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연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우리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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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우리는 노동자연대가 관련된 성폭력 사건을 주목해 보게 됐다. 노동자연대에서 비중 있는 활동가였던 ‘P’가 가해자로, 같은 단체에 있었지만 지금은 탈퇴한 ‘J’가 피해자로 등장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최대한 공정하게 이 사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여러 주장과 자료를 검토했다. 노동자연대를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주장뿐만 아니라, 노동자연대의 주장이 담긴 많은 글에 대해서도 최대한 모두 검토하려 애썼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을 도입해선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2018년 12월 14일자로 노동자연대에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포함해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글을 보냈다. 그 글의 마지막 단락은 다음과 같다.
“노동자연대가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진지한 자기비판과 사과의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면서 노동자연대와의 공동 활동이 필요한 경우 열린 자세로 함께 할 것입니다. 반대로 노동자연대가 사회주의 운동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태도를 고수하기로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연대와의 공동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함께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해 나갈 것입니다.”
2019년 1월 2일자로 노동자연대가 답신을 보내 왔다. 그 답신의 내용은, 우리가 희망했던 진지한 자기비판과 사과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연대는 조직 내에서 발생한 P의 성폭력을 비호하는 그간의 태도를 완강하게 고수했다. 더불어 피해자 측이 주도한 “노동자연대 비방과 중상모략”이 진짜 문제라며 다른 단체와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태도 역시 그대로 유지됐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해 12월의 글에서 제기한 대로, 노동자연대와의 공동 활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와 문제제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사건
우리가 접한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16년 2월 29일에 열린 한 토론회에서 피해자 J가 자기 경험을 요약해 교훈을 끌어내는 발언을 했다. 그 배경엔 당시로부터 13년 전인 2003년 8월 14일, 가해자가 만취한 상태의 피해자를 집으로 데려다 준다며 택시에 태운 뒤, 여관으로 데려가 심각한 성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있었다(당시 둘 다 노동자연대 회원이었고 가해자는 선배 활동가였다).
이 토론회에서 J는 일반화된 교훈을 끌어내는 게 발언을 신청한 이유였기 때문에, 그 사건이 발생한 단체가 어디인지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사건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노동자연대는 이 문제를 ‘사건화’했고, 피해자에게 조사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와 관련해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들(피해자 측)의 목적은 우리(노동자연대)를 중상모략하는 것”, “성폭력 당했는데 그렇게까지 그것을 당당하게 얘기할까” 등의 낙인을 찍으며 명백히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가했다.
그동안 2차 가해라는 개념이 많은 논란을 낳았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지만, 이런 식으로 피해자의 ‘자격’을 문제 삼는 것은 모종의 ‘피해자다움’을 강요함으로써 피해자를 무력화한다. 또한 심리적 위압감을 줌으로써 피해 호소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다. 안희정 사건을 비롯한 여러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봐 왔던 논리다. 그리고 이는 명백히 피해자에 대한 또 하나의 가해 행위다.
오래 전에 발생한 일이어서 사건 정황에 대한 피해자의 세부적인 기억은 취약할 수 있고, 특히 물질적인 증거는 찾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피해자는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관되게 진술했다. 반대로 가해자는 이후 피해자의 항변을 듣고 당황해 하며 제대로 답변도 못하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바꿔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부인했다.
더 나아가 가해자는 (자신이 가해자로 지목되기 이전에) 피해자가 노동자연대를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취지의 공식 문서를 작성했고, 노동자연대는 그 문서를 장기간 웹 사이트에 게재하고 지속적인 문제제기를 받은 후에야 삭제했다.
노동자연대 내에서 진행된 자체 조사 과정에서도 가해자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단정하는 진술과 “기억이 안 난다”는 모순적인 진술을 내놓으며,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원인을 모르는 분노”에 휩싸일 만큼 기만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 사건과 관련해 만약 가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진실성이 있었다면, 그런 태도를 취할 이유가 있을까.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과 가해자의 기만적인 태도를 종합해볼 때, 우리는 이 사건을 ‘노동자연대 회원이 저지른 성폭력 사건’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연대의 자가당착
그런데 노동자연대는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가해자의 불성실하고 기만적인 태도 때문에 큰 내홍을 겪었으면서도,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가해자에게 ‘증거불충분’에 의한 ‘무혐의’ 평결을 내리고, 피해자 측을 ‘노동자연대를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려는 세력’으로 낙인찍는 데 힘을 썼다.
노동자연대는 여성억압과 성폭력에 단호하게 대응한다는 자신의 원칙과는 달리,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내주고 피해자 측에게 혐의를 씌우는 자가당착에 빠졌다. 그런 평결은 (피해자의 폭로에 대해 ‘증거능력’이 일부 있다고 말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피해자의 호소에 대해 ‘못 믿겠다’는 의심을, 반대로 아무런 증거능력을 갖추지 못한 가해자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내주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징계도 성폭력 문제를 전적으로 배제한 채 오직 조직 내 논의에 대한 그의 불성실한 태도 문제로만 국한했다. 이는 명백히 성폭력 가해자를 비호한 평결이다.
이런 평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자연대는 피해자 중심주의 비판, 2차 가해 개념 비판 등 이론적 수단을 동원한다. 주관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그들의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그리고 노동자연대 역시 애초에 피해자 중심주의가 발생한 사회적 맥락에 대해 수긍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건과 같은 구체적인 문제, 특히 자기 조직이 부정할 수 없이 연관된 문제 앞에선 균형감각을 잃어버린다.
노동자연대가 꽤 강조하는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언제나 진실과 부합하는 건 아니다. 매우 드물긴 하지만 허위로 성폭력 사건을 조작하는 사례도 있다. 그래서 부당하게 누군가가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주의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 점에서 ‘객관주의적 태도’를 강조하는 건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된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노동자연대가 취한 태도는 객관주의적 태도라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객관주의로 포장된 주관주의적 정당화와 책임 회피일 뿐이다.
그런 주관성은 가해자 P를 향한 그토록 신중하고 배려 넘치는 태도가 피해자인 J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이어진다. 노동자연대는 P가 성폭력 가해자가 아닐 수도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에는 놀랄 만큼 주의를 집중하면서, 가장 강력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스스로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가해자의 입장을 수용하면서도, 반대로 성폭력을 당했다고 하는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은 애써 수용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연대는 자신들도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으며 종합적으로 정황을 파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면, 그토록 간단하게 피해자의 호소를 ‘노동자연대 비방’, ‘중상모략’으로 이끌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선, 가해자로 지목된 P 개인의 책임을 넘어 노동자연대 자체가 문제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피해자는 노동자연대와 가해자 P를 직접 거론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에둘러 표현했는데도, 굳이 노동자연대가 이것을 쟁점화하고 피해자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갈등을 부추겼다. 이후 피해자가 가해자를 지목한 뒤로는, 노동자연대 자체 조사에서 가해자의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태도를 확인했으면서도 가해자에겐 성폭력 관련 무혐의 평결을 내리고, 반대로 피해자 측에겐 비방을 지속했다.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등에 대한 관점을 떠나, 노동자연대의 대응 방식은 피해자를 또 다시 고통의 수렁에 빠뜨리고, 그 고통을 가중시키는 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 문제는 왜 중요한가
노동자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키는 일체의 담벼락을 넘어 단결의 힘을 강화하는 데 있다. 노동자연대가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노동자연대는 조직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에 대해 책임 회피적이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성별을 넘어선 노동자 단결의 기반을 실천적으로 훼손했다.
이는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운동 단체 내에서조차 피해 여성의 권리가 묵살되는 선례가 된다. 그리고 이 선례를 목격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성 정체성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단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회의감과 반감을 부추긴다. 즉 이런 선례는 다름 아니라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이 번성할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된다.
노동자연대는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통상적인 페미니즘 정치에 압도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로만 본다면,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충분히 지지할 만하다.
하지만 노동자연대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불철저하고 이중적인 태도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진정성과 효력을 잃어버린다. 노동자연대의 편협한 자기방어적 태도는 페미니즘의 약점을 넘어설 수 있는 운동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주의 운동을 향한 반감과 편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거봐, 사회주의자들은 말로는 여성억압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결국 조직보위를 위해 여성의 권리를 묵살하는 자들이야.”).
분리주의 경향을 포함한 페미니즘 운동의 약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도 사회주의자들은 그 어떤 경향보다 단호하고 철저하게 여성억압에 맞서야 한다. 그래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민주적 권리를 위한 투쟁을 넘어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투쟁의 길을 열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여성 문제에 기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 그리고 성 차별을 활용한 노동자계급 분열에 맞서 가장 단호한 투사가 될 때만 사회주의의 길을 열 수 있다. 또한 억압받고 차별받는 모든 여성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안내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단결노선을 지킬 수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노동자연대가 지금 보이고 있는 조직 내 성폭력 문제에 대한 불철저한 태도는 단지 사회주의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의 확산에 밑돌을 깔아주는 행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런 불철저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조직이나 사건에만 원칙적 잣대를 들이대는 걸 넘어, 자기 조직 내부에도 동일한 원칙적 잣대를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런 사안에 철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지배계급에게 또 다른 공격의 빌미를 내주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그동안 정부와 자본은 노조 간부들의 비리, 도박 사건들을 활용해 단결투쟁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신뢰와 자신감을 깨뜨려 왔다. 성폭력 사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저들에게 활용될 수 있다. 이미 발생해버린 사건을 없는 것처럼 감출 순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이에 대한 최선의 대처는,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을 정직하고 투명하게 직시하면서 진지한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으로 조직의 규율을 재무장시키는 것이다.
사회주의 조직이 취해야 할 태도
따라서 사회주의 조직이라면, 자기 회원이 관련된 성폭력 사건을 대할 때 그건 우리 조직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방어적인 울타리부터 치려고 해선 안 된다. 아무리 혁명적 원칙을 표방하는 조직일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억압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일체의 여성억압에 맞서려는 정치문화(규율)로 회원들을 더 철저하게 훈련시키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그리고 빈틈이 있었다는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 그래야 회원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며, 자기들끼리 모여 토론할 때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현실의 시험대에 서게 됐을 때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성장해 가는 회원들로 구성된 조직이어야만 현실에서 부딪히는 온갖 자본주의적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노동자연대가 아무리 여성억압에 대한 ‘자체적인 분석’을 발전시키고 토론을 많이 하더라도, 정작 이렇게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며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런 온갖 ‘분석’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런 방식으로 어떻게 회원들을 원칙적인 사회주의자로 단련시킬 것이며, 그런 조직이 어떻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겠는가. 그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을 상기시켜줄 뿐이지 않은가.
우리가 노동자연대에 보내는 글에서 요청했던 것처럼 ‘자정 능력’이라는 것을 노동자연대가 발휘했다면, ‘노동자연대 비방’에 대한 억울함만을 앞세우며 주로 피해자 측을 비방하는 것으로 맞서면서 점점 더 상황을 나락으로 빠뜨려 왔던 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봤을 것이다. 그러면 가해자 P의 “인생”에 대한 배려와 달리 J에 대해선 모종의 중상모략과 연관돼 있을 거라는 낙인찍기로 달려갔던 자신의 모습이 사실상 (2차 가해라는 개념에 대한 태도를 떠나) 피해자를 겨냥한 또 하나의 가해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무엇을 자기비판해야 하는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의 비판에 대해 자신들이 “닥치고 사과해야 했을까요?”라고 되묻는 어이없는 항변을 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연대가 그에 부합하는 수준에서 자기비판과 사과를 했다면, 사회주의 운동에 덧칠된 낙인과 불명예를 걷어내는 출발점 정도는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그저 희망사항으로 끝나 버렸다.
우리가 이렇게 노동자연대의 관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안에 대해 완전무결한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노해투(준)을 포함한 노동자운동 전체가 이와 같은 문제 앞에 약점이 있으며, 성별을 넘어선 노동자 단결투쟁을 조직하는 데서도 이런 약점을 극복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건에 관심을 기울인 것조차 사실은 적잖이 늦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노동자연대 비판은 단지 노동자연대라는 한 조직을 규탄하기 위한 것으로 의미가 한정돼선 안 된다. 이론에서는 단호하게 여성억압과 성폭력을 반대하지만 실제로 뭔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사력을 다해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운동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것 이상의 철저한 태도로 우리 조직, 그리고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노동자들의 정치문화를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 자신이 어떤 정신으로 우리의 운동을 건설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의 입장
노동자연대는 설사 이런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더라도 단결과 공동 활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통상적인 정치적 이견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전술과 조직의 문제에서 우리와 노동자연대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 때문에 노동자연대와의 공동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비호 행위는 저마다의 판단 차이와 자유로운 토론의 문제로 정당화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성폭력 사건을 비호함으로써 단결의 토대를 허물어뜨리고 오히려 분리주의적 페미니즘 같은 분열적 운동이 성장하도록 밑돌을 깔아주면서, 단결과 공동 활동을 막아선 안 된다고 다른 단체나 활동가들을 힐난하는 노동자연대의 태도는 앞뒤가 안 맞는다. 노동자연대는 공동 활동 운운하기에 앞서 자신의 이중적 태도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노동자연대가 그간의 성폭력 비호 행위를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며, 진지한 성찰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노동자연대가 자신에게 필요한 자정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거부하면서 완강하게 다른 단체나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되풀이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주도하거나 관여하는 조건에서 노동자연대에 공동 활동을 제안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관련해 ‘여성 문제에 한해서’라는 부대조건을 달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정세 조건과 계급투쟁의 전개에 따라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공동 활동이 필요한데, 그 공동 활동을 위한 기구에 노동자연대가 참여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 그 공동 활동에 참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 참여한다면 노동자연대 배제를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한시적으로 그들의 참여를 인정할 것인지 등에 대해선 정세와 계급투쟁 과제에 복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구체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경우든 그간의 노동자연대의 태도에 대한 단호한 비판적 관점을 적절한 방식으로 분명히 밝힐 것이다.
2019년 3월 21일
노동해방투쟁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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