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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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이 대대적인 투쟁에 나설 때에야 비로소 극우보수 세력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밀어붙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지금은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라는 주장은 이 소중한 경험을 깨끗이 잊으라는 소리다.(사진_노동과세계)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노동자의 투쟁은 계속돼 왔고, 새롭게 투쟁을 시작한 노동자도 있다.
이렇게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요인은 많다. 그 중에서도, 함께 힘을 모아 싸워야할 동료들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문재인 정부를 편들면서, 지금은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다. 민주노조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노동자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문제가 특정한 몇몇 사업장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민주노조운동을 총괄 지휘하는 민주노총 김명환 집행부부터, 노동자투쟁에 힘을 싣기보다는 정부와의 대화와 협상에 힘을 싣고 있다. 이런 태도가 어떤 결과를 낳고 있는지 분명하게 짚어봐야 한다.
“극우보수를 몰아내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지금은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극우보수 세력을 향한 노동자의 적대감이 증폭돼 왔다. 노동자가 대거 참여한 촛불항쟁의 힘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교체한 만큼, 극우보수의 재집권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노동자들의 감정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런데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을 자제하는 것으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예컨대 극우보수 세력은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혐오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문재인 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자본가들이 자유롭게 활개칠 수 있도록 규제를 없애고, ‘철밥통 귀족노조’에 철퇴를 내리라고 호통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사회 전체를 오른쪽으로 거칠게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런 극우보수 세력을 몰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선 간단한 힘의 법칙이 작동한다. 저들이 들이미는 오른쪽 화살표를 꺾어버리기 위해, 저들과 정반대편에 있는 계급, 즉 노동자계급이 무대에 올라 압도적인 힘을 동원해 사회 전체를 왼쪽으로 몰아붙여야 한다. 즉 과거보다 더 강한 투쟁이 필요하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을 자제하며 무대에서 내려와 버린다면, 그다음에 펼쳐질 상황도 자명하지 않을까.
촛불항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집권 초기에 문재인 정부는 어느 정도 노동자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노동존중, 비정규직 제로, 일자리 정부 따위의 미사여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노동자가 더 이상 투쟁의 힘을 제대로 동원하지 않게 되자, 이제 무대 위에는 문재인 정부와 극우세력만 남는 형국이 됐다. 문재인 정부로선 굳이 조직 노동자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됐다. 덕분에 극우세력은 더 큰 목소리로 활개 치며 문재인 정부를 향해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라고 요구했고, 그들 간의 합의로 모든 개악이 처리되고 있다.
“극우보수를 몰아내고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지금은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계획은 결국 극우보수에게 길을 터주고, 노동자운동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키는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래도 문재인 정부는 친노동 정부이지 않나? 좀 더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이명박, 박근혜 시절의 끔찍한 기억 때문인지, 모든 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극우보수 세력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적어도 문재인 정부는 (아직까지는) 노동자투쟁을 겨냥해 대대적으로 경찰을 동원해 탄압하지는 않고 있다. 청와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농성하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마침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느껴진다.
▲ 그러나 이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한국지엠 군산공장 노동자들은 공장폐쇄와 함께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었다. 한국지엠 모든 공장에서 비정규직은 우선해고 대상이 됐다. 정부는 지엠 자본가에게는 혈세를 갖다 바치면서, 벼랑 끝까지 내몰린 노동자에겐 한 걸음 더 물러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고도 직영정비 축소 외주화, 연구개발 법인분리 등 구조조정이 계속되고 있다.
▲ 현대중공업에선 지난 몇 년간 수만 명이 잘려나간 데 이어, 올해에도 또 다시 수천 명의 노동자를 잘라내는 인력 구조조정을 강행하고 있다. 성동조선해양, STX조선 등 다른 조선소에서도 노동자가 잘려나갔다.
▲ 금호타이어 해외매각을 관철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는 “정치적 논리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며 산업은행을 통해 법정관리 압력을 행사해, 노동자투쟁을 무너뜨렸다. 청와대는 그게 “대통령의 뜻”이라고 인정했다. 금호타이어 노동자는 상여금 반납, 복지축소, 임금삭감, 노동강도 강화 등을 강요받고 투쟁할 권리까지 몰수당했다. 윤장현 광주시장은 이렇게 해서 광주형 일자리가 실현됐다고 자랑했다.
▲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개악하면서 임금인상 효과를 무력화한 것도 문재인 정부다. 공약으로 내세웠던 최저임금 1만 원 약속은 파기됐고, 이제는 지역별 최저임금 차등적용 계획까지 슬그머니 던지기 시작했다. 최저임금이 최악임금으로 가고 있다.
▲ 야심차게 ‘비정규직 제로’ 정책을 선언하고 정규직화를 추진했으나, 실제로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모두에서 허울 좋은 자회사 정규직화가 남발되고 있다. 이에 항의하며 투쟁에 나선 노동자의 파업을 깨기 위해 대체인력 투입 같은 공격이 자행되고 있지만, 정부는 나몰라라 한다.
▲ 박근혜 정부가 재벌에게 돈을 받고 추진하다 중단된 ‘규제프리존법’이 문재인 정부 하에서 통과됐다. 대선 때 문재인은 이를 적폐법안이라 불렀다. 당시 민주당은 다른 경쟁후보가 이 법안에 찬성하자 ‘이명박, 박근혜 정권 계승자’라고 비난했다. 이제는 문재인 정부 자신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못 다한 과업을 완수하는 ‘계승자’ 노릇을 하고 있다.
물론 이밖에도 많은 사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각에서 ‘친노동 정부’라고 착각하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 벌어졌다.
이게 단지 우연한 일일까? 문재인 정부가 결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극우보수 세력이 너무나 강력하게 밀어붙여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의 동정표를 얻기 위해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변명거리도 안 찾고 당당한 태도로 자본가 살리기 개악조치를 추진한다. 차이가 있다면, 지난 정권들보다는 좀 더 부드럽고 세련된 방식(예컨대 각종 협의기구에서 노동자의 목소리를 다 들어주되 결과적으로 무시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뿐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 역시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자본가정부’라는 점을 보여준다. 결국 상황은 이런 것이다. “극우보수 세력에 맞서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노동자가 스스로 투쟁을 자제했을 때,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손발을 묶은 노동자운동의 목을 졸랐다. 적폐청산과 개혁을 위해 문재인 정부에게 좀 더 시간을 줘야 한다며 주저하는 동안, 문재인 정부는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를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자본가정부’에게서 이것 이외의 다른 모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정직하게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자라면, 이 모든 사실을 못 본 체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이 사실로부터 스스로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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