면, 코민테른은 중국 민중이 제국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 필요한 지도부라며 국민당을 지지했다. 1925년에서 1926년까지 점증하는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 공산주의자들은 외국인 소유 기업에서 광범위하게 조직된 노동자들을 파업으로 이끌었다.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을 공산주의자들이 이끌고 있었는데, 파업 물결이 거세지면서 노동자들의 힘과 계급의식이 강화됐다. 이것은 국민당의 헤게모니를 위협했다. 바로 이때 코민테른은 1926년 국민당을 명예회원 조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를 건설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것은 코민테른이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이념을 포기하고 스탈린과 부하린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에 젖어 들어간 것과 동시에 이뤄졌다. 그것은 당시 세계혁명의 패배, 특히 1919년과 1923년 독일혁명의 치명적 패배 앞에서, 사회주의자의 첫 번째 임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신생 소비에트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것이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자본가들과 놀랄 만한 동맹을 맺는 것을 뜻하더라도 말이다.
중국에서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성장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훨씬 규모가 큰 국민당과 동맹을 추구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파업 물결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국민당과 공산주의자 사이의 투쟁이 점점 더 논리적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되자,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을 떠나야 한다는 적극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더 많은 제한을 받게 될 때 이어질 일들을 대부분 예측하면서 말이다.
공산주의자들을 국민당의 요구와 규율에 복종시키면서 스탈린은 그들의 손을 묶었고, 1927년 2차 중국혁명의 치명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그 패배는 중국 사회주의의 발전 경로를 영구히 뒤바꾼 패배다.
1927년 4월 수천 명의 상하이 노동자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총파업을 벌이고 자주적인 조직체를 결성했다. 그때 국민당 장군이었던 장제스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해 노동자와 중국공산당 당원들에 대한 피의 학살을 명령했다. 백색테러 기간으로 알려진 그때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동조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전국 각지에서 쫓기고, 구금, 처형되거나 실종됐다.
당황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좀 더 모험적인 조치를 취하길 강요했는데, 이 모든 것은 국민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분쇄됐다. 근본적으로 이런 패배들이 중국공산당의 경로를 규정했으며, 중국공산당은 노동자계급 속에서 다시는 그와 같은 거대한 영향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
이렇게 된 뒤, 천두슈 같은 저명한 지도자들은 이 경험에서 반드시 끌어내야 할 결론을 도출했고, 그 해답을 찾아 트로츠키의 저작에 눈을 돌려 제4인터내셔널의 지부로서 중국 좌익반대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마오쩌둥에 합류했다. 마오쩌둥은 다가오는 혁명에서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이 이론은 중국공산당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걸쳐 세계 사회주의 운동 모두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마오쩌둥과 중국혁명
이어진 20여 년간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이 농촌을 향하게 했으며 농민 유격대로 홍군(紅軍)을 조직했고, 국민당과 제국주의에 맞선 오랜 투쟁을 시작했다. 마오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자 전위가 농촌으로 하방해 유격대를 조직하는 것을 돕도록 했다. 혁명의 주체 문제에 관한 이런 전환은 파급력이 큰 결과를 가져왔다. 왜냐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을 패배시킬 준비가 된 군사력을 건설하는 데 종속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당 관료주의로 대체됐는데, 이것은 여러 계급으로 구성된 농민군 속에서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기구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9년에 마오쩌둥의 홍군은 인민해방군이 됐고, 제국주의와 국민당 모두를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이어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승리의 맥락을 살피는 것이 필수적이다.
1927년의 사건 이후,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마오쩌둥은 본질적으로 스탈린과 동일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에게 다가오는 중국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맞서는 것이지, 자본주의에 맞서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주의를 향한 것은 더욱 아니고 말이다. 스탈린처럼 마오쩌둥 역시 과업이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혁명의 담당자는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에 기꺼이 참여할 뜻이 있는 민족 자본가와 지주들이기도 했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1946~1949년의 내전 이전까지 국민당과의 동맹을 모색하도록 했다.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몇 년 전 중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혁명 운동에서도 그랬다),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민족 자본가와의 기회주의적 동맹을 계속하려 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1937년에 소위 2차 국공합작으로 알려진 국민당과의 또 다른 인민전선을 형성한 것이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동맹의 군사전략은 노동자, 농민, 소부르주아, 그리고 특히 민족 자본가를 포함해 4계급 연합을 구성한다는 마오쩌둥의 이론을 반영했다. 마오쩌둥은 계급 간 동맹이 제국주의 침략을 분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민족 자본가들과 손잡고 반일 통일전선을 결성하면서, 마오쩌둥은 농민대중을 단결시켰던 토지개혁의 선동을 포기했다. 그것은 다수가 대지주인 국민당 장군들의 이익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라고 말했다. 즉 민족 자본가 및 오래된 봉건적 질서와의 ‘모순’(중국 민중에 대한 억압의 물질적 기반을 이룬다)은 부차적인 차원으로 밀려났다. 마오쩌둥은 당의 지도 아래 민족해방의 과제가 이들 계급을 원활하게 통합시킬 것이라 믿었지만, 자본주의적 관계가 계속되는 한 결국 정점에 치달을 계급 간 갈등이 해소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국민당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1947년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의 위협을 쓸어버리기로 결심하고 그들에 맞선 군사 행동을 시작하면서 강제로 이뤄졌다. 이 공격 행위는 마오쩌둥이 국민당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국민당을 패배시키고 신중국 건설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국민당과의 동맹이 깨지면서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통제 아래 있던 점령지뿐만 아니라 중국 영토 전체의 광범위한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이것은 농민대중 사이에서 거대한 운동을 촉발시켰다. 농민들은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고 재분배했다. 지주를 살해하고, 마오쩌둥에게 토지 몰수 및 재분배 강령을 시행할 것을 강제하면서 말이다.
이 강령은 제국주의 침략의 위협 아래 있던 1950년에 한층 더 확장됐다. 1950년 미국이 주도한 한국전쟁은 다시 한번 제국주의를 중국의 문턱으로 불러들였다. 1년 전 마오쩌둥의 승리로 대만으로 밀려난 민족 자본가들의 잔당은 미 제국주의에서 동맹세력을 찾았으며, 마오쩌둥을 물리치고 중국에서 그들의 이익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 동맹은 최종적으로 마오쩌둥에게 민족 자본가들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갖지 못하게 했으며, 중국 내 모든 사유 재산의 몰수와 사회화를 확장시키도록 했다.
마오쩌둥의 승리는 성공적으로 국민당과 그 자본주의 동맹세력을 몰아냈고 중국에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분쇄했다. 그러나 그 승리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에 정면으로 맞서는, 정치권력을 장악할 노동자계급을 준비시키지는 못했다.
중국혁명은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물리치는 데서 거대한 성과가 있었다. 중국혁명은 특히 제국주의 침략을 결정적으로 끝장냈다. 그 후 몇 년간 중국공산당은 혁명적 민중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민주적 요구를 실현하는 데서 중요한 전진을 이룩했고, 은행과 산업의 국유화를 포함한 사회화된 계획경제를 건설했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는 아니었다.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은 모든 정치적, 행정적 권력을 틀어쥐고 신중국의 미래를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모습으로 이끌었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했던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모델에 따라,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은 국내외 어디서도 노동자계급의 자기 조직화를 증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대신 중국공산당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점점 더 용인했다. 그 평화란 1956년 헝가리에서 그랬듯이 혁명의 과정을 분쇄하는 대가로, 혁명의 성과를 유실시키면서 얻어진 것이다. 또한 소련에서 그랬듯이 자본주의 복고를 향한 길을 닦으면서 말이다.
자본주의 복고를 향한 길
1949년 혁명 이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체제를 본뜬 관료체제를 만들었지만, 경제적으로 훨씬 더 후진적이고 고립된 나라에서 그래야 했다. 성장을 위해 중국공산당은 거대한 농업 분야로 눈길을 돌렸으며, 농민에게서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사들인 후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산업 성장을 위한 수익을 창출했다. 에스테반 메르칸탄테가 쓴 것처럼(관련 기사), 이어진 수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은 농촌의 집산화(集産化, collectivization)와 이중가격제를 통해 농촌의 잉여생산물을 추출하고 집중시켜 도시의 산업 성장을 위해 사용했다. 그 결과 집중화된 계획경제로 창출된 추진력이 정점에 이르는 1970년 중반까지 높은 성장률이 이어졌으며, 특히 덩샤오핑 체제에서 가속화된 자본주의 복고를 향한 길을 열었다.
오늘날 많은 좌파들은 중국의 퇴보에 대한 책임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덩샤오핑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씨앗은 이미 마오쩌둥의 체제에서 뿌려졌다. 농업에서 산업으로 잉여생산물이 돌려지면서 농업 생산의 감소가 발생했다.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관료들은 대약진운동을 시행했는데, 이 5개 년 경제계획은 토지의 집산화와 생산의 사회화에 맞춰진 것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과제에 사로잡힌 중국공산당은 이것을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에 따른 동기부여와 농민 대중과의 상호 협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료적 기구를 통해 혹독하게 강요했다. 이는 더 심한 식량 부족과 파괴적인 기근으로 이어졌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전국적으로 노동자와 농민뿐만 아니라 당 관료집단 안에서도 거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 반발은 마오쩌둥을 실각시키고 해당 조치를 번복함으로써 억제 가능했다. 이 긴장은 스탈린 사후 소련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은 1960년대 초 중소분쟁으로 더욱 고조됐다. 흐루쇼프가 스탈린과 그의 정책을 공개 비난하고 개혁의 시기를 시작한 이후,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당원들은 이런 변화에 반대했다. 1963년 중국공산당은 공개적으로 흐루쇼프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소련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중국은 사회·경제적 문제 악화에 맞닥뜨렸다.
냉전이 계속되는 와중에 중국공산당은 미 제국주의와 동맹을 맺어 중국에서 자본주의 복고의 토대를 마련했다. 1972년 마오쩌둥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첫 단계 중 하나였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국내에서 문화대혁명을 공격적으로 수행하는 동안 진행됐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마지막 잔재와 전통주의 요소를 제거하고 마오쩌둥 사상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강요하는 것을 목표로 한 거대한 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은 우익과 좌익 양쪽 모두에서 마오쩌둥의 반대자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를 동원했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수는 수십만 명에서 수천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런 식으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중국이 사회적, 경제적, 지정학적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본주의 동맹국들에게 구애를 하면서도, 동시에 국내에서는 대중을 무자비하게 징벌했던 것이다.
마오쩌둥 시대에 시작된 외국 자본과의 교류는 덩샤오핑 시대에 자연스런 결실을 맺었다. 1978년 마오쩌둥 사망 후에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의 자유화 경로를 여는 대대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것이 포함됐는데, 이는 마을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소유하던 토지를 개별 가정에 재분배하고 민간 기업의 확대를 위한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1989년 톈안먼항쟁은 이런 자본주의 복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으로 기록됐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과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이 이야기하는 것과는 반대로, 톈안먼항쟁은 단순히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지식인과 청년이 봉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친자본주의 조치, 강화되는 불평등, 관료집단의 비민주적 통치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계급이 봉기하고 자주적인 조직체를 결성했던 운동이었다. 당 관료체제에 맞선 가장 큰 봉기였던 톈안먼항쟁에 대한 덩샤오핑의 무자비한 학살은 힘의 균형을 당내 우익(또 다른 친시장 개혁을 가속화하고 있었다)으로 기울게 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중국 경제는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시행했는데 그 비용은 전적으로 외국 자본이 충당했다. 메르칸탄테는 이렇게 지적한다. “초국적 자본이 저임금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거대한 규모의 노동력을 통해 중국은 이른바 생산의 국제화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많은 산업이 제국주의 국가에서 종속된 경제로 이전하고, 생산이 다양한 나라에서 여러 세분화된 공정으로 나뉘는 것이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둔화된 경제성장은, 중국이 세계자본과 경쟁하고 새로운 국가에 상업적으로 침투하도록 더욱 압박했다. 이것은 일대일로(一带一路) 계획과 같은 국외의 기반시설 개발과 함께 추진됐다.
오늘날 은행과 같은 필수산업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국유화돼 있고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이 통제하지만, 중국 경제를 이끄는 대외무역의 가장 큰 동력은 민간자본과 외국자본이다. 이런 수출지향적 자본주의 개발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탈산업화와 동시에 진행됐다. 중국의 거대한 노동력, 따라서 낮은 임금은 ‘국가 간 노동력의 차이에 따른 교역(global labor arbitrage)’의 핵심이 됐다. 이것은 선진국에서 종속 국가들로 생산을 이전하고 중국을 세계 자본주의 공급망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결론
중국의 경제성장은 산업과 기반시설의 거대한 발전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지위를 높이고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처우를 향상시켰다. 그러나 자본주의 복고의 과정에서 중국은 가장 불평등한 사회의 하나가 됐다. 자본주의 복고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속하게 할 중국의 신흥 자본가들을 풍요롭게 하고 새롭게 육성한 반면, 노동자계급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노동자계급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농촌에 주소지를 두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매년 6개월 이상을 산업 부문에서 일하기 위해 도시로 이동하는 이주 노동자들이다. 중국 노동력의 3분의 1에 이르는 이 노동자들은 도시 노동자들이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혜택에 접근할 수 없고, 본질적으로 2등 시민에 불과하다. 이렇게 사회적 혜택과 고용보장에서 배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경쟁적 노동력 시장을 창출하게 된다.
100년 전 중국공산당은 제국주의에 맞선 중국 민중의 거대한 운동 속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 못하는 자국 부르주아들의 무능력 속에서 결성됐다. 오늘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 자리를 잡으려 하면서, 1949년 혁명의 밑바탕이 된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사실 이 문제는 중국이 새로운 세계 시장에 진입하고 세계 자본주의 경쟁이 미국과의 경쟁으로 나타남에 따라 더욱 심각해졌다.
‘평화공존’이라는 중국공산당의 전략은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고 그 이윤을 극대화하는 값싼 노동력 공급처로 남아있는 한에서만 가능했다. 이제 중국의 성장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다른 경쟁자들보다 훨씬 앞서 있던 미국에 필적하기 시작하면서, 중국은 미국과 격화되는 무역전쟁에 이르게 됐다. 미국에선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이 전쟁을 지지한다.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격화된 무역전쟁은 현재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계속되며 심화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중국에 맞선 연합을 형성할 동맹국들을 찾으면서 말이다.
이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대응은 중국을 세계 자본주의 속으로 더 깊숙이 통합시킴으로써 이 경쟁을 심화시키는 것뿐이었다. 미국의 공세에 맞서는 중국의 투쟁은 제국주의에 맞서 국내외 노동자계급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사, 외교 정책에 주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국내적으로 오늘날 중국 자본가계급은 더 이상 적대계급이 아니라 당의 대열에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우군이다. 마윈 같은 억만장자를 포함해 중국 자본가의 40%가 당원이라고 자랑하는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계급을 강력하게 규율하면서 그들에게 보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은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확산시킨다는 전망 아래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아 건설됐던 자신의 초창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대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중국공산당은 민중 속에서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주의에 의존해왔다. 그것이 시진핑의 100주년 기념연설에 반영된 정서인데, 중국의 적들과 싸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국가적 단결과 중국공산당 지도력에 대한 신념을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스탈린주의적 배신과 자본주의 복고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국공산당의 퇴보는 연속혁명의 필요성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이론은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국가 즉 제국주의 억압에 처해있으며 국내 자본가들은 약해빠진 나라에서는 오로지 자기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서만 민주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했다.
세계 자본주의 패권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런 혁명이 확산되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투쟁의 일부가 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강령도 전략도 아니었다. 자본가들의 선동이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것과는 반대로, 중국 민중을 위한 해답은 더 많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오늘날 미중 사이에 악화되는 상황과 자본주의 간 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안드레 바르비에리가 요약한 바와 같이(관련 기사) 중국에서 지난 6개월간 400건 넘는 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은 팬데믹 기간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를 강요받은 노동자들 속에서 새로운 주체성이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민중에 대한 초과착취, 분할, 과도노동의 결과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국의 거대한 노동자계급과 급진적인 청년들은 중국공산당 관료집단의 잘못된 지도력(그것은 제국주의적 열망을 가지고 그들을 반동적인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로 오도하는 것이다)을 거부하고,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의 설립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 세계 노동자계급 모두가 그렇듯이 중국 노동자계급의 강점은 승리를 위해 자기조직화와 계급으로 단결해 싸우는 데 있다. 일국적으로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말이다. 사회주의를 향한 길은 노동자계급이 자국 자본가들과 제국주의 모두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 채, 자신만의 정치적 수단과 지도력을 건설하는 것을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의 관료집단이나 마오쩌둥주의 둘 다 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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